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프리마 발레리나 김주원

강인하고 주도적인 줄리엣 보여드립니다

국립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 김주원. 지난 2월 그는 ‘지젤’이었다. 1막에서 사랑에 달뜬 소녀의 모습을 한 그는, 무대 뒤에서 다른 무용수들이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도 지젤 그 자체였다. 10월에 그는 ‘줄리엣’이 된다. 몬테카를로발레단의 상임 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21세기 감성으로 재탄생시킨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10월 27일부터 30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르는 이 공연은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향이 연주를 맡아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10월 공연을 앞두고 한창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김주원씨를 국립발레단에서 만났다. 인터뷰 다음날 그는 예술의전당 <토크앤콘서트>의 주인공으로 초청돼 피아니스트 손열음 등 음악가들, 국립발레단 이영철, 국립무용단 이정윤과 함께 무대를 꾸밀 예정이었다. 가녀린 몸에 조막만 한 얼굴, 생물학적 나이로는 서른을 훌쩍 넘었지만 그의 모습에서 10대 소녀 줄리엣을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지난 〈지젤〉 공연 때 무대 뒤에 있는 모습을 봤는데,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도 지젤로 있는 것 같았어요.

“어디에서 공연을 하든 공연 전 객석에 앉아봐요. 객석에서 무대 뒤가 어디까지 보이는지를 확인하죠. 사소한 디테일까지 챙기며 정성을 다해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무대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동작뿐만 아니라 동작과 동작을 잇는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합니다.”

이번에 올리는 마이요 안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 원작을 색다르게 해석했다고 하던데요.

“마이요의 ‘줄리엣’은 가녀린, 운명에 끌려 다니는 16세 소녀가 아닙니다. 강인하고, 사랑에서도 주도적인 여성이죠. 오히려 로미오가 우유부단하고 철없고 어린 소년같이 그려집니다. 마이요는 ‘로미오가 lover(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줄리엣은 love(사랑) 그 자체’라고 하면서 작품 이름도 ‘줄리엣과 로미오’로 바꾸려 했다 합니다. 고전발레에 비해 장식적인 동작이 많이없어지면서 현실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시는 것 같을 거예요. 베드신도, 키스신도 나와요.”

지젤과 줄리엣은 어떻게 다른가요?

“저는 발레 작품 중 지젤이 제일 어려워요. 아주 많은 것을 표현해야 하는 역할이어서. 어린 소녀 같았다가, 첫사랑의 달콤함을 아는 여자가 되었다가, 실연의 아픔에 미쳐서 죽음에 이르는. 2막에서는 귀신이잖아요. 공기의 정령처럼 무게감이 없으면서 사랑의 배신을 용서로 승화시켜 더 큰 사랑을 하는. 테크니컬하게 뛰고 도는 게 어려울 것 같지만, 그런 걸 보여주는 게 훨씬 더 쉬워요. 박수 받기도 쉽고. 지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을 놓칠 수 없는, 긴 호흡을 가지고 춤을 춰야 하는 작품입니다. 지젤은 진정한 프리마 발레리나로 인정받는 관문과 같은 작품이지요. 지젤과 줄리엣은 완전히 다른 역할입니다. 저한테서 똑같은 이미지가 계속 나와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새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저를 완전히 비워요.”

이번 작품에서 줄리엣과 줄리엣의 엄마인 마담 캐플릿을 함께 맡았는데요.

