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37) 마종기 〈연가 9〉

청춘을 전송하다

1
전송하면서
살고 있네.

죽은 친구는 조용히 찾아와
봄날의 물속에서
귓속말로 속살거리지,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

그럴까, 봄날도 벌써 어둡고
그 친구들 허전한 웃음 끝을
몰래 배우네.

2
의학교에 다니던 5월에, 시체들 즐비한 해부학 교실에서 밤샘을 한 어두운 새벽녘에, 나는 순진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네.
희미한 전구와 시체들 속살거리는 속에서, 우리는 인육(人肉) 묻은 가운을 입은 채.

그 일 년이 가시기 전에 시체는 부스러지고 사랑도 헤어져 나는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으면서 실내의 방황, 실내의 정적을 익히면서 걸었네. 홍차를 마시고 싶다던 앳된 환자는 다음날엔 잘 녹은 소리가 되고 나는 멀리 서서도 생각할 것이 있었네.

3
친구가 있으면
물어보았네.

무심히 걸어가는 뒷모습
하루 종일 시달린 저녁의 뜻을.

우연히 잠 깨인 밤에는
내가 소유한 빈 목록표를,
적적한 밤이 부르는 소리를,
우리의 속심은
깊이 물속에 가라앉고
기대하던 그 만남을
물어보았네.



〈연가 9〉는 따뜻하고 쓸쓸한 시다.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철이 나버린 자의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의 화자는 대뜸 “전송하면서 / 살고 있네”라고 말한다. 먼저 죽은 친구를, 군대 가는 친구를, 이민 가는 친구를 전송하며 우리는 사는 것이다. 우리는 청춘을 전송하며 젊음과도 결별하는데, 그 순간 청춘의 이름으로 얻던 모든 면책특권을 잃는다. 우리는 기성세대에 편입되고 온갖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만 한다.

“의학교에 다니던 5월에, 시체들 즐비한 해부학 교실에서 밤샘을 한 어두운 새벽녘에, 나는 순진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네. 희미한 전구와 시체들 속살거리는 속에서, 우리는 인육(人肉) 묻은 가운을 입은 채.”

새벽녘의 해부학 교실에서 순진한 고백으로 시작된 이 첫사랑은 그다지 내구성이 강하지 않다. 연약한 이 첫사랑은 깨지고 이내 과거로 화석화되고 만다. 몇 번의 연애, 몇 번의 헤어짐만으로 벌써 어른이 되어버린 자의 의젓함이라니!

“그 일 년이 가시기 전에 시체는 부스러지고 사랑도 헤어져 나는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으면서 실내의 방황, 실내의 정적을 익히면서 걸었네. 홍차를 마시고 싶다던 앳 된 환자는 다음날엔 잘 녹은 소리가 되고 나는 멀리 서서도 생각할 것이 있었네.”

첫사랑의 유효기간은 1년 안팎이다. 1년이 가기 전에 첫사랑은 깨지고, 돌보던 앳된 환자는 덧없이 죽고,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으면서 방황을 한다.

스무 살 무렵 니체는 우연히 라이프치히의 한 서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산다. 니체는 날마다 네 시간씩 이 책을 탐독해서 엿새 만에 다 읽는다. 그리고 누이에게 이렇게 쓴다.

“우리는 무얼 찾고 있는 거지? 일상의 안위, 아니면 행복? 그게 아니야, 어쩌면 너무나 소름끼치도록 그릇된 진실 외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

