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부토(舞踏) 예술가와 함께 아트 뮤직비디오 만든 비디오 아티스트 육근병

한국과 일본의 시공을 뛰어넘은 우정과 예술혼이 담긴 뮤직비디오

한국의 현대미술가 육근병과 196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 전위적인 현대무대예술인 ‘부토(舞踏)’의 대가이자 음악가인 도모에 시즈네. 한국과 일본 예술계의 대표주자들이 함께 만든 뮤직비디오 작품이 나왔다. 3월 1일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시된 〈잠으로의 풍경(Landscape on the way to sleep)〉이다. 대중음악에 주로 활용하는 뮤직비디오 형식을 취한, ‘아트뮤직비디오’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육근병은 영상, 도모에 시즈네는 음악을 담당했다.

〈잠으로의 풍경〉의 시작은 육근병과 도모에 시즈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파울로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등 세계적인 미술전시회에 참여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던 육근병씨는 당시 도모에 시즈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육근병의 작품을 부토의 무대미술로 활용하게 해달라는 청이었다.

“저 역시 부토의 공연을 보고 매료되었던 차였습니다. 부토는 절제된 동작으로 천천히 움직이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대단히 크게 느껴졌어요. 뭔가 원초적이고 토속적인 느낌이랄까? 생과 사,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제 작품과 통하는 점이 많았죠. ‘함께 무대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좋다’고 했습니다.”

뮤직비디오가 출시된 직후인 3월 2일,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만난 육근병씨는 도모에 시즈네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이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오피스 도모에’의 대표 카가야 사나에씨도 함께했다. 카가야 사나에씨는 도모에 시즈네의 뒤를 잇는 부토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1994년 도모에 시즈네가 부토공연 무대에 올린 육근병의 작품은 〈The Sound of Landscape+Eye for Field〉. 동그란 무덤 같은 설치물 안에 어린아이의 눈을 촬영한 비디오 모니터가 들어가 있는 작품이다. 관객은 작품을 바라보는 주체, 작품은 일방적인 응시의 대상이 되는 객체라는 공식을 육근병은 이 작품을 통해 뒤집었다. 무덤 속 외눈박이 눈은 껌벅거리면서 관객을 바라보고, 무언의 말을 걸어온다. 오래된 무덤과 비디오 모니터라는 첨단의 현대 문물, 죽음의 세계인 무덤과 현실의 무대, 그리고 그것을 잇는 외눈박이 눈. 이 작품은 시공간을 뛰어넘으며 관객을 저 먼 시원(始原)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안내한다.

1994년 공연 장면. 도모에 시즈네의 춤.
1994년 일본 오사카 기린플라자에서 열린 부토 공연은 육근병의 이 작품에서 받은 영감으로 시작됐다. 일본에서는 매장이 금지되어 있어 도모에 시즈네에게 한국의 무덤은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조상의 무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나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풍경에서 “한국문화의 강인함, 지역과 정치를 넘어서서 인류 전체에 따스함을 던져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무덤 속 ‘아이의 눈’에서 그는 “따스하면서도 때로는 애달프고, 인류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려는 투철한 의지가 보였다”고 한다.

육근병의 작품을 도모에 시즈네는 음악으로, 또 춤으로 해석했다. 더욱 의미가 깊었던 것은 게스트 뮤지션으로 한국의 전설적인 퍼커션 연주자 김대환, 일본 프리재즈계의 선구자라 불리는 베이시스트 요시자와 모토하루가 도모에 시즈네(기타)와 함께 연주, 한일 예술가의 만남의 장이 됐다는 것이다. 즉흥 연주로 이루어진 이날 공연에서 세 사람은 박진감 넘치는 앙상블을 빚어냈다. 그런데 이 공연은 두 번 다시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1998년에 김대환, 2004년에 요시자와 모토하루가 차례로 저세상으로 가고, 도모에 시즈네만 남았기 때문이다. 도모에 시즈네는 그때 그 공연을 영원히 간직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고, 육근병에게 “뮤직비디오로 만들자”고 청했다. 육근병과 김대환의 인연도 각별하다.

“대학시절 저도 한동안 음악에 빠져 지냈어요. 영국의 록그룹 ‘핑크 플로이드’에 열광했고, ‘옥시즌’이라는 그룹사운드를 만들어 보컬과 리드기타를 담당했죠. 종종 밤무대 공연을 하기도 했고요. 김대환 선생은 1988년 제가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했을 때 처음 만났어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나타나서는 장화를 신은 채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셨죠. 흑우(黑雨)라는 별명처럼 까맣게 차려입고 머리는 질끈 묶고 선글라스를 쓴 채였죠. 그런데 저의 한 작품 앞에 서더니 1시간 동안 꼼짝 않고 보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네가 작가냐?’고 물으시더군요.”

