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 김시연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삶의 이야기

김시연
1972년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 조소과 졸업.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대학원 졸업. 2002년부터 대안공간 루프, 뉴욕 사토리갤러리, 도쿄 포일갤러리 등에서 9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소마미술관, 런던 Lounge갤러리, 모스크바 Central House of Artists, 뉴욕 PS122 갤러리, 대구문예예술회관, 국립현대미술관, 뉴욕 Queens Museum of Art 등에서 개최하는 주요 단체전에 참가했다. 2010년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주인공 소녀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 분주하게 일했다. 마치 달리지 않으면 쓰러지고 마는 자전거처럼 말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앞만 보고 달리고서야 소녀는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을,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울 사간동의 갤러리 ‘16번지’에서 있었던 작가 김시연의 전시장에서도 그렇게 지칠 때까지 달리고서야 얻은 치유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투명한 흰색 바탕에 투명한 푸른 물건들이 다소곳이 놓여 있는 화면들은 고통의 흔적을 닦아내고 얻은 차분한 세상의 표정이었다.

크고 작은 단추들, 압정, 몽당연필, 지우개… 그리고 내용물을 쏟아낸 푸른색 캡슐 약. 얼마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남동생의 유품에서 나온 물건들이다. 소소한 물건들에서 생로병사의 슬픔이 애잔하게 묻어난다. 한 사람에게 삶의 마감인 일은 주변 사람에게는 긴 고통의 시작이다. 오랫동안 그는 지우개로 지워나갔다. 푸른색 색연필로 드로잉을 하고 애써 그것을 지워나갔다. 푸른색 그림을 지우니 하얀 지우개가 푸른색 부스러기를 남겼다. 그 흔적들이 전시장 한쪽에 쌓여 있다. 그렇게 애써 지운 지우개 가루를 모아 다시 실을 잣듯이 연결해서 둥근 실타래로 감아냈다. 이 과정이 1년 걸렸다. 처음에는 초등학교 1학년 딸이 공부하다가 틀린 것을 지우는데, 지우개 가루가 수북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러나 동생의 죽음 이후 이 반복되는 노동에의 몰입은 치유의 힘이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미술평론가 김정락은 지금까지의 현대미술이 “세계의 평화나 사회나 정치적 비평의 선상에서의 언변은 탁월하지만, 당장 제 손끝의 작은 상처에 대해서는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며, 상처와 치유의 의미를 내포한 김시연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Thread, 60×51cm, 디지털프린트, 2011
“그동안 미술계는 어려운 담론을 내세우며 그들만의 리그를 펼쳤다. 고등교육을 받은 관람객조차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 양산되었다.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은 그런 담론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는 복잡한 이야기를 버리고 싶었다. 긴 설명 없이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는 담담히 말한다. 그는 슬픔을 겪고 나서 말수가 적어졌다. 직접적인 언술보다 함축적인 언어의 사용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002년 첫 개인전 후 그는 대안공간 루프, 뉴욕 사토리갤러리, 도쿄의 사진전문 갤러리인 포일갤러리 등에서 지금까지 9번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다. 전시의 제목들이 흥미롭다. <우울증에 걸린 집>이란 제목도 있고 <바리케이드Barricade>라는 제목으로는 세 번의 전시를 했었다. 이번 전시 제목은 〈Thread〉다. 실타래라는 뜻이지만 굳이 영어로 표기하는 것은 ‘Threat(위협)’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려는 의도인 듯하다. 숨 죽인 듯한 일상의 평온함을 해치는 것은 일상 자체에 있다는 역설의 표현이다. 일상에 스며든 위협을 감지해내는 섬세한 안테나를 그는 장착하고 있는 듯하다.