“공연 기간 중 세 번은 줄리엣, 나머지 두 번은 마담 캐플릿으로 무대에 서요. 안무가인 마이요가 제가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해주길 원했다 해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 두 가지 역할을 함께 맡은 사람은 마이요의 뮤즈라 불리는 몬테카를로발레단의 베르니스밖에 없어요. 힘들겠지만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마담 캐플릿의 캐릭터를 알고 줄리엣을 추면 훨씬 더 깊이 있는 줄리엣이 나올 것 같고, 줄리엣의 감정을 읽으면서 캐플릿이 되면 더 가슴 아픈 캐플릿이 될 것 같아요. 마담 캐플릿은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예요. 까만 원피스 같은 것을 입고 세련되게 움직이는 아름답고 우아한 캐릭터죠. 이 작품에서는 줄리엣의 아빠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마담 캐플릿이 모성과 부성을 모두 표현해야 합니다. 때론 강하게, 때론 너무나 부드럽게. 마담 캐플릿은 줄리엣의 사촌인 티발트와 묘한 관계여서 사랑을 위해 달려가는 줄리엣을 약간 질투하기도 하죠. 그러지 못했던 자신을 떠올리기도 하고, 줄리엣의 감정에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면서 줄리엣이 죽었을 때는 마음껏 목 놓아 울거나 슬퍼하지도 못합니다. 사랑을 위해 죽은 것이자 집안을 배신한 거니까요. 마이요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싼 안무가예요. 모든 발레 컴퍼니들이 그의 작품을 받고 싶어 하지만, 아무한테나 주지 않습니다. 아시아권에서는 국립발레단이 유일해요. 그와 함께 작품을 한다는 것은 큰 영광이자 기회죠. 생존하는 안무가의 작품을 하면 배우는 게 많아요. 안무가가 직접 오디션에 참여해 역할을 정합니다. 프리마 발레리나라고 쉽게 역할을 받는 게 아니에요. 저희 무척 힘들게 살아요.”

한번 공연이 끝날 때마다 체중이 몇 kg씩 빠진다는 무대를 역할을 바꾸어가며 매일 서야 하는데, 힘들지 않습니까?

“‘힘들어, 힘들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새로운 캐릭터에 녹아들고 빠져나오는 연습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괜찮아요. 무엇보다 집중력이 중요합니다.”

의사로부터 ‘다시는 토슈즈를 신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등 부상도 많았지요? 바로 얼마 전에도 온몸에 알레르기가 생겨 병원에 갔다면서요?

“무용수는 크고 작은 부상에 항상 시달리고, 많이 아파요. 몸을 쓰는 사람에게 부상은 숙명 같은 것이지요. 그걸 이겨내고 치료해내서 무대로 돌아오는 정신력, 그 과정을 통해 깊어지고 강해집니다.”

국립발레단의 또 다른 프리마 발레리나인 김지영씨와 비교해서 말하는 사람이 많지요? 이번에도 번갈아가며 줄리엣이 되는데.

“15년째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이젠 좀 지겨워요.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하나’ 싶죠. 어릴 때는 라이벌로 비교되는 게 서로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죠. 그러나 이제 누가 봐도 각자 자기 색깔이 분명한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지영씨는 제가 표현할 수 없는 뭔가를 가진 예술가이고, 저 역시 그 어떤 발레리나도 표현할 수 없는 예술적 표현을 지녔다고 생각해요. 동시대에 이렇게 좋은 무용수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분들 덕분에 더 열심히 춤을 출 수 있어요. 제 뒤에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발레리나들도 같이 거론되었으면 합니다. 이은원・고혜주・ 박슬기가 지젤을 했고, 호두까기는 워낙 많은 발레리나들이 하고 있습니다. 여러 무용수들이 같이 조명을 받았으면 합니다.”

영화 〈블랙 스완〉을 보면 무대에 서는 발레리나의 공포, 선후배 간의 질투가 그려지던데, 발레리나로서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없나요?

“나 자신의 색깔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는 춤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고민도 하고 울기도 하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의 춤을 볼 때는 감탄밖에 안나옵니다. 저는 객석에서 발레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해요. 100% 관객 입장이 되죠. 저에 대해서는 완벽하고 철저하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 춤을 볼 때는 어떻게 저런 느낌과 표현이 나오는지 감탄해요. 저는 한 작품을 올리기까지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대에서 큰 실수를 했다 해도 최선의, 최대한의 노력으로 저 자신을 담았다면 공연 후 후회하지 않아요. 그렇게 춤을 추고 그게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면,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영화에서의 느낌 같은 것은 없을 것 같아요. 누군가를 질투하고 경쟁하면서 하는 일이었다면 저는 발레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1등과 최고예요. 대신 최선이란 단어를 좋아해요. 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예술가입니다. 아직 원하는 느낌을 완벽히 표현하지 못하고, 원하는 라인을 완벽하게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완벽하다고 느끼는 순간, 무대에서 내려오겠지요. 아직 해보지 못한 작품도, 해보고 싶은 작품도 많아요.”

