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월〉 전시하는 미디어 아트 그룹 ‘뮌’

서울시립미술관 외벽을 ‘환상의 세계’로 바꾼 부부 작가

“아니, 시립미술관이 원래 저런 건물이었어?”
“저 안에 사람이 있나 봐.”
꽤 소슬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는 초가을 밤. 덕수궁 옆 서울시립미술관 외벽은 ‘환상의 세계’로 변모한다.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로 바뀌어 펄펄 눈이 내리더니, 바로크 시대의 웅장한 성으로 변모하고, 베란다가 딸린 현대의 아파트로 다시 변신한다. 불 켜진 창문 안에서 따로따로 움직이는 사람들. 아파트라는 공동 주택 안에 살면서도 서로 간 소통 없이 외톨이로 생활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사실은 영상이 만들어 낸 이미지, 판타지다. 실제가 아닌, 프로젝터가 비춘 영상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 눈을 의심하게 되는 ‘진짜 같은 이미지’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오는 9월 19일(매주 화~토요일, 오후 8~10시)까지 벌이고 있는 〈라이트 월〉. 미술관 외벽을 미디어 벽으로 활용해 예술적 영상을 투영하는 새로운 형태의 야외 전시로, 갈수록 관객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건물에 영상을 쏘아 ‘빛의 축제’를 벌이는 곳으로 프랑스 리옹 빛의 축제, 캐나다 퀘벡 겨울 카니발, 일본 삿포로 화이트 일루미네이션 등이 유명하다. 〈라이트 월〉은 단순한 영상을 뛰어넘어 예술적 함의를 지닌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독일 브레멘에서 개최된 피어텔페스트(ViertelFest)와 가깝다.

〈라이트 월〉은 영상 작품 두 편을 번갈아 상영하는데, 한 편은 눈 내린 어느 날 밤 어린이들이 곰돌이와 함께 기구를 타고 남미 이과수폭포, 독일 노이슈반슈타인 성, 인도 타지마할, 오스트리아 훈더르트바서 건물 등 세계 명소를 여행하다 서울에 도착해 서울 명소를 돌아본 후 집으로 돌아온다는 스토리. 다른 한 편은 고립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이내믹하게 보여준다.

작품을 보면서 ‘이 정도 수준이면, 외국의 전문가 그룹이 제작했겠지?’라고 지레짐작했다. 알고 보니 부부 작가인 김민선, 최문선 씨의 작품. 이들은 작품 활동뿐 아니라 강연, 대학 강의까지 함께하며 한몸처럼 움직인다. 인터뷰한 날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강연했는데, 한 사람이 이야기하다 뒤이어 다른 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식으로 강연을 이어갔다. 인터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 질문하든 ‘한사람’처럼 대답이 나왔다. 작품을 발표할 때도 이들은 각자의 이름을 뒤로하고, ‘뮌(mioon)’이라는 공동이름을 쓴다. 김민선의 ‘민’과 최문선의 ‘문’을 합쳐서 만든 이름.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새로운 ‘작가’로 탄생한 곳은 독일이었다.

<라이트 월> 중 현대인의 도시 생활을 보여주는 장면.
두 사람은 홍익대 동문. 김민선 씨는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했고, 최문선 씨는 공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에는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1998년,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에 유학하면서였다. 동년배인 두 사람은 같은 해 독일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서로를 알아봤다. 두 사람이 ‘하나의 작가’로 뭉쳐지기까지는 각자 살아온 삶이 여러 단계를 거친 후였다.

최문선. 공대 졸업 후 건설회사에서 3개월간 일했는데,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았다. 고민하다 생각한게 사진. 대학 시절 사진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거기에 해답이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께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독일로 떠났다.

“대학 시절 주로 멜랑콜리한 풍경 사진을 찍었는데, 독일에 들고 가면 다들 감탄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도 감동하지 않더라고요.”

