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이 만난 화가 | 화가 김남표

촉감으로 느끼는 세상을 그린다

“털을 스윽 만지는 그 느낌이 좋았다.” 허공에 손을 저으며 말하고는 웃는다. 그 천진한 웃음에서 화가가 느낀 만족감이 짜릿하게 전해진다. 털에 대한 따뜻한 촉각의 기억은 화가 김남표의 가장 중요한 창작의 모티프가 되고 있다. <인스턴트 랜드스케이프>라 명명된 그의 그림 속에서는 구두가 폭포가 되고 악어의 등이 문득 언덕이 되어 나무가 자란다. 화면 부분 부분에는 그린 것이 아닌 실제 털이 붙어 있다. 털의 사용과 동서양 회화의 구성을 모두 응용한 참신한 화면 등 김남표는 매우 독특한 그림으로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전시를 위해 작품들이 모두 빠져나가서 작업실이 아닌 전시장에서 인터뷰를 해야 할 만큼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남표
1970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창작예술협화 공모전 금상, 전국대학미전 대상,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전시기획부분 선정, 2000~2006년 창작 집단 ‘막’ 활동. 1999년부터 현재까지 서울과 암스테르담에서 4회의 개인전, 서울대학교 박물관, 예술의전당(서울), 베이징 아트페어 등에서 20여 회의 주요 단체전 참여. 현재 전업작가로 활동 중.
불혹의 나이인 김남표는 개인적인 전시 이력만 보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2000년부터 소그룹 ‘막’에서의 활동 등으로 탄탄히 작품세계를 쌓아 온 ‘중고 신인’이다. 다만 이 시기는 창작공동체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개인 이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을 뿐이다. 5명의 동기들과 함께했던 소그룹 ‘막’은 재개발 지역이나 터널, 공장지역 등에서 게릴라 전시와 퍼포먼스 등을 선보이며 공동 작업을 해 나갔다. 2006년 소마미술관 전시를 마지막으로 각자의 길을 간 이 그룹 ‘막’의 체험은 현재의 작업에서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털 작업 역시 ‘막’ 시절 시작했던 것으로, 털은 그에게 있어서는 ‘회화적 원천 체험’이다. 2005년 비닐갤러리에서 있었던 그의 첫 전시에서 김남표는 캔버스 전면에 털을 붙여서 만든 풍경화를 선보인 바 있다. 털을 한 방향으로 결을 잡고 포크 등으로 결을 거슬러서 그렸던 풍경은 달빛도 없던 날 밤, 사물을 보아야 했던 원시인들의 시각적인 체험을 연상시킨다.

이 인조 털의 결을 이용한 그림은 조명의 조건에 따라 달리 보이고 이미지를 정착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인스턴트 풍경이라고 했고, 그때의 감각을 지금의 캔버스 작업에도 연장시키고 있다. 그가 ‘인스턴트’라는 용어를 지금도 고집하는 이유는 그의 창작 과정 자체의 특성에서 유래한다. 그는 우선 부분을 그리고 거기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계속 그려 나간다. 그러므로 전체 화면은 작가가 순간순간 느낀 부분의 축적이며 부분의 완성으로 전체는 저절로 따라온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어떻게 튕겨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은 집단 ‘막’에서 배운 것이다. 공동 작업을 했던 김남표에게 가장 큰 유산으로 남은 것은 ‘관계’를 중시하는 그의 태도다.

Instant Landscape 71_
scratching on artificial fur and charcoal on canvas, 227x181cm, 2008
2006년 암스테르담에 머물면서 작업하던 시기에 그의 작업에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캔버스에 유화를 바탕으로 털을 부착하는 지금의 작품들이 시작되었다. 그의 화면 안에서는 여러 가지 사물과 동물들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면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동물들이 따뜻하게 조우하게 만들고 싶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문명과 자연의 공존의 문제이지 그 대립이 아니다. 여러 사물들이 가진 발언권, 항구성 같은 것을 느낀다. 구 서울 역사의 오래된 기둥을 보면서 이 돌은 몇 십 년 동안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린 것을 풍경이라고 이름 붙이지만, 사실은 이런 사물들이 함께 공존하는 스페이스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길 바란다”면서 작가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과 함께 당부를 잊지 않는다.

