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40) 이덕규 〈머나먼 돌멩이〉

돌멩이의 신산한 삶

흘러가는 뭉게구름이라도 한번 베어보겠다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서
수수억 년 벼르고 벼르던 예각의
날 선 돌멩이 하나가 한순간, 새카만 계곡 아래 흐르는 물속으로 투신하는 걸 보았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 닳은 몽돌까지



〈머나먼 돌멩이〉는 ‘돌멩이’의 신산한 삶을 빼고 더하고 없이 보여준다. “절벽 꼭대기”에서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의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떠받드는 “몽돌”이 되기까지의 신산스런 내역이 주르륵 펼쳐진다. 그 내역을 사설로 풀면 책 한 권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터다. 그렇게 길게 풀자면 그 안에는 기어코 신세 한탄과 자기 연민이 끼어들기 마련이지만, 시는 흐벅진 군살을 허락하지 않는다. 압축과 은유라는 뼈만 남기는 게 시다. 〈머나먼 돌멩이〉는 경성(硬性)의 존재인 돌이 오랜 디아스포라의 체험 끝에 몽돌로 안착하기까지의 떠돎의 이력이자 시련의 시간을 수행의 시간으로 전환해서 담담한 해탈에 이른 수행기다.

누구나 삶에는 곡절이 있는 법이다. 순댓국밥집 마당의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저 몽돌의 닳고 닳음에도 사연이 있다. 시인은 그 사연을 들려준다. 하나의 돌은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여기까지 흘러온다. 변전과 유동은 어쩌면 삶의 본질이다. 우리는 흘러온 삶들이다. 당신이 지금-여기 서 있는 자리를 삶의 최저라고 할 수 있는 바닥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돌이다. 돌은 온몸으로 절벽 꼭대기의 정상에서 바닥까지 굴러오며 떠밀리고 치고 받히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채 떠밀려온 삶을 증언한다. 이 돌에 늘 “적자뿐인 손익계산서”(〈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를 쓰는 시인의 이력을 겹쳐보면, 이 시가 저와 같은 삶의 비루함을 깔고 앉아 있는 장삼이사들의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간발의 차이〉는 〈머나먼 돌멩이〉의 다른 버전이다. 한쪽 다리를 잃고 “정상에서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의 곡절을 풀어놓은 〈간발의 차이〉는 〈머나먼 돌멩이〉와 다르면서도 같은 시다. 절벽 꼭대기에 있던 “날 선 돌멩이”가 까마득한 허공 아래로 떨어진다. 그 순간부터 돌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로 밀려나간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라는 시구는 그 투쟁의 험난함에 대해 말한다. 〈간발의 차이〉에서 이 돌은 공사장을 떠도는 일용 노동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밤낮으로 전국 공사장을 떠돌던 그가 피곤한 발목 하나를 터널 굴착 현장에 빠뜨려 잃어버렸다./사는 게 무슨 쇼트트랙 경기라고, 쓰러질 듯/쓰러질 듯 아슬하게 원심력을 견디며 뺑뺑이 돌다가 작두날 같은 생의 결승선에/그렇게 다급하게 한 발을 쓰윽 밀어 넣었나”는 핏빛 어두운 그 추락의 체험을 증언한다. 이런 투신/추락들은 밖에서 볼 때 대개는 개별자의 부주의라는 형식을 갖지만, 그 실상은 윤리와 정의를 결락한 사회의 공모에 의해 일어난 ‘이지메’ 현상의 결과다. 여기서 ‘이지메’는 가난한 자를 더 지독한 가난에 가두는 사회적 폭력을 말한다. “잘린 신경 끝에 욱신거리는 미열의 불을 켜고 보면/곳곳이 수렁이고 함정이었던 바로 사십 센티 아래가 이제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땅인데/남은 한 발로 그 미지의 땅을 딛고서면 더 이상 내디딜 발이 없는 여기가 극지이다/그러니까 여기는 외발로만 설 수 있는 칼날 정상이다”라는 구절은 ‘이지메’를 당한 자가 내려선 마지막 자리는 삶의 “극지”이자 “칼날 정상”임을 말한다.

돌은 경성의 존재이자 동시에 타자성의 심연을 감춘 존재다. “하찮은 돌에도 다 혼령이 있”(〈우리집 식구 중에는 귀신이 더 많다〉)는 법이다. 그러니 돌을 우리 주변에 흔한 일용 노동자이거나 떠돌이,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존재론적 기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재산이 계속 불어나는 사람과 아무리 일해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 후자에 속한 사람은 삶의 극지이자 칼날 정상에 버티고 서기 위해 마모되어간다. 청년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88만원 세대를 양산해내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나쁜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는 끊임없이 깨지고 부서진다. 나는 “사람이 그 격을 갖출 때에는 동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이지만, 법과 정의에서 배제된다면 가장 나쁜 동물로 떨어지고 만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떠올린다. 법과 정의가 없는 “나쁜 동물”들에 둘러싸인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가! 《밥그릇 경전》에 국한하자면, 이덕규의 시들은 극한의 처지로 내몰린 사회적 약자의 절규를 시적 전언으로 담지만, 그 약자들이 부도덕하고 참혹한 “나쁜 동물”들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 닳은 몽돌”의 발견은 놀랍지만, 한편으로 그 다소곳함이 세상의 모든 악덕과 폭력에 대한 순응으로 비쳐져 아쉽기도 하다.


이덕규(1961~ )는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촌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의 시적 상상력이 농업노동과 그 현장인 논밭에서 잉태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상상력에 “저승법보다 무서운 밥!”(〈한판 밥을 놀다〉)을 제 입으로 들이는 일에 상관된 윤리에 대한 궁리와 능청 떨기가 덧보태 비벼지면 이덕규표 시의 개성이 만들어진다. 사람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밥이 사람을 먹는다. “밥의 주식(主食)은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사람이다”(〈뚝딱, 한그릇의 밥을 죽이다〉)와 같은 통찰은 그의 단단한 체험에 잇대어 있다. 그의 시집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속에서 윤리라는 뼈를 농업노동의 풍부한 실감이라는 살이 감싸고 있는데, 그것은 나날이 쇠퇴하고 저물어가는 농업경제학의 토대 위에서 굳건하다. 초년 시절의 그는 밥을 구하느라 적잖이 고생한 모양이다. 그의 시에 따르면 “생의 반을 외곽도로 공사현장”(〈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에서 보낸 그는 지금 고향에 안착하여 땅을 일구고 시의 영지를 일구는 농사꾼/시인으로 산다. 그의 시에서는 근육의 힘이 느껴지는데, 그 근육은 “삽질 가래질 쟁기질 써래질 호미질 낫질”(〈연애질〉) 따위의 온갖 ‘질’로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이다. 땅에 기대어 사는 사람답게 그의 성정은 우직하고 정직하다. 그 우직함이 통찰력의 바탕이 될 때 “사람이 무너져 봤댔자 겨우 이 미터도 안 된다 제 키만큼만 무너지면 죽음이다”(〈간발의 차이〉)와 같은 놀라운 시구가 나온다. 지금 그는 경기도 화성에서 농사를 짓는 한편, 그와 탯자리가 같은 노작 홍사용문학관의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사진 : 김선아
  • 201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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