독일 교수들은 작품을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너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라고 물었다. 회화·조소·사진 등 분야를 미리 나눠 놓지 않고, “네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가장 맞는 매체를 찾아 표현해 보라”고 했다. 그는 동영상·컴퓨터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김민선. 어릴 적부터 그림이든 만들기든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다. 그래서 미대에 진학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미켈란젤로 같은 위대한 미술 작가가 되고 싶었다. 순수미술에 대한 고집이 강해 ‘비디오 아트도 아트가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독일 유학은 그런 그를 밑바탕부터 흔들어 놓았다. 미니어처로 극장을 만든 후 객석을 천장에 매달아 바람에 흔들리게 한 작품을 보고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면 영상으로 하지, 왜 굳이 손으로 만들었느냐?”고 물었다. 내 손으로 만들어 내야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9월 19일까지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야외 전시 <라이트 월>.

미대와 공대를 졸업한 후 독일에서 만나 한팀이 되다

만난 지 얼마 안 돼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된 두 사람은 서로의 고민을 나누다 함께 작업하는 것으로 해결점을 찾았다. 김민선 씨는 “남자친구가 언제나 컴퓨터를 붙잡고 무언가를 하는 데 재미있어 보였다”고 한다. 항상 붙어 지내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네 생각’ ‘내 생각’을 나누기 어려울 정도여서 한팀이 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서로 갖고 있는 장기는 달랐다. 김민선 씨가 손으로 만드는 것에 능하다면, 최문선 씨는 사진-비디오 촬영, 컴퓨터에 능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사진, 비디오, 오브제, 설치작업 등 장르를 나누지 않고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는 ‘팀’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이 처음 한 작업은 ‘군중’에 관한 것이었다.

“저희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90년대 초는 학생운동 끝물이었어요. 사회 담론에 따라 거대한 흐름을 이루던 학생들이 개인주의 성향을 띠면서 뿔뿔이 흩어질 때였죠. 그런데 2002년 월드컵 때 다시 군중이 결집했죠. 빨간 티셔츠를 입은 한국인들이 광장을 붉게 물들이며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을 텔레비전 뉴스로 본 독일 친구들이 ‘놀랍다’고 하더군요.”


군중이 어떻게 생성돼 증식하고 소멸하는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됐다. 주제가 정해지면 이들은 인문학자처럼 연구와 자료 조사에 들어간다. 그 후 어떤 매체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구현할지 토론한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미술사의 ‘걸작’들이 걸려 있는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두 사람은 이곳의 작품 대신,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을 촬영했다. 인종과 국적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은 ‘걸작’을 똑같은 모습으로 관람하면서 바삐 움직였다. 관람객의 걸음을 ‘왈츠’처럼 촬영한 두 사람의 작품은 인종은 달라도 획일적인 관람 태도, 미술 작품 감상의 피상성에 의문을 던진다.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면서, 바람, 깃털 등 자연을 끌어들이는 이들의 작품에 대해 독일 미술계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정부에서 분야별로 하나씩 수여하는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고 독일 본 미술관에서 개인전, 미디어 아트의 본산인 칼스루에의 ZKM에서 미디어 아트 그룹전 등에 참여하면서 이제껏 “질주하듯 작품 활동을 해 왔다”고 말한다.

“나치를 경험한 독일은 ‘군중’에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군중’을 주제로 다룬 저희 작품이 흥미로운가 봐요. 젊은 예술가상은 우리가 후보에 오른 줄도 몰랐어요. 지금도 누가 우리를 추천해 상을 받았는지 몰라요. 독일 사회가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고 얼마나 공정한지 새삼 느꼈죠.”


