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31) 이병률 〈뒷모습〉

떠나는 자의 초연한 뒷모습

왜 추운 데 서서 돌아가지 않는가
돌아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끝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쌀로 쌀에서 고요로 사랑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어둡고 구덩이가 많아
그 차가운 존재들을 뛰어넘고 넘어서만 돌아가려 하는 것인가
추워지려는 것이다

지난봄 자고 일어난 자리에 가득 진 목련꽃잎들을 생각한 생각들이
눈길에 찍힌 작은 목숨들의 발자국이
발자국에서 빗방울로 빗방울에서 우주의 침묵으로
한통속으로 엉겨들어, 조그맣게 얼룩이라도 되어
이 천지간의 물결들을 최선들을 비벼대서
숨결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것이다

아, 돌아온다는 당신과 떠난 당신은 같은 온도인가
그사이 온통 가득한 허공을 밟고 뒤편의 뒷맛을 밟더라도
하나를 두고 하나를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한곳을 가리키며 떨리는 나침반처럼
눈부시게 눈부시게 떨리는 뒷모습에게
그러니 벌거벗고 서 있는 뒷모습에게
왜 그리 한없이 서 있냐고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둔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눈이 퉁퉁 붓도록 운 적이 있는가 ? “한 사람을 잊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 한 사람이 사는 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 / 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생의 절반〉,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라는 시구에 무릎을 치며 공감한다면 당신은 이병률의 〈뒷모습〉을 읽을 자격이 있다. 내가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그 누군가와 내가 한방향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그의 뒤에 서 있다면 나는 그의 뒤통수・뒷목・등・허리・엉덩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돌아선 사람의 뒤태는 정직하다.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붙이는 감성적인 에세이를 쓴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쓴다. 앞은 분장이 가능하다. 분장은 거짓말의 가능성을 드높인다.

아울러 앞쪽은 무장한 권력이다. 앞쪽을 대표하는 얼굴에는 명령하고 요구하는 입이 있다. 전방을 주시하는 눈과, 주변의 사물에서 냄새를 맡는 코가 있다.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귀도 앞을 향하고 있다.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이것들은 사냥꾼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뒤쪽은 무장을 해제당한 패배자의 숙명을 내면화한다. 등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등의 반대편에 밀집해 있다. 앞쪽은 예를 갖추고 그에 따르지만 뒤쪽은 예가 없다. 등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그래서 등은 숨길 수 없는 가난이지만, 굽힐 수 없는 등뼈를 곧추세우는 표표함으로 윤리의 꿋꿋함을 드러낸다.

“왜 추운 데 서서 돌아가지 않는가”라고 물을 때 시인은 추운 데 서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중이다. 뒷모습은 추방당한 굴원(屈原), 도피하는 두보(杜甫), 유배당하는 소동파(蘇東坡)를 떠올리게 한다. 추방당하고, 도피하고, 유배당하는 자들은 늘 뒷모습으로 그 영화의 쇠락을 받아들이고 승인하는데, 그 쇠락의 받아들임이 마침내 나아간 끝은 덧없음이고 자진(自盡)이다. 뒷모습 중에서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등이다. 등은 버리고 떠나는 자의 곡절, 혹은 가난하고 슬픈 삶의 내력을 보여주는 바코드다.

“여러 번 짐을 쌌으므로 여러 번 돌아오지 않은 셈이다 / 여러 번 등 돌렸으므로 많은 걸 버린 셈이다 / 그 죄로 손금 위에 얼굴을 묻고 / 여러 번 운 적이 있다”(〈내 마음의 지도〉,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등을 돌리는 것은 등 뒤에 남은 것들을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이다. 마음의 모진 결단 끝에 등을 보이는 사람은 등을 보는 사람보다 착하다.