도모에 시즈네, 김대환, 요시자와 모토하루의 즉흥 공연.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채 강한 에너지를 내뿜는듯한 음악. 도모에 시즈네가 김대환을 선택한 것도 그 원시적 에너지에 반해서라고 한다. 육근병이 알아본 부토의 에너지와 부토의 대가 도모에 시즈네가 발견한 육근병, 작가로 출발할 때부터 육근병을 지켜본 김대환과 김대환을 알아본 도모에 시즈네…. 세 사람은 시차를 두고 얼기설기 얽힌 인연 후에 한무대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제, 생(生)과 사(死)라는 벽을 뛰어넘어 또다시 하나의 무대를 만들었다.

〈잠으로의 풍경〉은 태초의 아담과 이브인양 남자와 여자가 입을 맞추며 물속에서 떠오르면서 시작한다. 도모에 시즈네는 1994년 공연을 바탕으로 ‘테마’ ‘트리오’ ‘기타 테마’ 등 세 장으로 나뉜 음악을 만들었다. ‘테마’는 공연 테마곡에 고래 울음소리, 바람소리를 샘플링한 것을 리믹스했다.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의 울음과 바람이 만나고, 여기에 1994년 공연 음악이 더해졌다. 제주도에서 촬영한 육근병의 영상은 남녀가 나란히 서서 세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는 남녀는 선지자나 인류의 구원자 혹은 구도자를 떠올리게 한다. ‘트리오’의 음악은 1994년 김대환과 도모에 시즈네, 요시자와 모토하루의 즉흥연주. 육근병은 서울 거리를 배경으로 남녀의 만남과 엇갈림을 영상에 담았다. ‘기타 테마’는 도모에 시즈네가 ‘테마’ 곡을 기타 버전으로 편곡한 음악. 육근병은 여기에 지리산에서 촬영한 영상을 얹었다. 이곳에서 남녀는 자연과 말없는 조화와 공존, 그리고 안식을 꾀한다. DVD 뒤편에는 1994년 오사카에서의 공연 장면도 덧붙여져 있다. 삶과 죽음으로 갈려, 이제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공연이다.

<잠으로의 풍경>의 장면들. 그리고 촬영 중인 육근병씨.
“도모에가 만든 음악을 거의 1년 내내 다른 음악들을 제쳐놓고 들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농염한 느낌, 남과 여의 합(合), 섹슈얼한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그것은 현실에서의 사랑이라기보다 아담과 이브같이 원초적인 사랑, 신성시되는 사랑 같았어요. 남녀의 이야기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연은 전문 배우가 아니다. 화가 김근중(가천대 미대 교수)이다. 육근병은 김근중에게 “일부러 연기하려고도, 표정을 지으려고도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런데도 뮤직비디오 속 김근중의 모습이나 동작이 예사롭지 않다. 마침 육근병의 작업실을 찾은 김근중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뮤직비디오를 함께 만든 육근병, 카가야 사나에, 김근중씨.
“1990년대 초 경기도 여주에서 한 기인을 만나 태극권의 초기 형태인 체선(體善)을 배웠어요. 체선은 몸에 내재된 카르마를 털어내고 몸과 마음을 닦는 수단이지요. 마음속에 품은 화와 분노, 욕망, 감정을 끄집어내 털어내는데, 그게 정말 실체처럼 만져지고 느껴져요. 한동안 그것들과 씨름하고 나면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평온한 상태에 이릅니다. 의식도 분별도 탁 놓게 되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몸과 마음을 맡기게 되지요.”

김근중이 체선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육근병은 그 모습, 인간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모습을 영상에 담으려 했다 한다. 이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육근병은 거의 작품료를 받지 않고 제작에 참여했고, 김근중 역시 “밥 얻어먹는 것으로 출연료를 대신했다”고 한다. 〈잠으로의 풍경〉은 출시된 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한국의 선재미술관 등 미술관에서 소장하겠다는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아티스트들이 관심을 많이 보인다”고 카가야 사나에 ‘오피스 도모에’ 대표는 말한다. 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와 관계없이 육근병과 도모에 시즈네에게 이 작품은 ‘죽은 예술가 친구들과 함께한 최고의 무대를 되살렸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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