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국제영화제 넷팩상 수상한 이숙경 감독

오랫동안 탐구한 ‘여성의 삶’을 영화로 만든다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 ‘줌마네’ 대표이자 EBS <삼색토크> 진행자, 작가, 여성운동가로 활동해 온 이숙경(47) 씨가 영화감독으로 우리 앞에 섰다. 그녀의 장편영화 데뷔작 <어떤 개인 날>은 2009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공식 초청되어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상을 받을 줄 모르고 귀국해 버린 그는 뒤에 상을 배달받았다고 한다.

이숙경 감독 필모그래피
<보여? In sight>(5분, 드라마. 2003)
<아줌마 김씨의 장례식 The funeral of Mrs. Kim>(10분, 2003)
<서른여덟 살 38-year-old>(18분, 다큐멘터리, 2004)
<첫날밤 The first night>(9분, 드라마. 2006)
<동네 한 바퀴 A short walk>(5분, 2006)
<일요일 오후 On sunday afternoon>(3분, 드라마. 2006>
<다시 Once again>(13분, 제9회 서울여성영화제. 2007>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 한구석은 혼자 앓고 있잖아요.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지만, 전 남편에게 ‘이혼은 했지만 밥이야 같이 먹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여주인공의 ‘쿨’한 모습에 유럽인들이 공감하는 것 같아요. 귀여운 여인으로 받아들이더라고요.”

자잘한 일상을 통해 여성의 내면을 보여 주는 <어떤 개인 날>은 제작비 3700만 원으로 만든 저예산 영화. 촬영은 그녀가 사는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마을에서 이루어졌다. 여주인공인 김보영 씨가 극단 한양레퍼토리의 간판배우이고, 마당극 배우인 지정남씨가 출연하는 것을 빼고는 모두 일반인이 등장하는 영화. 감독의 아버지가 시각장애인 아버지로, 딸이 여주인공의 딸로 나오고, 친구나 지인들이 주인공의 친구들로 등장한다. 이혼한 중년 여성이 혼자 딸을 키운다는 설정이 이 감독의 상황과 흡사해 이번 영화를 자전적인 영화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는 “그런 시선이 불편하지는 않다”고 한다.

영화에서 겉으로는 무덤덤한 여주인공의 딸이 시각장애인 할아버지를 따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20여m 떨어져서 걸으며 할아버지가 위험한 찻길을 잘 건너는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는 손녀딸의 모습에는 어린 시절 감독의 모습이 들어 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흐릿한 기억인데, 어느 날 아버지 뒤를 쫓아가 버스에 오르시는 것을 지켜봤던 기억이 나요. 영화 속 손녀딸처럼 가슴 졸이면서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다시 아버지 뒤를 따라갔죠.”

영화를 완성한 후 성미산마을에 새로 생긴 마을 극장에서 출연 배우들, 동네 사람들과 작은 파티를 열고 영화 상영을 했는데,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딸의 강권에 촬영에 임했던 아버지는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극중에서도 이혼한 딸의 마음을 토닥여 주는 시각장애인 아버지는 이숙경 감독에게 힘의 원천이다. 중학교 때까지 아버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친구들이 알까 봐 걱정하면서 아버지를 창피하게 생각했던 그. 그러나 점차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더라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감시를 받지 않아 지금처럼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무엇이든 혼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강한 자립심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부모님의 기대 때문에 버거워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조금만 잘해도 크게 칭찬하는 부모 덕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뿐 아니라 60~70대 어른들은 느리게 사는 것의 참맛을 아는 마지막 세대예요. 과도한 욕망을 좇지 않고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하시죠. 입을 만큼만 입고, 먹을 만큼만 먹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면서 사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어요.”


감독의 실제 아버지와 딸이 출연한 영화

영화 <어떤 개인 날>의 광고 문구 ‘나와 닮은 누군가를 만났다’처럼 그녀는 관객이 영화에서 ‘나나 나의 가족, 친구와 닮은 이야기’를 찾아내기를 기대한다. 연출되지 않은 ‘우리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주지 않았다. 직업배우를 쓰지 않은 것도 그 때문. 촬영에 들어가면서 대사를 알려 주고, 그들의 평소 말투 그대로 연기하게 했다. 영화 속 딸은 무심한 듯하면서도 예리하게 엄마와 가족들의 내면, 세상을 관찰한다.

“제 딸이어서가 아니라 딸의 표정에서 그걸 읽었기 때문에 캐스팅했죠. 아기 때부터 얘는 ‘생각하는 얼굴’이었거든요. 뱃속에서부터 고민이 많았나 봐요.”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딸을 뒤에서 안으며 “내 안전벨트!”라고 하는 것처럼 엄마보다 훌쩍 키가 커 버린 딸을 그녀는 “내 친구”라고 말한다. 그녀의 화두는 언제나 ‘여성’이었다. 각기 다른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게 꿈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아줌마가 된 후에도 재미있는 여자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제각각 다르지만 모두 사랑스럽죠. 영화 속에서도 여성을 눈여겨봤고요. 마흔을 넘어선 다음에는 ‘직접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쪽으로 바뀌었지요. 글 쓰고, 강의하고, 방송하면서 했던 이야기들이 영화라는 장르로 옮겨 갔을 뿐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아요.”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쉽게 얼굴을 볼 수 있는 잘나가는(?) 방송인이었다. <아주 특별한 아침> <삼색토크 여자> <100분 토론> 등에 출연하고, 강의도 많이 했다. 그러다 이게 독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마흔네 살이었는데 일을 많이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별 어려움이 없었어요. ‘아, 이렇게 사람들이 나이를 먹는구나’ 싶더라고요. 어딜 가나 대접해 주고.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영화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이때다. 영화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2003년부터 1년에 두어 편씩 영화를 만들어 왔다.

“영화 아카데미 시험을 봤는데, 붙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죠. 떨어지면 동유럽으로 유학갈 생각이었어요. 야채가게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영화를 찍을 생각이었지요.”

젊은이들 사이에 끼여 생활하던 아카데미 시절을 그녀는 ‘다른 나이로 유학간 기분’이라고 표현한다. <어떤 개인 날>의 여주인공인 보영의 캐릭터를 생각해 낸 것도 이 시절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는데, 털어놓을 데가 없었지요. 함께 아카데미를 다니는 친구들은 저보다 너무 어리고, 제 나이 친구들에게 영화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거든요. 스스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그 가운데 지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고, 이혼한 40대 여성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지요.”

다음 영화는 여성의 시각에서 본 40~50대 남성의 이야기. 40대 중반 여성이 뜬금없이 시작하는 로맨스를 담겠다고 한다.

“글 쓰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제게는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도구지요. 영화에는 음악, 미술, 연기 모든 것이 담겨 있어 남은 생애는 영화만으로도 꽉 차지 않을까 생각해요. 늦게라도 용기를 내 도전하길 잘했어요.”

그녀는 <나라야마 부시코>와 <우나기>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거머쥐었던 이마무라 쇼헤이가 일흔 여섯에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라는 독특한 영화를 찍었던 것처럼 할머니 감독으로 나이 들어 가고 싶다고 한다. 그녀가 만들어 갈 미래가 궁금하다.

사진 : 김선아
사진제공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사무국
  • 200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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