대개는 등을 보이는 자는 떠나는 사람이고, 등을 보는 자는 머무르는 사람이다. 등을 보이는 자는 등을 보는 자의 자발적 희생자다. 등을 보이는 자는 먼저 버리고 비워서 초연하고, 등을 보는 자는 미처 버리지 못해 집착하는 자로 남는다. 등을 보이는 자에게 등은 그 등을 보는 사람에게 보내는, 그만 끝내자는 휴전협정 선언문이고, 등을 보는 자에게 등은 왜 가느냐고, 가지 말라고 막고 싸워야 할 새로운 전선(戰線)이다. 등을 보는 자가 등을 보이는 자를 향해 발포하지, 그 반대의 경우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등을 보이는 자는 하염없는 자고, 등을 보는 자는 타오르는 의욕과 의지의 소유자다. 흔히 등을 보는 자는 과욕을 분노로 바꾼다. 그래서 등을 보는 자는 잔인해지고, 그 잔인성에 의해 대량학살도 저질러진다. 뒷모습을 보이는 자는 모든 적들의 분노와 가해의 위협에 저를 송두리째 무방비 상태로 내준다.

〈뒷모습〉은 이별을 기리는 시다. 지금 떠나는 당신과 마침내 돌아온다는 당신의 뒷모습을 그린다. 뒷모습은 곧 사라질 존재의 잔영이다. 당신은 곧 떠날 것이고, 남은 자는 남아서 추위와 어둠을 고스란히 안을 것이다. 떠난 당신의 뒷모습은 내게는 “한곳을 가리키며 떨리는 나침반”이다. 여기 “눈길에 찍힌 작은 목숨들의 발자국이 / 발자국에서 빗방울로 빗방울에서 우주의 침묵으로 / 한통속으로 엉겨들어, 조그맣게 얼룩이라도 되어 / 이 천지간의 물결들을 최선들을 비벼대서 / 숨결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나’는 그 나침반에 의지해 “온통 가득한 허공을 밟고” 떠난 당신의 자취를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아프기는 당신도 매한가지다.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눈부시게 눈부시게 떨리는 뒷모습”을 보이며 한없이 머뭇거리고, 또 그러는 당신을 뒤에서 바라보는 ‘나’는 “왜 그리 한없이 서 있냐고 물을 수 없”다. 그때 당신의 뒷모습은 말라버린 눈물이고, 꺼져가는 빛이며, 가닿을 수 없는 아려(雅麗)이고, 행불자(行不者)의 마지막 모습이다. 당신이 내게 보여주는 등은 앞서 간 자의 전적(典籍)이고, 뒤를 따라가는 자의 벼랑이다. 저 뒷모습에는 환난을 대비하지 못하고 무너진 누군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자멸하는 마음의 경계에 당신의 등은 벼랑처럼 서 있다. “뒤편의 뒷맛”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 당신 등의 슬하는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이고, 그 미완의 사랑이 불가피하게 불러온 피로와 무기력이다.



이병률(1967 ~ )은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뒤 시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어찌 사는가 /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 쌀은 안 떨어졌는가”(〈시인들〉,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라고 물을 줄 아는 시인이다. 나는 이병률을 잘 모른다. 언젠가 홍대 앞 작은 주점에서 스치듯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어떤 시인과 앉아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주점의 흐린 공간이 환해지는 듯했다. 그는 차안(此岸)에서의 삶이 지켜야 할 약속들을 갖고 있는 삶이고, 그것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봉인된 지도〉)이라고 말한다. 아주 찰나의 인상이지만 그는 이미 미녀와 공명도 다 덧없음 알고, 그 덧없음에 의지해 문득 고요에 가 닿은 사람으로 보였다. “당신을 중심으로 돌았던 / 그 사랑의 경로들”(〈피의 일〉)을 되새기며 고요를 어지럽히지 않고 고요를 가지런하게 만들 줄 아는 시인이다. 그와 동행한 시인이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를 소개했다.

우리는 눈인사를 짧게 나누고 헤어졌다. 그뿐이다. 그의 이마에 적힌 적요라는 문자를 읽었던가. 나는 그가 적요로운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풍편으로 그가 라디오 방송의 구성작가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주 유능한 출판기획자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집 《바람의 사생활》을 읽었다.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 2010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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