Instant landscape- shoes #2_
artificial fur and charcoal on canvas, 130x324cm, 2009

동양화와 서양화 기법이 공존하는 그림

이 낯선 사물들을 연결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폭포나 바다로 표현된 물과 숲이다. 폭포나 바다, 숲의 중재와 매개로 이루어지는 이 사물들 간의 만남에는 어떤 결정된 스토리 라인이나 기괴한 변형이 없다. 이 점에서 김남표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나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애호하는 이종결합이라는 방식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두 가지 사물을 엉뚱하게 결합시켜 사물에 대한 낯선 인식을 유도했다면, 김남표의 화면 안에서 사물과 사물 간의 연결은 오히려 암시적이다.

Instant Landscape 74_
scratching on artificial fur and charcoal on canvas, 227x181cm, 2008
<인스턴트 랜드스케이프 74>에서 보이는 것처럼, 멀리 보이는 구두나 악어나 물이 흐르는 초록 계곡으로 변형되고 결국은 큰 폭포를 배경으로 서로 만난다. 또 앵무새를 위협하듯이 입을 벌리고 있는 악어의 앞발 부분이나, 새들이 앉아 있는 가지나, 화재가 난 언덕을 모두 같은 질감인 털을 붙여서 표현하고 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그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신념은 머리로 얻은 것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체험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세상을 눈으로 본다는 것이 분석적이고 이지적인 인식이라면, 손으로 만져서 아는 촉감적인 인식은 보다 종합적이고 원초적인 형태의 인식이다. 손으로 만져서 촉감으로 느끼는 세상의 따뜻함과 깊이를 그는 알고 있었다. 더러 김남표가 그리는 구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17세기나 18세기의 것들인데, 이 구두들 역시 그 유려한 형태를 손으로 만져서 즐기는 묘한 에로틱한 감정이 유머러스하게 담겨 있다.

Instant Landscape 50_
oil on canvas, 130x162cm, 2007
그의 화면에는 낯선 사물과 동물들만이 조우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화와 서양화 역시 공존한다. 작품 <인스턴트 랜드스케이프 50>(2007) 전면에는 전통적인 서양화의 원근법에 입각한 공간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배경에는 동양화풍으로 그려진 폭포가 보인다. 그는 캔버스에 유화와 인조 털이라는 서구적인 매체로 구두, 서양식 건물, 얼룩말, 악어, 고릴라 같은 서양식 소재를 그리지만, 화면의 전체적인 느낌과 구성은 여백과 상징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동양화적인 작법이 곁들여 있다. 이 동양화적인 작법으로 인해 낯선 사물들의 만남으로 생겨난 긴장감이 정적인 평온함으로 완화되며 균제감이 느껴진다. 팽팽한 긴장과 휴지부가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숨 가쁘지도, 지루하지도 않게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된다.

Instant Landscape 43_
scratching on artificial fur and charcoal on canvas, 130×162cm, 2007
이런 관계에 대한 안정적인 감각은 삶을 살아가는 그의 태도에서도 느껴졌다. 그가 자신의 매니저라고 소개하는 ‘연희동 프로젝트’의 배윤성 대표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배윤성 대표는 그의 그림을 들고 영국과 네덜란드에 소개한 인물로, “시간을 가지고 작가를 기다려 주는 것을 아는” 좋은 파트너였다. 이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감은 신선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런 돈독한 신뢰와 멀리 보는 안목이야말로 우리 미술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2009년 첫 전시를 배윤성 대표의 ‘연희동 프로젝트’의 개관전으로 시작한 그는 5월에 암스테르담 캔버스 인터내셔날 갤러리와 12월에 뉴욕 가나갤러리에서 개인전 등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사진 : 문지민
  • 200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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