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민병헌

자유롭게 사물을 바라볼 때 사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짙은 안개로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운 날, 안개에 폭 싸인 채 한 걸음 한걸음 내딛다 보면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풍경들. 쨍한 태양빛 아래에서는 여지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던 풍경도 이때는 신비스럽고 은밀한 색채를 띠면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사진작가 민병헌 씨는 이 순간을 포착한다. 그의 풍경 사진은 보는 이를 압도하지 않는다. 그의 피사체가 된 것은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산과 들판, 나무, 잡초들이다. 그것들의 모습은 명료하지 않다. 전체 풍경이 아니라 그중 일부분, 그것도 안개나 눈, 으스름에 싸여 보일 듯 말 듯 존재를 드러내는 것들을 담기 때문이다. 흑백으로 촬영하는 그의 사진은 콘트라스트(흑백대비)가 강하지 않다. 흑도 백도 아닌 회색빛의 미묘한 베리에이션이 화면 전체를 덮고 있다. 거리를 두고 보면 회색 모노톤의 추상화 같은데,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바람에 쓸리는 가는 나뭇가지까지 실핏줄처럼 드러나 있다. 눈발이나 안개에 묻힌 작은 사물까지 하나하나 찾아내는 그의 눈과 손길이 놀랍다.
그가 3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번엔 폭포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가 카메라 렌즈에 담은 폭포는 여느 사진과는 다르다. 폭포의 전체 모습이 아니라 물줄기가 떨어지는 한 부분만을 촬영, 그 폭포가 어느 지역에 있는 어느 폭포인지 장소성이나 개별성을 무화(無化)시켜버린다. 관람자의 눈앞에는 그저 바위 혹은 바다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 피어나는 물보라가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폭포 사진들은 셔터를 길게 늘려 물의 흐름을 과장하거나 셔터를 아주 짧게 끊어서 극적으로 고정시킨 것들이다. 그런데 그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중립적인 셔터 스피드로 촬영, 보는 이가 폭포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운동감을 나타낸다. 사진심리학자 신수진 씨는 “운동감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물줄기에 집중해 한참을 쳐다보고 있으면 물의 흐름과 반대로 내 몸이 끌어올려지는 듯한 착시가 느껴진다”고 한다. 몽실몽실한 물보라가 우리의 촉각을 자극하면서 손끝과 발끝을 간질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나만의 폭포’를 체험하게 하면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Waterfall, 2009
디지털 사진에 밀려 아날로그 사진의 명맥이 끊기려는 요즘, 그는 처음 사진기를 들었던 그 방법 그대로를 고수한다. 흑백필름으로 촬영해 현상과 인화까지 모두 자신의 손으로 한다. 그는 현상, 인화 과정을 촬영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다. 오랫동안 매만진 그의 작품들이 걸려 있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민병헌(56) 씨를 만났다. 웨이브 머리에 청바지와 진 재킷, 그의 모습은 작품과는 많이 달랐다. 고즈넉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인 작품과 달리 그는 팝스타처럼 튀는 차림에 활기가 넘쳤다.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으니 겉모습만 보고는 그가 뭐하는 사람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듯하다.

“저를 처음 본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압니까? ‘외모가 작품과 다르다’는 겁니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한복 입고 가부좌 튼 도인 같은 모습을 상상했나 봐요. 그런데 저랑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작가의 모습이 작품 속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이, 사회적 지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자유로운 모습. 그가 작업에 임하는 태도 역시 그러했다.

Waterfall, 2008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정말 행복해요.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을 내 고집대로 할 수 있으니. 촬영하고 현상하고 인화하는 과정은 누구라도 쉽게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전시장에 걸어놓고 보면 아쉬운 부분이 보여요. ‘아, 이 부분을 놓쳤구나. 눈 밝은 사람은 알아챌 텐데’라는 생각이 들죠. 30여 년을 해왔는데도 그래요. 역설적으로 이렇게 늘 ‘더해야 하는데’ 하는 게 있으니 계속할 수 있는 겁니다. 더 이상 할 게 없고, 재미도 없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진으로 그만큼 인정받은 사람이 사명이나 의무감도 없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런 것 없어요. 하고 싶을 때까지, 할 게 있을 때까지 한다 생각하니 자유로운 거지요. 암실에 있는 제 모습을 보면 정말 우스울 겁니다. 인화되어 나온 사진을 보고 혼자 펄쩍펄쩍 뛰며 흥분하고 감격했다가는 찢어버리고 하니까요.”

