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개봉한 영화감독 이준익

난 영화를 만든다, 물구덩이를 밟고 가는 어린아이의 순진함으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개봉을 앞두고 이준익 감독(51)을 만나기 위해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로 들어섰을 때, 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이폰이냐?”고 물었더니 여느 때처럼 사람 좋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트위터 하느냐?”고 반문한다.

“신기하지, 이걸로 오바마와도 직접 연결이 된단 말이지. 며칠 됐는데, 요샌 이걸로 정보를 다 얻어. 이게 바로 수평적 사고, 수평적 소통 아니겠어?”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 깔려 있는 것은 수평적 사회에 대한 강력한 지향이다. 평등하게 나누고 누리고 소통하는 세상에 대한 염원이다. 하지만 현실은 희망을 배반한다. 그래서 이준익은 영화 속 등장인물을 통해 염려하고 분노하고 서러워한다. 그래도 견딜 수 없으니 웃는다. 짐짓 딴 체하며 눙치고 농을 섞으며 비틀고 조롱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마주하고 그리는 세상이 비극이라면 풍자와 해학, 익살은 절망적 세상을 버티는 한 예술가의 방법론이다. 이준익 감독의 일곱 번째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의 전작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색채가 진하지만, 한편으로 점점 농익고 있는 풍자와 해학, 익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2010년에 오십을 넘긴 감독이 세상에 대해 본능적으로 체감해온 것들에 대한 발언이지. 〈왕의 남자〉는 나에게 해체돼야 할 숙제였어요. 더군다나 이번 작품은 〈왕의 남자〉와 비슷한 시기인 500년 전이고 같은 공간(궁궐)에서 세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이니 동어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어? 그 대척점으로 나갔더니 거짓된 희망이 없어진 겁니다.”

이준익 감독의 말은 자신이 구현한 영화의 리듬을 닮아 있다. 그의 영화는 마당놀이를 닮았다. 반말과 존대어를 섞어 쓰는 그의 말은 진양조에서 자진모리, 휘모리까지 자유자재로 뛰어논다. 그 속에 슬픔도 분노도 웃음도 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 앞에 물구덩이를 만나면 계산하면서 돌아가지 않고 꼭 밟고 가지. 거기로 들어가서 진창을 튀겨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거지. 나는 그것이 인간의 천진성이라고 봐요. 내가 죽기 전까지 지켜야 할 것이고. 돌이켜 보면 〈왕의 남자〉는 내가 들어가서 경험해본 물구덩이인 셈이에요.”


세상의 끝까지 달려간 세 남자의 이야기

한번 빠졌다 나와보니 바뀐 게 있었다. 〈왕의 남자〉가 낙관이라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비관이요, 〈왕의 남자〉가 장조라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단조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세상의 끝까지 달려간 세 남자의 이야기다. 조선시대 당쟁이 어지러웠던 임진왜란 직전,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개혁의 선봉에 섰던 소장 정치인과 학자 중 정여립이 누명을 쓰고 불의의 죽음을 맞는다. 죽은 이와 뜻을 모았던 이씨 왕조의 서얼 출신 이몽학(차승원 분)과 맹인 검객 황정학(황정민 분)은 대동계 해체 후 다른 길을 간다. 이몽학은 세상 최고의 자리를 향해 야심을 불태우며 칼에 피를 묻히고, 황정학은 그를 막으려 한다. 당쟁의 희생양이 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나선 또 하나의 젊은 서자 ‘견자’(백성현 분)는 이몽학을 향해 칼을 겨누고 황정학의 수하로 들어간다. 셋은 왜의 란을 피해 왕이 버린 궁궐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해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필생의 칼을 빼든다.

“작금의 어지러운 세태가 내 영화를 비극과 절망으로 몰아갔다고 해야지. 좌우를 인정하지 않고 달려가면 결국 파국을 맞게 돼요. 불신과 불소통의 끝은 결국 절망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진짜 희망은 절망의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이 영화는 조선시대의 세 남자를 빌려 우리 시대의 ‘세대’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몽학과 황정학은 세상을 바꾸고자 광장에서 뛰어다녔던 386세대죠. 그들은 아버지를 부정했어요. 사실 386세대의 아버지들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며 가진 것 없이 맨바닥에서 일어난 세대 아닙니까. 한국전쟁 세대는 후세들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했죠. 반면 386세대는 자신의 자식 세대를 무슨무슨 약정에 묶어놨어요. 지금 젊은 10대, 20대들은 ‘88만 원 세대’가 아니라 아버지의 ‘약정’에 묶인 약정 세대인 겁니다.”


‘구름’이 가변적인 욕망의 세계라면 ‘달’은 진리를 표상한다. 하지만 영화 속 세 남자 중 가장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견자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달을 베자고 날아오른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가 줄 위에서 날아오르는 라스트 신이 희망을 품고 있다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엔딩은 진리의 표상마저 거부하는 철저한 절망을 담는다.

“누군가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라고 했다죠? 앞선 386세대가 거짓이라도 ‘진리’를 찾고자 했다면, 지금 10대, 20대들은 그 진리조차 거부해요. 예술가가 져야 하는 세상에 대한 소임은 거짓된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직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준익은 시대에 절망하지만, 사람에 ‘연민’한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를 거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이르기까지 그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시대와 소통한다. 그 소통은 늘 ‘비극’의 구조를 띠고 있었다. 반면, 오늘이거나 오늘과 가까운 과거를 다뤘던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 〈님은 먼 곳에〉에서 주인공들은 위로받고 치유받는다. 행복의 가능성을 찾는다. 늘 결핍된 남자들을 주인공 삼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준익 감독은 “내가 위로받고 싶어서”라고 했거니와 “힘들고 고단한 시대,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준익 감독의 시작은 우연에 더 가깝다. 이 감독은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영화잡지의 미술기자로 일하다 지난 1986년 서울극장 선전부장으로 영화계에 첫발을 들였다. 〈구니스〉에 자극받아 어린이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나섰다가 엉겁결에 연출까지 하게 된 〈키드캅〉은 1993년 당시 쫄딱 망했다. 그동안은 다시 영화를 연출할 생각도 없었고 주위에서도 말렸다. 대신 외화 수입과 한국영화 제작에만 열중했다.

10년 후에야 연출을 맡은 두 번째 영화 〈황산벌〉은 접촉했던 모든 감독이 연출을 거부해 벼랑 끝까지 몰려 메가폰을 잡은 작품. 여전히 “난 감독 재능이 없는 줄 알았다”고 했지만 〈왕의 남자〉로 그동안의 빚을 청산하며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 됐다. 그에겐 시대를 통찰하는 날선 눈과 ‘여기 없는 것’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의 꿈, 삶과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다. 여기에 더해 그에겐 마당놀이를 휘젓는 광대의 피가 흐른다. 이준익 감독은 서양의 웃음이 ‘유머와 위트, 개그’라면 우리의 그것은 ‘풍자와 해학, 익살’이라고 했다.

여전히 새 작품을 촬영 중인 현역 최고령(102)의 포르투갈 영화감독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를 언급하며 “100살까지 영화를 찍고 싶다”는 이준익 감독에게 한국영화가 기대를 거는 이유다.

사진 : 진구
  • 2010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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