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52) 이경임 〈바람 한 줄기〉

바람의 궁극은 無, 삶도 이 같지 않은가!

바람 속엔 헤아릴 수 없는 냄새와 소리와
얼룩과 소문들이 있다
높은 산맥을 넘은 후 평지에 도달한 바람 속엔
무(無)가 있다

이 바람은 무겁다
이 바람은 무겁지 않다
이 바람의 몸속엔 한 방울의 물기도 없다

없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면
메마른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는다
없는 사랑이 가득 차오르면 바보처럼 자주 웃는다

꽃들은 텅 빈 나무의 엔진이다
겨울이 지나가면 작란(作亂)이 다시 시작된다

바람 속엔 다시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그득하고
이 낮은 지상은 신음 소리들로 가득 채워진다



신화적으로 해석하자면 바람은 우주의 숨과 기운이다. 역동성과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시에서 바람의 용례는 다양하다. 바람은 자아의 성장을 돕는 야성적이고 충동적인 기운이거나 :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다”(서정주 〈자화상〉), 양심을 자극하는 기미이거나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윤동주 〈서시〉), 생의 의지를 타오르게 하는 우주의 리듬이거나 : “바람이 분다! … 살아봐야겠다!”(말라르메 〈해변의 묘지〉), 말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 무엇이다 :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중략)/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마종기 〈바람의 말〉)

이경임의 바람은 형체가 없다. 형체가 없다고는 하나 그 바람 속에는 냄새와 소리, 얼룩과 소문들이 있다. 많은 삶의 복작거림에서 빚어진 그 무엇들. “높은 산맥을 넘은 후 평지에 도달한 바람 속엔/무(無)가 있다”. 바람의 궁극은 무(無)다. 무로 귀착하기 때문에 그것은 삶과 닮아 있다.

이 바람은 무겁다
이 바람은 무겁지 않다

이경임의 시에서 상호 모순되는 이런 문장의 병렬은 인상적이다. 거의 모든 시편에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이 개미들은 나 같다/이 개미들은 나 같지 않다”(〈냄새〉), “이 새는 말랑말랑하다/이 새는 말랑말랑하지 않다”(〈고독〉), “곡예사는 그네를 버린다/곡예사는 그네를 버리지 않는다”(〈곡예사〉), “어둠이 숲을 채우면 이 숲은 무겁다/어둠이 숲을 채우면 이 숲은 무겁지 않다”(〈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이 꽃은 물 위에 떠 있다/이 꽃은 물 위에 떠 있지 않다”(〈비밀〉), “이 잡초는 관습적이다/이 잡초는 관습적이 아니다”(〈길거리에 핀 이름 모를 잡초〉), “이 사람의 외투는 명품이다/이 사람의 외투는 명품이 아니다”(〈꿈의 해석〉), “이 거미는 무겁다/이 거미는 무겁지 않다”(〈죽음에 대한 명상〉), “이 영화의 제목은 종착역이다/이 영화의 제목은 종착역이 아니다”(〈종착역〉)…와 같은, ~이다와 ~아니다의 반복들. 이 반복들은 우리 삶이 세워진 바탕이 상호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임을 말한다. 이 세계인식은 집요하면서도 무심하고, 끝없이 되풀이됨으로써 강박증적임을 암시한다.

“이 바람의 몸속엔 한 방울의 물기도 없다”고 한다. 한 방울의 물도 품지 않은 바람은 그 메마름 때문에 생명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음, 혹은 텅 빔은 현재적 고갈을 드러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의 개시(開始)이기도 하다. “없는 눈물”이 차면 “메마른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는다”. 물은 메마름을 적시고 생명은 회귀한다. “없는 사랑”이 차면 “바보처럼 자주 웃는다”. 사랑은 물과 같다. 메마른 가슴을 적셔 생명의 약동을 가져온다. 웃음은 마음의 경직에 대한 반동이다. 증오와 공포와 역겨움 따위가 마음이 경직하는 원인이 되었을 터다. 그 눌려서 주눅이든 마음이 웃음으로 말미암아 펴진다. 웃음이야말로 증오와 공포와 역겨움을 이겨낸 생명의 가장 큰 약동이 아닌가!

