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소녀와 70세 시인의 사랑을 그린 소설 《은교》 낸 박범신

나는 항상 혼자 뜨거워요 - 내 뜨거움 때문에 타인을 불에 데게 할 순 없으니까…

박범신이 17년 만에 연애소설을 썼다. 17세 소녀 한은교와 70세 시인 이적요의 사랑을 그린 《은교》. “내 인생의 반절은 오욕칠정을 핸들링하는 고통의 시간이었다”고 털어놓는 60대 중반의 박범신만이 쓸 수 있는 고급스런 연애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폭풍우처럼 써내려갔다”며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소설은 작가의 집필 속도를 따라 단숨에 읽히지만, 읽고 나면 가슴이 묵직하다. 《은교》는 심오하고 뜨거운 연애소설이다. 몸은 늙었으되 마음은 늙지 않은 노시인의 시선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남기고, 노시인의 소녀에 대한 갈망은 존재의 이유 자체를 뒤흔들 만큼 강렬하다. 발화하지 않는 욕망이 자기 증식을 하면서 점점 더 뜨거워지는 듯하다.
작가 박범신을 명지대 교수실에서 만났다. 작가의 얼굴은 불콰했다. 점심 때 위스키를 두 잔 마셨다고 한다. 60대 중반의 그는 ‘청년 작가’라는 타이틀이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눈빛은 명징하고, 남성다운 에너지가 넘쳤다. 소설 속 이적요가 오버랩됐다. 그의 부인은 《은교》를 읽다가 “이적요, 꼭 당신이네?”라고 했다 한다. 작가는 먼저 “이 책은 꼭 밤에 읽을 것”을 당부했다.

“우리는 본능을 너무 억압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문명이라는 게 자연스럽지 않잖아요. 인간은 곧 자연이기도 한데. 하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낮에는 사회적 자아로 살고, 밤중에 홀로 있을 때 읽었으면 좋겠어요. 억압돼 있는 본능 있잖아요? 창자 벽에 붙어 신음하고 있는 본능들. 그런 본능을 만날 수 있는 소설이 됐으면 좋겠어요.”

작가는 이 소설을 작가의 블로그에 연재했다. 출판사 측에서 출판사 홈페이지 연재를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나를 가장 행복하고 자유롭게 하는 글쓰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만큼만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서운 속도로 써내려갔다. 연재한 지 한 달 보름, 43회로 연재를 끝냈다. 그야말로 질주하듯 써내려간 것. “17년 동안 연애소설을 어떻게 참았느냐?”는 질문에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17년 동안 이런 감수성을 억압하면서 살았어요. 첫 문장(‘나는 2009년 봄에 죽었다’)을 쓰니까 억눌려 있던 문장들이 빅뱅처럼 터져 나왔어요. 마지막 문장까지 폭풍같이 썼어요. 쓰는 동안에는 힘이 솟고 몸이 더 좋아지는 것 같았어요. 글을 쓰는 것은 무당과 같아요. 무당은 작두를 타는 동안에는 자기가 아픈 줄 모르거든. 쓰고 나서 대미지가 오는 걸 보면 쓰는 동안 과하게 에너지를 쓴 거지.”

연재 후 그는 설사병을 얻었다 했다. 《은교》는 추앙받는 유명 시인 이적요가 죽으면서 남긴 일기장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변호사에게 “1년 후 공개하라”는 유언과 함께 남긴 일기장에는 공개되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사건들이 숨어있다. 17세 은교에 대한 애타는 갈망,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서지우의 소설을 이적요가 써줬다는 사실, 은교를 둘러싼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감과 결국 이적요가 아들 같은 서지우를 죽이기로 결심하는 과정…. 이 사건들이 화자가 전환되면서 추리소설처럼 속도감있게 읽힌다. 작가는 전작 《고산자》 《촐라체》와 더불어 《은교》를 ‘갈망 3부작’으로 부른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인간의 갈망을 다룬 ‘갈망 3부작’

“지난 10여 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낱말은 ‘갈망’이었다.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은교》를 ‘갈망 3부작’으로 부른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情恨)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작가의 창작욕은 ‘사회적 자아’와 ‘예술적 자아’가 위태롭게 충돌할 때 솟구친다. 그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사회적 자아’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가장이다. 늦둥이 외아들로 태어나 “우리집 대들보, 사내자식이 울면 안 되지, 남자는 그릇이 커야 돼”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스스로 ‘가부장제의 시종’이라고 칭한다. 고민에 싸여 대문 앞에서 30분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도 초인종을 누르고는 “아빠다~”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들어가고, 남편이 없으면 형광등 하나 갈아 끼우지 못하는 화초 같은 아내와 함께 3남매를 번듯하게 길러내면서 늘 집안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왔다(그의 아들 박병수 씨는 아버지 소설 《촐라체》를 연극으로 제작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러면서 한편 그는 어쩔 수 없는 예술가다. 에로스와 파토스적 욕망이 수시로 꿈틀대고 감성이 걷잡을 수 없이 예민해져 괴롭다. 예민한 사람은 불안하다. 창조적 자아는 그 순간에 극단적으로 발현된다.

