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 화가 김지원

바람을 그리고 싶었다

김지원
1961년 서울생. 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 졸업. 프랑크푸르트 국립조형 미술학교 졸업. 1988년부터 지금까지 21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국립현대미술관, 금호미술관, 소마미술관, 선재미술관, 박수근미술관, 아르코미술관, 토탈미술관, 일민미술관, 영은미술관, 성곡미술관, 광주비엔날레, 쾰른아트 콜로니 W.D.R 스튜디오 등 주요 미술관의 단체전에 참가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선재미술관, 금호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고려대학교 박물관, 리움 삼성미술관, 하나은행 등 중요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대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풍경(風景)’이란 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다. 우선 경(景)이라는 말은 서울(京) 위에 해(日)가 떠 있는 모습으로, 조경학자 강영조는 이 말이 “가시광선에 의해 그 형상이 드러나는 사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빛에 의해 반응하며 사물을 보는 주체를 설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평생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린 세잔은 어느 날 놀라서 말한다.

“농부들이 풍경이나 나무들을 아는지 의심스럽다. 농부가 끄는 마차를 타고 시장에 갔을 때였다. 그는 전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농부에게 그곳은 일터였지만, 세잔에게는 풍경화의 대상이었다. 의식을 가지고 바라보는 주체가 있을 때에만 자연은 하나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이 단순한 것이 아님을 ‘풍경’의 풍(風)이라는 글자는 말한다. 바람을 의미하는 풍은 돛대(凡)와 벌레(蟲)로 이루어진 것으로, ‘순풍을 가득 안은 배의 돛대와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벌레’를 의미한다. 무형의 바람을 가시화할 수 있는 대상들로 바람에 대한 암시만 준 것이다. 산·강·들같이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바람처럼 존재하지만 시각화하기 어려운 것을 바라본다는 의미가 풍경에는 들어 있다는 말이다.

“바람을 그리고 싶었다”고 화가 김지원은 말한다. 청담동에 위치한 하이트컬렉션에서 있었던 그의 21번째 개인전에서 만난 것은 시원한 바다 풍경 그림들이다. 석모도・백령도・청산도・태종대 앞바다, 터키와 그리스의 에게해 등 그는 여러 곳을 여행했다. 당연히 아름다운 풍광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림을 그리게 만든 것은 자연 풍광 자체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섬을 보러 다녔다. 유람과 유랑의 중간쯤에 있는 행위였다. 서울에서 떨어져서 고립되고 싶어, 사람이 없는 곳으로 사람이 없는 계절에 다니게 되었다. 섬을 보러 갔다가… 내가 본 것은 바람의 느낌이었다. 때로 차갑기도 하고 때로 부드러운 훈풍이기도 했다. 내가 느끼고 그리고 싶은 것은 ‘바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낭만풍경_ 118×228cm, oil on linen, 2008
그림 속의 바다는 조용하지 않다. 파도가 일고 물결이 친다.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작품 제목이 지명을 따르지 않고, 그저 〈풍경〉이거나 〈낭만풍경〉인 것이 당연하다. 자연의 구체적인 지형적 특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람’이었던 것이다. 〈낭만풍경〉이라는 작품에는 작가가 전경인물이 되어 그림 속에 앉아서 부는 바람을 오롯이 맞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낭만풍경〉뿐 아니라 〈명랑풍경〉 〈건조한 풍경〉도 있다. 분홍색 담벼락과 파란 지붕의 선이 경쾌한 〈명랑풍경〉은 명랑하다. 메마른 사막 지역의 키 작은 관목류들이 있는 풍경은 메마르다. 풍경(風景)이라는 말 속에 있는 무형의 존재 느끼기를 김지원은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30여 년 넘게 그림을 그려왔다.

“그림이 바람 같다. 어느 날은 그림을 손에 잡은 것 같다가도 어느 날은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다.”

바람처럼_ 하이트컬렉션 2012
이번 전시와 관련해서 그는 《바람처럼》이라는 제목을 가진 두꺼운 화집을 발간했다. 대학 때인 1980년대 그림부터 차곡차곡 정리된 도록이다. “정확하게는 ‘바람처럼’이 아니라 ‘김지원- 노력’이라고 하는 게 맞다”며 그는 껄껄 웃는다. 전시를 보고, 도록을 훑어보니 그의 말이 제법 그럴 듯하게 들려서 나도 웃었다. 결론적으로 김지원에게 그림은 ‘동사(verb)’로서 의미가 있다. 화가 김지원에게는 ‘무엇을’ 그린다는 것보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1990년대 중반 다들 회화의 위기라고 말할 때에도, 나에게 위기라는 것은 없었다. 내 식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늘 있었다. 대상은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찾는 것은 늘 같았다”고 말한다.