웃는 자는 역경을 넘어선 자다. 그는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바꾼 자, 아울러 스스로 변화한 자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대목. 젊은 양치기의 입속으로 뱀이 기어 들어가 목구멍을 꽉 물었다. 뱀을 잡아당겨도 꼼짝하지 않는다. 양치기는 그 위험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외친다. “대가리를 물어뜯어라! 물어뜯어라!” 양치기는 뱀의 대가리를 단숨에 물어뜯는다. 뱀 대가리를 멀리 뱉어내고는 벌떡 일어난다. 풀도 자라지 않고 나무 한 그루도 없고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황량한 골짜기를 헤매던 양치기는 제 목구멍을 꽉 문 뱀 대가리를 물어뜯은 뒤 다시 일어선다. 그 양치기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양치기가 아니다. 그는 “변화한 자, 빛으로 감싸인 자가 되어 웃고 있었다!” 이경임 시의 화자는 무(無)라는 황량한 골짜기에 있다. 그는 제 목구멍을 꽉 문 뱀 대가리, 그 “더없이 무겁고 검은 온갖 것”(니체)을 뱉어내고자 한다. 자기를 이긴 자는 운명의 전환을 이룬다. 그는 웃음을 되찾고 약동한다.

꽃들은 텅 빈 나무의 엔진이다
겨울이 지나가면 작란(作亂)이 다시 시작된다

“꽃들”이란 “텅 빈 나무”의 생명이 약동한 결과가 아닐까. “꽃들”은 곤경에 빠졌다가 되살아난 양치기의 환한 웃음이 아닐까. 양치기의 얘기는 하나의 우화고 수수께끼다. 양치기의 목구멍을 물어뜯은 뱀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사에 불행을 초래하는 추악한 인간들의 영원 회귀를 상징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에 대한 크나큰 권태, 그것이 나의 목을 조여왔으며 내 목구멍으로 기어 들어왔다.”(니체)고 말한다. 그 추함과 더러움이 역겨움을 낳는다. 그러나 “역겨움, 그것이 바로 날개와 샘처럼 용솟음치는 힘을 창조해낸다!”(니체) 자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짐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사람이다. 병든 자, 고갈된 자도 자기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갖는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만 생명의 의지가 피어나는 것이다. 보라. “바람 속엔 다시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그득하고/이 낮은 지상은 신음 소리들로 가득 채워진다”. 겨울이 지나면 죽은 듯 보였던 나무는 다시 생명의 약동으로 꽃들을 피울 채비를 한다. 즐거운 “작란(作亂)”, 즉 생명의 약동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경임(1963~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와 전남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부드러운 감옥〉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 《부드러운 감옥》이 있고, 올해 펴낸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는 두 번째 시집이다. 이경임의 시집을 읽다가 “잠시 통증은 고요한 향연”(〈하늘〉)이라는 구절에 눈길이 멎는다. 오랫동안 통증에 시달리며 고갈되는 경험을 갖지 않았다면 이런 구절은 나오기 어렵다. “무(無)의 매혹”에 마음이 매여 있는 이경임의 상상력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형상이나 형체에서 무형의 것으로 움직인다. 그것들은 허물어지고, 스미고, 떠돌고, 날아간다. “밀물과 썰물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곳/그곳에서 모든 형상들은 흐물흐물 녹아버린다”(〈네가 없는 곳〉)고 하지 않는가. 결국 형상들은 무의 광활한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보라. “재의 향기는 흙 묻은 날개들의 속삭임을 거느리고/마침내 텅 빈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 간다”(〈꽃씨에 대한 명상〉). 그것은 고작해야 “나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이경임의 시들은 그 “나쁜 꿈”이 흘리고 간 이삭줍기와 같은 것이다.

사진 : 김선아
  • 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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