Thread, 200×160, 디지털프린트, 2011
지금까지 김시연의 화면을 지배해온 것은 조심스럽게 억제된 달변이었다. 유학・결혼・출산・육아… 우리 모두가 하기에 평범해 보이지만, 개개인에게는 하나하나가 사건인 일련의 경험을 작품 속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 평범하게 사는 것의 어려움이 떠오른다. 뉴스에 등장하는 갖가지 사건 사고가 꼭 남의 일만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삶은 평화로 위장된, 온통 지뢰가 매설된 들판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평범한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조심스러운 발길의 연속이다. 소금으로 만든 집, 아슬아슬하게 서로 기대고 있는 사물을 찍은 흑백사진들은 김시연의 감수성을 세련되게 보여준 작품들이었다.

Barricade, 200×240cm, 디지털프린트, 2008
그가 선택한 공간은 매우 사적인 공간, 집이다. 여기에 소금・비누・책 같은 평범하고 일시적인 재료들을 사용해 작품을 만든다. 수없이 많은 비누를 깎아서 설치하기도 하고, 소금으로 정교하게 문양을 만들어 설치하고 사진 촬영을 한다. 소금・비누 같은 어쩌면 덧없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로 그는 자기 공간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한다. 이 흰색 재료들은 결벽증에 가까운 자기방어적인 심리를 보여준다. 일상의 평온을 위협하는 것들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집은 최소한의 자기방어 수단으로 더 약한 존재들을 배치한다. 전형적인 약자의 전략이다.

Barricade. 68×80cm, 디지털프린트, 2008
창틀에는 달걀, 클립, 머리핀, 빨래집게, 실패 같은 것들이 나란히 보초를 서고 있다. 이 집안에 틈입하기 위해서는 위태롭게 서 있는 이 사소하고 무기력한 것들을 넘어뜨려야만 한다. 김시연이 설치한 이런 바리케이드들이 갖는 힘은 아름다움이다. 소금과 비누 역시 쉽게 무너져버릴 덧없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방어적인 힘을 갖는 이유는 질서를 갖고 있고, 또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히 그 공간에 침범할 수 없다고 느낀다. 약자의 전략이 미학적인 전략으로 승화되며 강한 힘을 갖는 순간이다.

Barricade. 80×80cm, 디지털프린트, 2006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사진이지만, 한 장의 사진이 얻어지기까지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설치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는 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실제 전시를 하지는 못했지만 한 미술관에 설치하기로 한 비누를 2년동안 깎은 적도 있다. 정교하고 섬세하고 연약한 재료들이기 때문에 그만큼 작업도 힘들다. 김시연의 대학 동기로 그를 지켜보아온 김인선 큐레이터는 그가 학교 다닐 때도 거의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업하던 아주 성실한 학생이었다고 기억한다. 성실성의 동인을 묻자 “그때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된 것 또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간단하게 답한다. 그의 말에는 어떤 과장도 없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나는 만드는 것 자체가 즐거운 사람이다. 완벽한 것을 하나 깎았을 때 느끼는 희열 같은 것이 있다. 반복적인 일은 생각을 잠시 멈추게 하고, 내가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김시연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손으로 작업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좋다”고 한다. 성실성과 일 자체에 몰입하는 장인적인 기질이야말로 그를 좋은 작가로 만드는 기본이 된다.

Barricade. 100×167cm, 디지털프린트, 2008
예술을 업으로 삼는 작가들은 일상생활과 작업에의 몰입 사이에서갈등을 느끼게 마련이다. 작업은 몰입을 요구하고, 몰입은 일상생활의 일부를 어느 정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시연은 육아와 작업, 가정생활의 밸런스를 잘 맞추고 있는 것 같다.

“내 작업은 내가 생활하면서 한풀이처럼 내 생활, 내 소소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작업과 삶의 균형을 맞추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동생이 죽을 때까지 나는 내가 행복한 줄 몰랐다. 힘들 때 등을 두들겨줄 수 있는 남편, 사랑스러운 딸이 있는 게 너무 감사하다. 독서, 추측, 간접경험을 통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경험만큼 강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내 작업의 동력은 무엇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사는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2010년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한 그는 2012년 뉴욕의 두산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그가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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