내면을 몸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동작 하나, 눈빛 하나, 손끝 하나에도 의미를 담기 위해 연습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요. 같은 동작이라도 작품마다 다 달라지지요. 똑같은 작품을 백번 해도 백번 다 달라집니다. 내면을 끌어내고 깊이 있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다른 장르의 예술도 많이 접합니다. 음악회나 뮤지컬, 연극을 많이 보고 전시장도 많이 찾죠. 책도 많이 보고요. 책을 읽으면서 울고, 전시장에서 눈물이 날 것 같거나 말을 걸어오는 그림을 만나기도 합니다.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업하는 것도 새로운 영감을 얻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는 몸의 언어를 가진 사람입니다. 다양한 시도로 더 깊이 있고 많은 언어를 가질 때 관객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최고의 무대였어요’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춤이 더 깊어졌어요.’ ‘지난번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어요’란 말을 좋아하죠.”

얼마전 종영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댄싱 위드 더 스타〉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해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 ‘너무 후하지 않은가’라는 평도 들었지요?

“전문 발레리나를 뽑는 입장이라면 훨씬 더 냉정했겠지만, 춤에 새로 도전하는 분들이셨잖아요? 춤이라곤 모르던 분들이 파트너와 교감하며 춤을 추기까지 과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기에 격려하고 힘을 북돋워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 동작을 만들기 위해 과정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자괴감, 노력이 있었는지 상상이 되거든요. 그러니 한마디라도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하게 되더라고요. 그분들이 새로운 도전을 통해 뭔가 얻으셨으면 했고, 시청자도 춤이라는 몸의 언어를 축제같이 즐기면서 보셨으면 했어요.”

지난해에는 뮤지컬 무대에 데뷔해 신인여우상까지 받았지요?

“뮤지컬 〈컨택트〉는 원래 발레리나가 출연하는 작품이라 제가 해도 되겠다 생각했어요. 참 많은 것을 배운 기회였어요. 드라마적인 것, 섬세한 감정선을 살리는 것을 연극하는 분들에게 많이 배웠죠. 감정을 끌어내는 과정은 똑같은데, 표현 수단이 다른거죠. 다음에는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은 발레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렇지, 러시아나 프랑스・미국에서는 전설적인 무용수들이 영화, 드라마, 심지어 개그 프로그램에도 등장합니다. 다른 장르와 더욱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어요. <토크앤콘서트>도 무용수가 초대받는 건 처음이에요.”

볼쇼이발레학교를 졸업한 후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김주원은 2006년, 세계 발레리나들에게 최고의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ce) 최고 여성무용수상을 받았다. 그 후 세계 유수의 발레단에서 주역으로 와달라는 제의가 잇따랐지만, 그는 국립발레단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 발레가 세계적인 수준이 되기까지 함께 발전하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후배들에게 해줄 역할이 많지 않을까.

“국립발레단 여자 무용수 중 제가 제일 나이가 많아요. 성신여대는 올해부터 강의를 나가고 있고, 그동안 제자를 둔 적이 없습니다. 제자가 있으면 그 사람의 인생까지 책임져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엔 제 춤이 더 중요했어요. 이제 내가 경험하고 쌓아온 것을 후배들에게 나누어줄 시기가 된 것 같아요.”

무대에 오르면 사랑에 빠진 여인이 되는데 당신 삶에서는 사랑, 그리고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도 이제 철없는 소녀가 아니니 사랑이나 결혼에는 희생과 봉사, 책임감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혼도 현명하게 잘해서 부모님이나 언니, 여동생, 오빠처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어요. 어떻게 서로 위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부모님과 형제들이 잘 보여줬거든요. 저도 그런 삶을 살고 싶은데, 환경이나 능력이나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결혼 생각을 못했어요. 제가 무대에서 하는 역할도 사랑에 강한 믿음을 가진 여성이니까요.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드는 남자가 나타나겠지요?”

사진 : 김동욱
  • 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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