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이 만난 화가 | 권두현

사람들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작품

권두현
1969년 강릉 출생. 중앙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동대학원 공예학과 졸업. 뉴욕 프랫인스티튜트대학원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졸업. 2003년부터 11회의 개인전. 제2회 사진 아트 페스티벌, CIGE 2007, Art Singapore 2007, Paris Photo, Art Karlsruhe, Art Sydney 등 중요 단체전 참여. 2002년 마크 로젠 장학금, 2003 프랫인스티튜트 Highest honors, 2006년 KCAF 청년작가상 수상. 현재 전업 작가로 활동 중.
도시인 듯 숲 속인 듯 가늠하기 쉽지 않은 곳. 대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흐느끼듯 떨고 있는 나무로부터 몸을 돌리는 빨간 우산을 든 여인의 몸짓이 극적이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흐린 윤곽 대신 빨간 우산은 관람객의 마음속에 꽃처럼 피어나며 간질간질한 기억의 매개체가 되어 관람객의 발길을 잡는다.(작품 #02590)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작가보다 관람자인 나의 느낌과 감상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작가가 담담하게 웃으며 답한다. 작품 앞에서 작가보다 관람객이 더 많은 말을 하는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의 작품은 열려있고, 관람객은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의 작품을 매개로 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질감과 흐릿한 화면 때문에 그림처럼 보이지만 권두현의 작품은 사진이다. 그의 사진은 사물의 디테일함도 구체적인 제목도 없다. 랭보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Heureux, comme avec une femme(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 이 시의 울림은 바로 ‘한 여자’라는 표현에서 비롯된다고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애매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추억을 대입할 수 있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두현의 흐릿한 화면 역시 랭보의 ‘한 여자’처럼 관람객 앞에 놓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파장이 어떠할 것인가는 작가인 권두현 역시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호주의 멜버른 아트 페어에서 한 중년 여인이 작품을 샀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갑자기 자기의 엄마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작품이 저편에 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것이다. 손이 많이 가는 어려운 작업 과정이지만 작가로서의 긍지와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입니다. 사람은 모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죠.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시간이 축적되고, 그 시간은 기억으로 쌓입니다. 축적된 기억 자체가 삶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왕이면 좋은 기억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지요. 제 작품이 그런 기억의 시발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차분하고 진지하게, 그러나 열정이 가득 찬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연다. 그림이 아니라 사진을 택한 이유도 마음속에 있는 기억에 더 빨리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2000년부터 7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권두현이 카메라로 포착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순간이지만, 100년 후 200년 후 후손에게는 고전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말한다.

“고전적인 느낌을 담고 싶습니다. 기억으로 보존되느냐 마느냐는 가치에 달려 있지요. 중요한 것은 가치입니다. 가치에 관해서는 형용사로 표현해야겠지요. 쓸쓸한, 따뜻한, 외로운… 뚜렷한 것은 형용사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100년 뒤에도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비가 내리고 사람들이 사랑을 한다면 내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02590, Print on Paper, 78x116.7cm, 2007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듯, 그의 작품은 천천히 음미할수록 감정의 파장이 겹겹이 퍼져 간다. 순간 포착이라는 사진의 능력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일찍이 인정받았다. 프랫인스티튜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과 돈 아리에브 교수는 그의 작품이 “스티글리츠, 쉬타이헨, 로스코 같은 대가들을 떠올리게 한다”며 “어떤 관객과도 곧바로 소통이 가능한 보편적인 눈높이( 감성 )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작고한 돈 아리에브 교수는 그의 재능을 일찍이 발견하고 늦깎이 유학생이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고마운 스승이었다.

#03000, Print on Paper, 90x180cm, 2007

작품 창작뿐 아니라 판매도 새로운 방식 선보여

그는 사실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공부했다. 한번 파면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성격인 그는 학창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디자인에 관한 한 실무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으며,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회사의 요직에 있었고 대학원 입학과 동시에 회사를 차려서 꽤 알차게 꾸려 나갔다. 그렇게 10년을 일하고 늦게 유학길에 올라 뉴욕에 있는 프랫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다. 거기서 그는 본격적으로 사진 작업을 시작했으며 모두가 감탄하는 그만의 기법을 완성해 냈다.

#02880, Print on Paper, 150x100cm, 2007
기존의 사진 작품이 유리 액자나 디아섹의 번쩍거리는 반사에 방해받았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견목(종이, 비단, 나무)법 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 냈다. 일반적인 사진 인화지가 아니라 종이 위에 프린트를 하고 필요에 따라 다시 색을 덧입히기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나간다. 또 일반적인 사진과 달리 캔버스에 부착하고 옆면 역시 작품의 연장처럼 꼼꼼하게 색을 칠한다. 더러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을 사진으로 찍기도 한다. 카메라와 붓이 공존하는 그의 작업은 회화와 사진이라는 구태의연한 장르 구분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작품 #03000)

작품 창작뿐 아니라 작품의 판매에서도 그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고자 한다. 그가 스스로 ‘K’s rule’이라 이름 붙인 법칙에 따라 동일한 이미지에 대해 1년에 한 개의 이미지만을 제작하며, 작품 가격을 산정하는 방식을 엄격하게 관리하고자 한다. 그의 이런 시도는 시장에서는 매우 빡빡한 작가로 알려지게 했지만, 작품의 창작 방식, 작가로서 자신을 풀어 나가는 방식, 자신에 대한 비전에서 완벽을 기하는 권두현다운 일이다. 2003년 귀국 후 2008년까지 그는 무려 11번의 개인전을 가지고 비중 있는 단체전에 초청받는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으며, 여러 세계 아트 페어에서도 성공적인 성과를 내었다.

“전시할 때마다 그 대가로 건강을 잃는 것 같아요. 더러는 그러면서까지 왜 이렇게 전시회를 많이 하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1년 뒤에 내가 존재할 거라고 왜 생각하지요? 1년 뒤에 내가 어찌 될지 모르는데, 왜 전시회를 2년 뒤로 미루어야 하지요?”

#03590, Print on Canvas, 150x100cm, 2008
작품 활동에 대한 절절한 욕심이 느껴진다. 아직도 보여주고 싶은 것이 그의 창고에 켜켜이 쌓여 있으며 본격적인 회화에 대한 새로운 계획이 있어 그의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1월 30일까지 이어지는 헤이리 터치 아트 갤러리에서의 전시에서는 마치 파도 같기도 하고 폭포수의 물인 듯 쏟아지는 어두운 이미지의 작품이 소개되어 다시 한 번 관람객을 즐겁게 해 주었다.(작품 #03410, #03590) 무엇을 찍은 것인지는 의문 속에 남아 있지만, 억제된 색채는 바라보는 이의 감각을 더 풍요롭게 해 준다. 이 시리즈의 작업 역시 그가 오래전 준비해 둔 것으로, 2008년 3월 현대갤러리에서 선보였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작업이어서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그는 앞으로도 그동안 축적해 놓은 작품을 분절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그의 바람대로 사람들은 “권두현은 참 다채로웠다”라고 기억할 것이다.

#03410, Print on Canvas, 150x100cm, 2008
작업실에서 전시장으로 이어진 심도 깊은 만남. 오후의 볕이 눈부셨던 헤이리의 터치 아트 갤러리에서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권두현의 모습은 열정적인 아티스트로서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어 내게 기억되고 있다.

#02760, Print on Paper, 150x100cm, 2007


#02710, Print on Paper, 150x100cm, 2007
  • 2009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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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정진용   ( 2016-07-29 ) 찬성 : 57 반대 : 49
좋은작품에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소장욕구솟는 작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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