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 제작한 연상호 감독

국내 최초 스릴러 애니메이션 만들다

어른들은 흔히 중고등학교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한다. 허나 만일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마주할 것은 또 하나의 치열한 전쟁터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리거나 미화한 것일지도 모르는 어두운 모습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쉽게 미화되는 청소년기의 전쟁 같은 단면을 똑바로 쳐다본다.
2011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예매 오픈 44초 만에 매진을 기록하는 등 폭풍 같은 주목을 받은 국내 최초의 장편 스릴러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의 연상호 감독을 만났다.

〈돼지의 왕〉은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 15년 후 만나면서 벌어지는 스릴러극이다. 주인공들이 겪은 중학시절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권력 위계서열에 따른 폭력과 갈등이 만연하다. 괴롭히는 아이들인 ‘개’들과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인 ‘돼지’들, 그리고 폭력으로 ‘개’들에 맞서는 ‘돼지들의 왕.’ 개와 돼지로 대변되는 권력관계의 직설적인 은유는 〈돼지의 왕〉이 어떠한 성향의 작품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시쳇말로 ‘센’ 내용을 시종일관 강한 수위의 잔혹한 묘사로 그려 예고 편마저도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심의가 반려됐다.

국내에서 이렇게 잔혹한 묘사의 스릴러 장편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 적은 없었다. 그동안 국산 애니메이션의 경향은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을 내세우면서 어린이를 관객대상으로 삼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 호평받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 그 대표적인 예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 비교하면 〈돼지의 왕〉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난 작품같다. 하지만 〈돼지의 왕〉은 블로그・트위터・페이스북과 같은 SNS 매체를 통해 성인 관객층에게 폭발적인 기대를 받고 있다.

연상호 감독은 그동안 그만의 어두운 작품세계를 꾸준히 펼쳐왔다. 첫 단편 작업물인 〈지옥〉과 연작인 중편 〈지옥 : 두 개의 삶〉은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과감한 연출과 잔혹한 묘사로 풀어냈으며, 2008년 제작한 중편 〈사랑은 단백질〉은 제목의 산뜻한 느낌과는 달리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돼지의 왕〉이 전혀 낯선 작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스릴러 장르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냐고 묻자 “재밌는 것을 하고 싶은데, 저는 스릴러가 제일 재밌어요”라고 했다.

〈돼지의 왕〉에 나오는 중학생들의 권력관계 이야기는 감독 자신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연상호 감독은 서울 강남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관찰했던 빈부격차와 권력관계 등을 작품의 모티프로 삼았다. 잘사는 아이들이 싸움도 잘하면서 그렇지 않은 아이들과 상종도 안 하던 부조리한 기억이 이야기의 원동력이 됐다. 〈돼지의 왕〉이 다소 충격적인 주제를 다룸에도 리얼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는 처음 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사랑은 단백질〉의 원작자이며 〈습지생태보고서〉로 유명한 만화가이자 대학시절부터 친구인 최규석 작가와 함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자 했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연출에서의 의견 차로 연상호 감독이 단독 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투자를 받기가 어려웠다.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그나마 경향도 잘 맞지 않은 잔혹극 시나리오를 선뜻 지원해주는 투자자는 없었다. 연상호 감독은 생계를 위해 다른 작업을 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돼지의 왕〉을 홀로 작업했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돼지의 왕〉에 들어갈 배경그림 1200장 중 600장가량을 혼자 완성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혼자 끝내자며 단독 작업에 착수하던 차에 KT&G에서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팀을 꾸려 국내 장편 애니메이션으로는 독보적으로 1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제작을 마칠 수 있었다. <돼지의 왕>에 대해 짧은 제작기간과 저예산 작업이 탄탄한 프리 프로덕션(사전 제작준비)의 승리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연상호 감독의 독립정신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근성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연상호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애니메이션 마니아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TV 만화에 빠졌는데, 만화를 보는 것보다 갖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고 한다. 그는 만화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애니메이션 감독의 꿈을 가진 것은 초등학생 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예요. 〈미래소년 코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면서 애니메이션 감독이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다른 작품들도 불법으로 복사해서 봤죠.”

돈을 모아 고속터미널 부근과 압구정동의 불법비디오 복사 가게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구해 보던 그의 유년기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일본문화가 정식으로 개방되기 전이라 일본 애니메이션을 뒷문(?)을 통해 들여올 수밖에 없던 시절, 비디오 가게주인들은 작품을 엄선해 가져왔기 때문에 인터넷이 보급된 현재보다 오히려 양질의 마니아적인 작품을 훨씬 많이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기 위해 미술을 시작했지만,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입시미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명문대 진학에 실패하자 그는 자신이 원래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고 한다. 한 대학의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그는 애니메이션 만들기에 열중했다. 처음엔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단편영화 연출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같은 대학 만화학과 친구였던 최규석 작가 등을 만나면서 그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

“방학 때 만화학과 친구들을 만나러 간 적이 있어요. 한 친구 자취방에 모여서 〈에반게리온〉이라는 비디오를 틀었는데, 친구들이 주제가를 모두 따라 부르는 거예요. 감동받았어요. 이런 데서 공부해야 더 열심히 할 텐데 하면서(웃음).”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열정은 혹한의 임진강 철책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군 시절 철책에서 경계근무를 하면서, 새벽에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도 틈틈이 쪽지에 애니메이션 아이디어를 적어나갔다. 그때 써놓은 시나리오가 두꺼운 수첩으로 몇 권이나 된다. 군대에서 만든 스무 편 남짓한 시나리오 중에서 제일 먼저 빛을 본 것이 바로 〈돼지의 왕〉이다. 현재 〈돼지의 왕〉은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11월 초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전 블라인드 시사회 등을 통해 먼저 관람한 관객들은 하나같이 탄탄한 스토리와 긴장감 넘치는 연출에 호평을 보내고 있다. 연상호 감독은 쉬지 않고 차기작을 제작하고 있다. 단짝 최규석 작가와 함께 군대에 관한 애니메이션 〈창〉을 만들고 있다. 쉽지 않은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유를 물었다.

“여전히 저는 애니메이션 팬이에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지만, 아직도 저는 애니메이션에 미친 ‘오타쿠’죠. 그 어떤 것도 애니메이션보다 좋은 게 없어요.”

사진 : 김선아
  • 2011년 11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