암 투병기 담은 그림 이야기책 프랑스와 한국에서 출간한 수신지

암은 ‘긍정의 힘’ 가르치고, 새로운 꿈 찾아준 친구

스물일곱 젊디젊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난소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그러나 절망 속에 주저앉지 않았다. 자신이 암 선고를 받고 투병하는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담담하게 그려냈고, 그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됐다. 프랑스에서 먼저 책이 나온 후 한국에서도 출간된 그래픽 노블(Graphic Noble) 《3그램》의 작가 수신지(32)씨를 홍대 앞 그림책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저처럼 아픈 사람들, 그리고 용기가 필요한 이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주최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인 ‘작가의 집’ 작가로 선정되어 프랑스로 떠날 예정이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주로 그림책 일러스트를 그리던 수신지씨. 서양화과를 졸업했지만 그의 꿈은 화가보다 ‘그림을 그리면서 글도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대학시절에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이 따로 있는 줄도 몰랐는데, 졸업작품전에서 그의 작품은 본 한 출판사 관계자가 “일러스트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우연히 출판 일러스트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친구들과 공동 작업실을 마련해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스물일곱 살 가을, 배가 임신부처럼 튀어나와 이상해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뱃속에 똥이 가득 차 있어서 그렇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그러나 좋지 않은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이곳저곳 병원을 다니면서 진단을 받다 난소암을 발견했다. 그가 낸 책의 제목 《3그램》은 난소 하나의 평균 무게다.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않던 3그램, 그 무게를 생사(生死)의 무게로 감당해야 했던 작가의 마음이 담긴 제목이다.

그의 그래픽 노블에는 주인공이 난소암의 증상을 느끼는 것부터 퇴원 후 병원 문을 나서기까지의 이야기가 에피소드별로 기록되어 있다. 병실을 같이 쓰는 아줌마와 텔레비전 때문에 싸운다든가, 오래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병문안을 온 이야기 등 하루 종일 병원에서 지내는 일상 중 끊임없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병마에 대해 의연하게 대처하지도 않고, 세상이 송두리째 무너진 듯 좌절하지도 않는다.

“책에는 없는 이야기인데, 병원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날, 남자친구가 ‘차를 가져가자’고 해서 남자친구 집에 들렀는데, 하필이면 그때 남자친구 부모님을 처음 뵙게 되었어요. 부모님을 보고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프다고도 할 수 없는 복잡했던 심경이 기억나네요.”


그는 암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날의 심정, 항암치료를 받자 머리카락이 빠지고 가발을 사야 했던 일들을 밝고 활기찬 젊은 여성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암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어요. 투병 과정도 일상의 하나라고 생각했죠. 슬픈 일이지만 늘 슬프게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요. 이 책은 난소암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준비해왔습니다.”

암 투병을 계기로 그는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겠다’는 원래의 꿈을 이뤘다.

“만화를 좋아해서 많이 봤는데, 만화가들은 정말 그림을 잘 그리더군요. ‘나도 저렇게 그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잘 그리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냥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자’고 편안하게 생각하며 시작했지요.”

그러나 암 수술에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작업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늘 그림을 그렸어요. 이야기를 엮어가야 하니까 늘 생각을 집중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암이라는 내용이 담기니 담당의사 선생님이 감수를 봐주셨지요.”


책을 출간한 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도 담당의사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이게 나야?”라며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엄마는 제가 그린 엄마 모습이 마음에 안 든대요. 언니는 커리어우먼이라는 것을 안경을 이용해 강조했는데, 모두 자기를 닮지 않았다고 해요. 가족, 남자친구, 친구들 모두 감사하지만 특히 언니가 많이 고마워요. 매일 퇴근하자마자 달려왔고 산책도 시켜주었거든요.”

자신의 투병기를 그린 그림으로 병원을 돌며 릴레이 전시를 하는 것도 그의 꿈이었다.

“저처럼 아픈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싶어 생각한 게 병원에서 전시를 하는 것이었어요. 병원 홍보 담당자에게 일일이 전화했는데, 별로 반가워하지 않더라고요. 이렇게 먼저 제안하는 경우가 없는데다 제가 유명인사도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마지막 전시를 했는데, 그때 ‘이제 다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도 병을 극복했던 사람들의 수기를 읽으면서 힘을 얻었다는 그는 《3그램》 역시 그런 책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3그램》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지원작으로 선정되었고, 올해 4월 프랑스 캄부라키스(Cambourakis)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3그램》 작업을 하면서 처음 만화를 그려본 그는 단편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로 2011년 대한민국 창작만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책을 내게 된 것은 지난해 1월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 참여한 게 계기가 되었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은 세계 최대의 만화 페스티벌로, 내년(40회)에는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선정돼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도시인 앙굴렘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만화’라는 콘텐츠 덕분이었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은 만화가들의 축제입니다. 볼로냐아동도서전이 비즈니스에 강점이 있다면 앙굴렘은 좀 더 축제에 가까워요. 박윤선이라는 친구가 앙굴렘에서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친구도 볼 겸 갔다가 캄부라키스 출판사 관계자를 만났지요. 제 더미북을 보고 싶다고 해서 드렸는데, 다음날 바로 계약하자고 하셨어요.”


올해 그는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주최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인 ‘작가의 집’ 작가로 선정되어 8월이면 프랑스로 떠날 예정이다.

“지금 계획으로는 3개월 정도 머물며 개인 작업을 하고, 출판사에서 추진하는 사인회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출판사에서는 앙굴렘에 있는 병원에서의 전시도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 순수미술 등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싶습니다.”

암 선고를 받은 지 5년이 지난 지금, 그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일도 열심히 하고, 요가를 하면서 몸도 열심히 돌보고 있다. 20대 때 암이라는 친구를 만난 덕분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열심히 연습했다는 그. 암 투병기인 그의 책을 읽는 동안 슬며시 웃음 짓게 되는 것도 바로 그 ‘긍정의 힘’이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 : 김선아
촬영협조 : 그림책카페 앨리스와 도로시 alicedorothy.com
  • 2012년 07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