스무 살 무렵 내가 찾고 있던 것은 무얼까? 기꺼이 삶의 외피를 감싸는 기만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 진짜 의사가 되려면 철저하게 아파봐야 한다는 것. 고통에의 투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 무렵 내가 금과옥조로 품고 있던 것, “삶은 아름답다, 그것 말고 구원은 어디에도 없다.”(알베르 카뮈) 다시 마종기의 시로 돌아가자.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른 봄날, 너무 일찍 체념하고 너무 일찍 달관해버린 이 청춘은 조금은 위악적이고 냉소적이다. “여자에게서 취할 것은 / 약간의 미모와 / 약간의 애교와 / 여자에게서 취할 것은 / 약간의 요리와 / 봄날의 이불”(〈연가 10〉)이라는 시구는 그 냉소를 슬쩍 드러낸다. 하지만 냉소 아래에는 여전히 여자를 경외하는 마음과 여자와 함께 사는 달콤한 미래에의 갈망이 들어 있다. “현관이 있는 집을 가지면 소리 은은한 초인종을 달고, 쓸쓸한 친구를 맞으려고 했었지. 파란 항공 엽서로는 편지를 쓰면서 겨울을 사랑하고, 테 없는 안경을 끼고 수염을 조금만 키운 뒤,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헤세의 아우구스투스를 읽으려고 했었지. 이제 당신은 알고 말았군. 길어야 6개월의 대화만이 남은 것, 6개월의 사랑, 6개월의 세상, 6개월의 저녁을, 그리고 나에게 남은 6개월의 상심을, 6개월의 눈물을 알고 말았군.” (〈연가 10〉) 현관이 있는 집, 멀리 있는 친구에게 파란 항공 엽서에 편지를 쓰는 것, 테없는 안경을 끼고 수염을 조금 기르는 것, 헤세의 아우구스투를 읽는 것…. 이 조촐한 행복이 시의 화자가 꿈꾸는 미래다. 그러나 각박한 현실은 그 소박한 꿈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안다.

봄날은 빨리 저물고, 친구들의 웃음 끝은 어쩐지 허전하다. 벌써 살아가는 일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배우며 씁쓸한 달관에 이른 것이다. 그 친구들에게 “무심히 걸어가는 뒷모습 / 하루 종일 시달린 저녁의 뜻을” 물어본다 해도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는 없다. 청춘이 지나간 뒤 이룬 것은 없고, 이뤄야 할 것은 많은데 삶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우연과 모호함 속에 숨어 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밤이 많아지는 것도 이 무렵이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미치지 않았고, 자고 일어난 뒤 갑자기 유명해지지도 않았다. 나는 술과 담배를 못하고, 일찍이 포커도 배우지 못했다. 내게는 죽은 친구가 찾아오지도 않고, 그랬으니 죽은 친구가 귓속말로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고 속삭이지도 않았다. 나는 비루하고, 내 삶은 바람의 기운을 받아 솟구치는 파도의 기세와도 멀었다. 연애도 못한 채 늘 시립도서관 주변을 맴돌며 우울하게 통과하던 그 비루한 스무 살 시절, 〈연가 9〉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시편 중의 하나였다. 나는 이 시를 줄줄 외웠다. 이 시를 외우며 크나큰 위안을 얻곤 했다. 청춘에서 아득히 멀리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는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점점 짧아지는 삭막한 중년의 나이에도 한밤중에 잠이 깨면 “적적한 밤이 부르는 소리”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가끔 한밤중 조용히 귀 기울이면 나를 떠나간 사람들,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를 그들이 나를 애타게 부르는 듯하다. 아니 그들이 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애타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마종기(1939~ )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유명한 동화작가인 마해송이고, 어머니는 무용가인 박외선이다. 서울 명륜동에서 오래 살았다. 스물한 살 때인 1960년에 첫 시집 《조용한 개선》을 펴냈다. 같은 동네 골목에 살던 아버지 친구인 화가 장욱진이 속 그림을 그리고, 서문은 연세대학교 은사인 시인 박두진이 썼다. 이 풋풋한 첫 시집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썼던 습작 시 몇 편도 함께 들어 있다. 나는 헌책을 파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조용한 개선》을 샀다. 시집 판권란을 펼쳐 발행 일자를 보니 단기 4293년 9월 15일로 되어 있다. 시인이 명륜동을 떠난 뒤 나는 우연히도 그 동네에서 살게 되었는데, 시인을 흠모하던 나는 그 라일락꽃 향기가 어지럽던 봄날 명륜동 골목들을 산책하며 어딘가에 남아 있을 그의 자취를 혼자 짚어보곤 했다. 그 명륜동의 지번들이 새겨진 문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옛 골목들을 순례하는 것은 나만의 고요한 도락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은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던 행복한 시대”(게오르크 루카치)였다. 마종기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재학 중이던 1959년에 〈현대문학〉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인은 연세대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의대의 교수를 지냈다. 얼마 전 문학과지성사 사무실에 우연히 들렀다가 뜻밖에도 마종기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어느덧 70대 초반에 이른 시인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건강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2010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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