2006년 혼인신고를 한 두 사람은 이제껏 한자리에 정착해 살림을 해본 적이 없다. 각종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발돼 세계 각지를 떠돌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가히 ‘예술유목민’이라 할 수있다. 독일 쇠핑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한국의 창동 스튜디오와 장흥 스튜디오를 옮겨 다니며 작업을 해왔는데, 내년 4월부터 9월까지는 뉴욕에서 ISCP(International Studio & Curatorial Program)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전 세계 아티스트와 큐레이터가 참여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 이들 작품이 더욱더 세계로 뻗어 나갈 좋은 기회다. 세계 각국에서 동시 다발로 일이 진행되다 보니 요즘은 두 사람이 나눠서 활동하기도 한다. 최문선 씨가 전시할 작품 설치를 위해 뉴욕을 다녀온 후 김민선 씨가 독일 전시를 위해 떠나는 식이다. 김민선 씨는 “남편이 4박5일 뉴욕에 다녀오는 동안 오랜만에 혼자 있었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드라마도 보고. 같이 있으면 드라마는 안 보거든요”라고 말한다. 두 사람에게 함께 일하는 것의 장단점을 물었다.

“장점은 외롭지 않다는 거예요. 작업이 잘 안 풀릴 때 서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의 시각에 매몰되지 않고, 서로 견제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아요. 단점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모든 경험을 공유해 경험 폭이 제한된다는 게 단점이 될 수도 있겠네요. 유학 시절 너무 외로워서 24시간 같이 있으면서 정말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그때부터 서로 모르는 게 없죠.”

환상의 호흡 같은데, 이들은 “작업하면서 제일 치열하게 싸운다”고 말한다.

“다른 일로는 정말 싸울 게 없어요. 요리는 남편이 좋아하기도 하고 잘하기도 해 남편이 맡고, 설거지나 청소는 제가 하죠. 생활에서는 부딪힐 일이 없어요. 싸움은 주로 좋은 작품을 하겠다는 욕심, 예술적 자존심이 부딪힐 때 일어나요.”

바로크 시대 건물로 변신하거나 눈이 내리고, 곰돌이가 등장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한 서울시립미술관.
두 사람은 얼마 전 보통사람들에게 자신이 미술작가라고 가정하게 하고, 그들을 인터뷰하는 재미있는 작업을 했다.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미술가는 무슨 직업입니까?”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시죠?”

“주변에서는 당신을 뭐라고 말합니까?” “미술가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 일이 행복하십니까?”를 물었다. 일반인이 대답한 미술가의 모습은 고흐처럼 괴팍하고 가난한 예술가였다.

이 질문을 그들에게 되돌려줬다.

“미술가로 사는 게 행복합니까?”

“반복된 일상을 계속하는 게 아니라 항상 새로운 작업에 도전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미술가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입니까?”

“우리 일은 ‘질문하기’입니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예술의 힘을 빌려 되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누군가 이기려면 누군가는 져야 하는 ‘제로섬게임’에 대해 과연 우리 사회가 그래야만 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런 게 저희 작업의 출발점이 되는 거지요. 그렇게 해 놓은 작업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때 보람을 느낍니다.”

이제까지 ‘뮌’의 작업이 인문학에 토대를 둔 개념적인 작품이었다면, 〈라이트 월〉은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강하고 훨씬 대중적인 작업이었다. 그만큼 반응이 즉각적이어서 재미있었다고 이들은 말한다. 미술관에 영상을 쏜 게 아니라 미술관 자체가 변신한 것같이 보이는 것에 대해 “시립미술관 모형을 3D로 만든 후 영상을 입히는 방식”이라고 비밀을 알려준다.

기술적 구현은 건축물 프로젝션 팀인 ‘퍼포머티브’가 담당했고, 프랑스에서 컴퓨터 음악을 공부한 김진호 씨가 영상과 함께 흐르는 음악을 작곡했다. 이들은 “빠듯한 예산과 촉박한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하느라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다”고 한다. “새로운 작업을 할 때마다 설렌다”는 두 사람이 앞으로 열어 갈 새로운 작품 세계가 더욱 기대된다.

사진 : 김진구
  • 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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