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

그리스 고전, 원전의 묘미 그대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병희(72) 단국대 명예교수는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이 남긴 글과 말을 우리말로 번역해왔다. 최근 펴낸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포함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수다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소포클레스의 《소포클레스 비극》 등 지금까지 그는 60종 30권 이상의 그리스 고전을 우리나라 최초로 원전 번역했다. 유례없는 기록이다. 그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리스 고전에는 진실로 인류에게 필요한 지침이 담겨 있다”고 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은 백발 노인이 된 후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이것이 그가 매일 아침 2500년 전에 쓰인 문장들을 우리말로 옮기게 된 사연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잘난 척하기를 즐겼습니다. 또 자랑하는 솜씨도 빼어났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일이 술술 풀리거나, 혹은 허물이 생기면 쉽게 용납하지 않았던 겁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빼어난 전략으로 아테네를 구한 장군 겸 정치가인 테미스토클레스를 10년간 나라 밖으로 추방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참 흥미롭습니다. 그때 페르시아에 아테네를 빼앗겼다면, 서양 문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예요.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 같은 맹장을 아테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해칠 독재자가 될 것이라며 추방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화입니다.”

천병희 교수는 지난 6월 말,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올초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냈다. 장장 800쪽에 가까운 그리스 고전을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두 권이나 내놓은 것이다. 지난해에는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과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을 포함해 총 6권의 그리스 고전을 우리말로 옮겼다. 물론 수년 전 번역한 책을 개정한 작업한 것도 있지만, 일흔이 넘은 나이에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는 2004년 단국대 인문학부 교수를 은퇴한 이후 본격적으로 번역에 매달려왔다.

“어릴 때부터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고향은 경남 고성인데, 마산과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요. 그리스 고전에 빠진 것은 대학생 때부터입니다. 대학 2학년 때 도서관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었는데, 그 책을 다 읽으려고 방학 때 집에도 내려가지 않고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리스어로 된 원서를 봤고요. 홀렸다는 표현이 가장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호메로스에 홀렸던 청년이에요. 허허.”

호메로스에 홀린 청년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인자한 표정의 천 교수는 “평범하고 얌전한 아이였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시원한 식혜를 취재진에게 건네던 천 교수의 부인은 “지금도 조용조용하신 편이다”고 한 번 더 일러주었다. 서울대 독어독문과에 진학했던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더 열심히 공부했다 한다.

“당시 해외유학을 가는 사람은 군 복무를 1년만 하면 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제대 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독문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했고요. 당시 북바덴 주정부가 시행한 희랍어와 라틴어 검정시험에도 합격했을 정도로 그리스 고전 공부에도 매진했습니다.”

천 교수는 5년간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모교인 서울대의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3개월 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시작했다. 그 일에 대해 그는 “독일 사람은 서독이고 동독이고 자유롭게 왕래했다.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잘못인 줄 몰랐다”며 말끝을 흐렸다. 다행히 그는 3년 2개월째 되던 해 특사로 풀려났지만, 10년간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이 시기 동안 그는 그리스 고전을 더 많이 읽었다. 이 시기를 거치며 그는 그리스어를 영어로, 영어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중역본밖에 없던 그리스 고전을 원전에서 우리말로 직접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서울대 독문과 시절부터 그리스 고전에 빠져들어

수십 종의 그리스 고전을 원전 번역해오면서 천 교수는 몇 가지 규칙을 철저히 지켜왔다. 그는 “아무래도 생소한 형식과 내용인 만큼, 독자가 가능한 한 수월하게 읽을 수 있도록 주석을 두 가지 이상 달아두어야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주석을 위한 책은 적게는 세 권에서 많게는 여섯 권도 넘게 보는 편인데, 자신이 번역한 문장만으로 부족할까 싶어 내용만큼이나 주석에도 신경 쓴다고 했다. 영국・미국・독일 학자들이 쓴 책들을 주로 참고한다.

“프랑스어를 못 배운 것이 이렇게 한이 될 줄 몰랐습니다(웃음). 그리스 고전 작품을 프랑스 학자들이 연구한 책도 굉장히 훌륭하거든요.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원전의 내용과 의미는 조금씩 다를 수 있어요. 저는 원전의 내용을 최대한 살리면서 우리나라 독자가 읽기 쉽게 번역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애먹이는 문장이 반드시 있다고 했다. 그럴 때는 우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고, 다시 돌아와 의미를 파악해본다고 한다. 또 “가능하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미 자신과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의 의견을 참고할 때 충실하게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고전에는 헛소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하지요. 사실 요즘 문학 작품이나 영화는 한 번 보면 잊히는 게 많잖아요? 그리스 고전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도 그 가치가 빛나는 것이지요. 번역자의 입장에서 이런 진리를 발견하고, 우리말로 다시 표현하는 즐거움이 상당히 큽니다.”

천 교수는 보통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작업실에서 그리스 고전을 한행 한행 번역한다. 그러면 하루 평균 50~60행 정도 번역할 수 있다. 한 달에 나흘 정도를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이렇게 지낸다고 한다. 자신이 힘겹게 작업한 책을 누군가 읽어줄 때 그는 가장 보람차다고 말한다. “앞으로 번역하고 싶은 작품이 상당히 많다. 할 수 있을 때까지 번역 작업을 할 것이다”는 그에게 이번 《펠로폰네소스 전쟁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사실 이 두꺼운 책을 처음부터 다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음… 페리클레스의 추도사만 읽어도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했다. 다음은 그가 지목한 추도사 중 일부다.

“말하자면 우리는 고상한 것을 사랑하면서도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으며, 지혜를 사랑하면서도 문약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부는 행복을 위한 수단이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가난을 시인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가난을 면하기 위해 실천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진 : 김선아
  • 2011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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