“밖으로 보면 불행한 조건이 거의 없을 만큼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어요. 감사하죠. 하지만 돌이켜보면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외롭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작가는 불안정한 상태에 자기를 놓아둬야 해요. 똬리를 틀고 있는 본능을 만난 후에는 아슬아슬해요. 사회적 자아로서 지켜야 할 덕목이 있잖아요. 나라를 지켜야 하고, 가족도 지켜야 하고, 직업적 책임도 있고. 하지만 안락해지면 창조적 자아는 다 죽어버려요. 내 안에서는 추락과 상승이 매순간 교차하지요.”

작가는 이 소설을 ‘계몽주의에 대한 역습’이라고 할 만한 문제적 소설로 쓰고 싶었다 한다. 처음에는 이적요의 나이를 77세로 하고, 은교와 끊임없이 섹스를 하는 소설로 구성돼 있었다고. 그는 “그래, 한번 파탄 나보자, 기소될 지도 모르는 소설을 써보자”고 작정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며 “이게 내 한계예요. 선생을 오래해서…”라며 술병을 찾았다.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요. ‘작가 아버지 때문에 아이들과 아내가 상처받아야 할 정도로 내 문학이 그렇게 위대한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문학이 실존보다 위대할 수는 없잖아요. 존재 자체가 불쌍하잖아요. 그걸 끌어안고 사느라 그간 너무 고생했어요.”

17년 전 신문 연재소설을 쓰다가 돌연 절필 선언을 하고 산으로 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중은 환영했지만 평단으로부터는 비난받는 소설을 쓰면서 그는 “내 소설로 아이들 밥 먹이는 게 욕스럽구나”라고 느꼈다 한다. 그리고 《흰 소가 끄는 수레》부터 인문학적인 아우라를 입힌 소설을 써왔다.

은교는 100% 허구의 인물이다. 17세라는 나이는 작가가 생각하는 가장 순결한 나이. 작가는 “내가 17세 때, 내가 사랑했던 여고 2학년생을 그렸다”고 한다. 은교는 하나의 판타지다. 가녀린 팔목과 맑은 미소를 가졌으면서 세상의 이치를 두루 꿰고 있고, 어느 때는 어머니처럼 따뜻한, 이상화된 대상이다. 38세의 무능한 소설가 서지우보다 70세 이적요에게서 더 빛나는 남성다운 매력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소녀이자, 자신에 대한 이적요의 육욕까지도 이해하는 이상화된 여인이다. 그가 자신을 “노인네”라고 칭하는 것은 자기 통제 수단이다.

“나도 이적요와 같은 욕망을 수시로 느껴요.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스스로를 각성시키기 위해 습관적으로 나를 ‘노인네’라고 부릅니다. 나에게 속삭이는 겁니다. 애달프긴 하지만 스스로 ‘늙은이’라고 함으로써 나와 그 아이들 사이에 거리를 두는 거죠. 사랑은 때로 횡포해지거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망가뜨리거든. 이 나이에 그렇게 살 순 없어요. 내가 뜨겁다고 그렇게 할 권리까지는 없어요. 나는 그냥 혼자 뜨거우면 되는 거지. 나는 항상 혼자 뜨거워요. 내 뜨거움 때문에 타인을 불에 데게 하면 안 된다는 자의식이 있어요. 그래서 늘 힘들지. 힘들어 죽겠어요.”

작가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남은 생애의 가장 강한 갈망이 무엇이냐고.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학을 퇴직하면 순례자가 되고 싶어요. 더 큰 갈망은 거기 있어요. 은교에 있겠어요? 난 이적요처럼 은교 때문에 망가지지는 않을 겁니다. 어리석게 살고 싶지 않아요. 더 강력하게 나를 제어할겁니다. 멋있게 늙고 싶어요. 나의 욕망을 공깃돌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순간까지 살아보고 싶어요.”

사진 : 이규열
  • 2010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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