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도시 활판공방

금속활자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국내 유일의 활판공방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출판도시 활판공방’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납활자로 인쇄하고, 수작업으로 제본까지 하는 보기 드문 공간이다. 활판인쇄란 글자가 요철(凹凸)로 새겨진 납활자를 종이에 눌러 찍어내는 인쇄 기법으로, 1980년대 옵셋인쇄가 등장하면서 맥이 끊겼다.

활판인쇄를 부활시키기 위해 10여 년 전부터 준비해 2007년 문을 열기까지 박한수(활판공방-시월출판사 대표), 정병규(정디자인 대표), 박건한(시인) 씨 등 세 사람은 전국을 누볐다.

“옵셋인쇄가 대량생산 방식이라면 활판공방에서 만드는 책은 수공예 성격이 강합니다. 공방에서는 첨단기계의 속성상 할 수 없는, 공예가 지니고 있는 양질의 밀도 있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어요. 하이테크보다는 사람의 손길이 들어가는 하이터치를 실현하기 위한 공간이라는 뜻으로 ‘공방’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힘든 과정을 거쳐 활판 공간을 열게 되었습니다.”

2007년 문을 연 활판공방은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2008년부터 김종해·이근배·허영자·정진규·오세영·김남조·신달자 씨 등의 시선집을 활판 인쇄본으로 출간했다. 지금까지 14권의 한정판 활판 시집을 냈는데, 100권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집 한 권 한 권에 시인들의 짧은 글과 사인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 판권 인지 옆에는 시집의 에디션 번호까지 붙어 있다. 전주의령 한지에 활판으로 찍어낸 시집은 특유의 손맛이 느껴지고, 한지 특성상 500~1000년의 시간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명품 시집인 셈이다. 납활자 하나하나를 골라(文選), 판을 짜고(組版), 종이를 눌러 글을 찍어낸 후 종이를 접고(摺紙) 풀칠을 해 완성하는 과정으로, 100% 수공예 공정을 거친다. 한지 두 겹을 겹치기 때문에 글자는 비치지 않는다.


근대적인 인쇄 방식이 도입된 것은 1883년(고종 20년). 인쇄 기계와 납활자를 수입하고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한 것이 시초다. 이후 100년 동안 한국의 출판 역사를 써온 활판인쇄가 옵셋에 밀려 사라졌다가 되살아난 것이다. 유럽의 경우 귀중한 문학적 자료가 될 만한 책은 활판인쇄로 보존한다. 대학에서도 활판인쇄를 가르치고 있고, 활판인쇄박물관이 있어 일반인에게 활판인쇄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문학책·철학책 중 오래 보관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활판인쇄로 내고 있는데, 권당 수백만 달러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흩어진 활판 인쇄기기 모으는 데만 10여 년 걸려

우리나라는 그러나 옵셋인쇄에 자리를 내주자 그동안 활판인쇄를 하던 때 쓰던 기계를 모두 고철로 넘겨버렸다. 전국 각지에서 수소문해 우리나라에 얼마 남지 않은 활판인쇄용 주조기, 식자기 등을 찾아내는 데만 1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찾아낸 국산 수동 주조기는 지난 6월 에 나가기도 했다. 그때 받은 감정가가 3500만 원. 1960~70년대 활약했던 인쇄 장인들도 한데 모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은 우리나라가 고려시대 때인 1377년 제작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다. 금속활자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되찾기 위한 소박하지만 다부진 꿈이 이들에게는 있다.

“올해 나이로 84세 된 김상수 영감님을 만나뵐 수 있었는데, 이분은 우리나라 인쇄사에 나오는 평화당인쇄소에서 식자를 하던 분이었어요. 그분과 함께 일하던 후배, 동료가 한 횟집에서 모였죠. 저희가 하려는 일을 말하니 다들 반신반의했어요. 힘든 일을 왜 하려고 하는지 의아해했지요. 그분들이 요즘은 딸과 손녀를 데리고 와서 ‘옛날에 내가 이런 일을 했단다’라고 설명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보람을 느꼈어요.”

활판공방 주간인 박건한(68) 씨는 “박한수 대표가 인쇄기 산다고 집안의 과수원, 논밭을 팔았어요. 활판인쇄가 사라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을 때, 젊은 친구가 이런 준비를 하고 있었더라고요.”

박한수 대표는 북 디자이너 출신. 정병규 씨와 박건한 씨로부터 활판인쇄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그는 이를 되살리기 위해 일을 벌였다.


“가족들이 반대할까 봐 상의도 안 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했는데, 사실을 알고 난 뒤 다들 공감해주었지요.”

전국을 수소문해서 어렵게 찾아낸 활판 기계를 서울로 옮겨왔지만, 이를 보관할 장소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당 한쪽에 창고를 지어 보관했는데, 아이가 뛰어놀 공간이 없어져서 아내가 섭섭해(?)했다고 한다.

“노인이 된 장인들의 연세를 볼 때 앞으로 3~5년은 더 일하실 것 같아요. 그 시간 안에 기술을 전수받는 게 큰 과제예요. 기계가 고장났을 때 바로 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을 전수받으려면 최소한 3년은 배워야 한다고 해요. 이런 전수자를 양성하기 위해 먼저 장인들을 근대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하는데, 그 준비 작업을 하고 있어요.”

활판공방 멤버의 꿈 중 하나는 특수 한지를 직접 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

“수입 종이에 수입 잉크로 인쇄하면 고급 책이 되는 줄 아는데, 그걸 벗어나는 게 꿈이에요. 우리 종이에 우리 천으로 좋은 품질의 책을 만들고 싶어요.”

그를 인터뷰하는 사이 마침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출판 관계자들이 답사차 찾아왔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일반인까지 활판인쇄 과정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오는 등 활판인쇄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단다. 이들은 “옵셋인쇄가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이라면, 활판인쇄는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사진 : 김선아
  • 201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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