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박물관・미술관을 찾아서] 진부령 정상에 자리 잡은 ‘진부령미술관’ 전석진 관장

산꼭대기에 무슨 미술관이냐고요?

진부령미술관
주소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흘리 32-28
연락처 : 033-681-7667
진부령미술관
동해의 해안선과 수려하게 펼쳐진 금강산 향로봉의 끝자락을 함께 볼 수 있는 해발 고도 529m의 진부령 정상.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이 있다. 12년 전 문을 연 진부령미술관은 전석진(78) 관장의 모든 것이 담긴 공간이다. 최근 새롭게 단장한 이 미술관은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공간으로 재도약을 꿈꾸는 중이다. 진부령미술관과 함께한 세월만큼 무성해진 백발의 그를 만났다. 세월의 흔적을 피할 순 없었지만 그의 가슴에는 청년의 열정이 가득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진부령 정상의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하고 싶기 때문이다.

강원도 인제에서 진부령으로 진입하려면 용대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야 한다. 그곳에서 진부령이 시작된다. 이 지역 특산품인 황태의 유명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진부령 정상까지의 도로 양옆에는 황태 덕장과 토속 음식점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황태 덕장을 구경하다 자연스레 이곳의 자연경관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규모가 크고 웅장하기로 손꼽히는 강원도의 산세에 넋을 잃고 있다 보면 어느덧 진부령 정상에 도착한다. 진부령 초입에서 정상까지는 차로 10분정도 걸린다.

저 멀리 동해의 해안선이 희미하게 보이고, 북한과 대치하는 지역이라는 것을 일깨우듯 군인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그중 단연코 진부령 정상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베이지색 외벽으로 마감한 건물 한 채다. 세련된 외모의 이 미술관은 지난 1999년 ‘진부령문화스튜디오’로 개관했다 2009년 11월, 경암건축의 설계로 ‘진부령미술관’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대체 왜 이런 산꼭대기에 미술관을 지어놓았을까.

전석진 관장을 찾아간 12월 첫째 주 일요일 오전은 무척 추웠다. 대관령이나 미시령처럼 해발이 높지 않지만, 진부령 정상에 부는 바람은 매서웠다. 미술관 로비에서 취재진을 기다리던 그는 “추우니 어서 들어오라”는 표정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저는 진부령 토박이는 아닙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평양에서 살았고요. 그곳에서 소학교와 중학교까지 다녔습니다. 진부령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85년 즈음일 겁니다. 가족들과 알프스 스키장에 가던 길이었어요. 정말 우연히 진부령 정상에 세워진 작은 건물을 발견했죠.”

맑은 공기가 인상적이었던 진부령에 그는 점점 빠져들었고, 막연히 때 묻지 않은 진부령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다. 그는 진부령 정상에 작은 집과 텃밭을 장만해놓고, 한 달에 두어 번 가족, 친지들과 내려와 지내며 별장처럼 사용했다.

그러던 중 1997년, 진부령 정상에 있던 간성읍 흘리 출장소가 폐쇄됐다. 막연히 ‘이곳에 미술관 하나 지었으면’ 하던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문을 닫은 출장소를 미술관으로 개조하기로 한 것. 그러나 건물 임대의 결정권을 가진 고성군청이 미술관 건립을 반대했다. 산골짜기 미술관에 누가 찾아올 것이냐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쉬이 포기할 일이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미술관 건립에 결정권이 있는 사람은 다 찾아가 설득했습니다. 결국 임대 형식으로 출장소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죠. 우리나라 최고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관객에게 최상의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지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드문드문 사람들이 미술관으로 들어와 “이곳은 무얼 하는 곳입니까?” “입장료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는 “무료관람이니, 들어와서 전시를 보고 가세요”라고 쭈뼛쭈뼛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여름에는 동해로 피서 가는 사람, 겨울에는 스키장에 가거나 일출을 보러 가는 사람, 봄가을에는 등산객들로 사계절 내내 관람객이 찾아옵니다. 저에게 그림 설명을 해달라는 사람도 있고요.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림은 어떻게 봐야한다는 정답이 없으니, 스스로 보고 느끼시라’고. 이러저러한 설명을 듣기보다 그저 그림 앞에 서서 자신의 마음을 그림에 집중하시라고요. 그것이 그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전석진 관장과 미술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3층으로 올라가니 제3전시실이 나온다. 한 그림 앞에 멈춰선 그는 “이 그림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묻는다. “부처의 웃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 같다”는 기자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코・입・귀를 써 넣은 글그림이다”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변형된 한글이 보인다. 글그림 작가인 김반석의 작품으로, 2011년 2월 10일까지 열리는 진부령미술관 개관 12주년 초대전에서 전시 중인 작품이다. 그의 말을 듣고 곁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모두 탄성을 지른다. 그림에 대한 그의 안목은 언제부터 길러졌을까.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마부〉 제작한 한국 영화계의 대부가 만든 미술관

“한국전쟁 직후 혼란스러울 때도 집에 승용차가 두 대 있을 정도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제 선친은 금융업에 종사하셨는데, 바이올린 연주를 즐기시고 화가들과도 친하게 지내실 정도로 문화적 안목이 있으셨지요. 덕분에 저도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영화계에서 일을 시작한다. 1958년, 그가 영화계에서 처음 한 일은 시나리오 대본의 삽화 작업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영화 마케팅, 홍보, 제작까지 영화계에서 활약했다. 그는 〈꼬마 신랑〉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마부〉 등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 40여 편을 제작한 우리나라 영화계의 대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에 수출한 영화입니다. 당시 중국・대만・동남아 등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죠. 배우 문희, 가수 나훈아 등을 발굴하기도 했고요. 운이 좋아 제가 손대는 일마다 잘되는 바람에 더 즐겁게 일했습니다.”

영화제작자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1977년 어느 날 불현듯 미국행을 결심한다. 가족들과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노년이 되자 연어가 회귀하듯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국에서 뜻 깊은 일을 해보자는 결심과 함께. 그리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산꼭대기 미술관’을 열었다.

“작가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세계가 펼쳐지는게 항상 봐도 신기합니다. 전시 기획자는 언제나 열린 눈을 가지고 있어야 작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저의 전시 기획 원칙은 최정상 화가들과 성장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다는 것입니다.”


이번 개관 12주년 기념 초대전도 그렇게 기획됐다. 박석환・김환・김영덕 화백 등 중진급 화가들의 대표 작품부터 김여은 등 젊은 작가의 작품까지 함께 전시했다. 그는 “어느 미술관에 가도 이런 전시 구성은 없을 것”이라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이는 서울대 미대 시절부터 이어진 인맥 덕분이기도 하지만, 진부령 정상에 자신의 작품이 전시되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종종 서울에서 작가들이 놀러 오는데, 그럴 때면 미술관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도 열지요. 여기에서 작업하겠다고 찾아오는 친구들도 더러 있고요. 작업 공간을 내주고, 잠은 저희 집에서 자게 합니다. 이곳이 관람객뿐 아니라 화가들에게도 의미 있게 쓰였으면 하는 게 제 소망입니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전시 중인 세 개의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았다. 곳곳에 전시된 작품을 보면서 그는 하나하나 설명을 해준다. 기자가 감탄하자 “큐레이터가 따로 없으니 내가 큐레이터이자 해설사 역할을 하기도 한다”며 웃는 전석진 관장. 1층으로 내려가면서 그는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 공간은 계속 남았으면 좋겠다”라고 소망을 말한다. 이 미술관이 진부령의 상징으로 남았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사진 : 김선아
사진제공 : 경암건축
  • 201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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