지금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작가가 됐지만, 1980년대까지 그를 지배한 것은 열등감과 소외감이었다고 말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가 싫었고, 대학에 입학하고도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 유일하게 마음 붙일 수 있었던 게 사진이었다. 혼자서 사진 공부를 하던 그는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 보성고 다니던 시절 은사였던 사진작가 홍순태 선생을 찾아갔다. 그가 가져간 사진을 본 홍순태 선생은 “자네, 왜 진작 사진을 하지 않았나?”라고 했다.

Waterfall, 2010
“그날 밤 잠을 못 이뤘어요. 그 말씀 때문에 이제까지 사진 하나만 붙들고 살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1980년대 말, 사진에 설치 개념이 도입되는 등 트렌드가 급격히 바뀌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스트레이트 사진은 시대에 뒤진 것으로 치부될 때 ‘내가 가는 길이 맞는가?’ 극심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사진을 정식으로 전공하지 않았다는 열등감도 컸다. 그러다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하겠다’고 마음먹은 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흑백사진으로 작은 풍경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87년. 1984년 동아국제사진살롱에서 은상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컬러로 현대 도시의 조형적인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서울 근교의 땅바닥에 있는 잡초들을 렌즈에 담았는데, 이런 천국이 없는거예요. 머리가 쭈삣 서고, 닭살이 돋았어요. 그전에는 감각적이고 예쁜 것을 좋아해 광고사진이나 패션사진을 하면 잘할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는 하늘이 파랗고 햇빛이 쨍쨍한 날이면 아예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른 새벽, 눈이나 비가 오는 날, 짙은 안개로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때라야 촬영을 나간다. 촬영할 때도, 암실에서 현상 인화 작업을 할 때도 그는 철저히 혼자다.

SL206, BHM, 2010
“내가 왜 자꾸 그런 사진을 찍었는지 인식하지 못했는데 최근 들어 알았어요. 내가 암실을 좋아하는 것과도 통해요. 암실에 숨어 있으면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잖아요?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암실이 내겐 제일 마음 편하고 즐거운 장소예요. 풍경도 마찬가지예요. 안개나 어스름이 나를 감싸서 적당히 주변과 차단해주는 느낌이 좋아요. 코와 귀가 떨어질 것 같은 눈보라 속에 홀로 있을 때 천국 같아요.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풍경을 볼 때, 그건 ‘나만의 풍경’이잖아요. 은밀하게 들여다 보며 그것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기다리죠. 그 풍경이 얼마나 대단한가가 아니라 풍경과 내가 1대 1로 대면한 순간이 중요한 거지요.”

mg004, BHM, 2008
그가 그 순간 느낀 정서적 감응은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거쳐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그걸 보는 사람들에게 감성적 울림을 던진다. 그의 작품을 주목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프랑스·영국 등지에서 전시를 하면서 “서양 작가에게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휴스턴미술관, 프랑스 문화부 컬렉션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올해도 그의 일정은 빽빽하다. 한미사진미술관 전시에 이어 4월 21일부터 5월 20일까지 서울 청담동 카이스갤러리에서 전시, 10월에는 영국 웨일즈 사진미술관 전시, 또 10월부터 석 달간 파리에서 개인전, 11월 파리 포토 아트 페어 참가 등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지난주 한국미술평론가협회로부터 올해의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전화를 받았다”며 기뻐한다. 트렌드를 좇지도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기웃거리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을 원하는 방식대로 하면서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 그의 말대로 그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의 작품이 걸린 전시장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다.

“자유롭게 사물을 바라볼 때 사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눈’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진 : 김동욱
  • 201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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