맨드라미_ 227×182, oil on linen, 2006
원래 김지원은 맨드라미 작가로 유명하다. 대형 화면에 거칠게 그린 맨드라미 꽃 그림은 잊기 힘든 강한 인상을 남겼다. 10여 년째 맨드라미를 그렸다. 한때 그의 작업실을 촬영한 사진은 맨드라미 꽃그림으로 가득 찬 정원같아 보였다. 그는 “맨드라미의 진한 레드핑크 빛을 사랑하고, 그것의 꿈틀거리는 생(生)에 경탄”했다. 꽃이지만 맨드라미가 갖는 묘한 동물적 질감과 격렬하고 질긴 생명력에 그는 매혹되었던 것이다. 어떤 그림에서는 김지원 자신의 몸과 맨드라미 꽃밭이 하나가 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2011년 초 금호미술관에서 있었던 대규모 개인전에서는 시들어가는 맨드라미를 그렸다. “겨울에 서리 맞고 시든 것, 녹아내리는 것을 보니 아무것도 아닌 식물인데, 어느 순간 장엄해 보였다.” 그때쯤 그가 맨드라미에서 본 것은 생명력을 격렬하게 소모하고 사멸해가는 생명의 장엄함이었다.

맨드라미_ 118×227cm, oil on linen, 2008
사실 이렇게 연거푸 큰 개인전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그만큼 오랫동안 많이 그려와서 그림이 축적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정말 쉬지 않고 그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언제나 그의 일상적인 활동이자 그의 중독이다. ‘그림에 대한 그림 그리기’라는 부제가 달린 〈그림의 시작 구석에서〉 시리즈와 잡다한 주제들을 동일한 크기로 그린 〈34×24〉는 일상이 그림이 되는 절묘한 순간이 어쩌면 넋두리 같은 이야기가 그림이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무거운 그림〉 〈파란 그림〉 〈아픈 그림〉도 있다. 〈아픈 그림〉은 여러 가지로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이 많은데, 그냥 ‘아픈 그림’이라고 썼다.

맨드라미_ 228×182cm, oil on linen, 2009
“나는 좀 느린 사람인 것 같다.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정물화・풍경화 같은 것에 자꾸 눈이 간다. 아직도 거기에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그릴 것 투성이다.”

무제_ 118×228cm, oil on linen, 2008
그의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그림으로 번역한다. 금호미술관에서 했던 전시 〈이륙하다〉에서 그는 공항 풍경과 거대한 군함을 그린 그림을 선보였다. 공항 대기실에서 바라본 비행장 트랙과 선적구조물 등을 그린 것인데,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부피감이 별로 없는 선적 구조물의 뼈대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어수선한 그림자들이었다. 이런 부피감 없는 것들과 짝을 이루며 전시에 함께 등장했던 것은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거대한 군함을 그린 작품들이다. 어떤 설명도 없이 툭 던져지듯이 그려진 이 그림들은 한때 유행하던 호들갑스러운 이론에도 맞지 않는다. 그림이 이론에 구속되는 것보다는 삶에 근거해 있는 것이 옳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 같다. 그는 그림이 아직도 경이롭다고 말한다.

이륙하다_ 228×182cm, oil on linen, 2011
“그림을 오래 그렸는데, 신기한 게 점 하나가 사람도 되고, 나뭇잎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이게 아주 기이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되새김질하듯이 그리고 있다.”

그의 삶이 모두 그림으로 귀속되듯이, 그림은 또한 그의 삶에 기쁘고 슬픈 추억을 만들어준다. 2009년, 12년 동안 쓰던 안성의 작업실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던 것은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행복한 중독을 유발하기도 한다.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빠르게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는 그는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 그려낸다.

“며칠 동안 작업이 이어지면 코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테레핀유 냄새가 지독하다. 밤새워 작업을 하고 그림을 끝내고 나서 새벽에 찬 공기를 맡을 때의 느낌은 너무 좋다. 동틀 때의 그 어스름한 색감과 안개도….”

사진 : 김선아
  • 2012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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