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균 쌈지 대표

패션 회사 쌈지가 웬 농사?

쌈지가 또 일을 벌이고 있다. 아트상품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길 같은 서울 인사동 ‘쌈지길’, 파주 헤이리에 있는 캐릭터 문화공간 ‘딸기가 좋아’, 신인 뮤지션들의 대안공간 ‘쌈넷’, 재능 있는 미술가들을 발굴 육성하는 ‘쌈지 아트스페이스’ 등 이리저리 튀는 문화 활동을 벌여 온 쌈지가 이번에는 ‘농사’를 하겠단다. 이름하여 ‘쌈지농부프로젝트’. ‘농사는 곧 예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귀농작가를 후원하면서 폐교를 작가들의 레지던스 작업 공간으로 바꾸는 것으로, 자연과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한다.

얼핏 보기엔 엉뚱하고 황당해 보이는 발상. 이 발상의 주인공인 쌈지 천호균 대표를 만나러 방이동 본사를 찾았다. 주황색 건물이 눈에 확 띄었다. 대표실로 들어가는 문은 여섯 개의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돼 있는데, 윗줄 가운데는 유리 없이 뚫려 있다. 이 역시 천 대표의 아이디어. 내년에 환갑을 맞는 그는 청바지에 빨간 양말을 신고 있었다. 부스스한 갈색 장발이 기묘하게 잘 어울렸다.

사무실에는 부인 정금자 씨도 함께 있었다. 앞머리를 짧게 깎아서 내린, 귀밑까지 오는 복고풍 단발머리가 딸기 캐릭터를 떠올리게 했다. 부부는 1993년 쌈지가 오픈할 때부터 머리를 맞대고 함께 쌈지를 꾸려 가고 있다. 정금자 씨의 직함은 감사. 천 대표는 아내를 부를 때 회사에서는 ‘감사야’, 집에서는 ‘금자야’라고 한다. 정 감사에게 인터뷰 동석을 요청했으나 한사코 사양했다. 미디어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했다.

부인과 한직장에서 일하면 어떤가.

일을 덜해도 되니까 편하다. 시험 때 반씩 나눠서 공부하면 편하지 않나.

부인의 스타일이 독특하다.
특히 헤어스타일이 예사롭지 않은데.


우리 감사 별명이 딸기다. 쌈지의 ‘딸기’ 캐릭터는 감사를 형상화한 거다. 고집 세고, 짧은 단발머리에 미남 좋아하고. 처음 만날 때부터 한결같은 헤어스타일이다. 다섯 살, 네 살 손녀들 머리도 다 딸기 스타일이다. 손녀 이름이 순 한글로 ‘니은’, ‘그래’인데, 내가 지어 줬다. 세종대왕이 상을 줄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독특한 것 같다.
당신의 키치적 활동을 보면 평범한 물건도 사물 본래의 성격이 해체되고 재해석된다. 한국의 듀샹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연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아름답게 접근했을 때 무언가가 이루어진다. 아름다워서, 예뻐서 사랑하게 되고, 연구하게 되고, 좋은 결과를 낳는다. 어머니의 사랑이 기적을 낳듯이. 한때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에 빠져 정신없이 보냈다. 아름다운 영화배우에 매료되어 문화나 패션 감각을 배웠는데, 어느 순간 천편일률적인 아름다움에 싫증 나기 시작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감사를 대학교 때 처음 만났는데, 남들 미니스커트 입을 때 혼자 유관순 한복을 입고 다녔다. 그 모습에 반해 따라다녔다. 난 독서를 안 좋아하는데 감사는 책을 많이 읽고 아는 게 많다. 만날 때마다 뭔가를 하나씩 가르쳐 주니까 ‘이 사람한테 배우자’ 해서 내가 그의 배우자가 됐다(일동 웃음).

요즘에는 어떤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나.

사라져 가는 것들이다. 재래시장, 오래된 아파트, 골목길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예술가 중에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 내려 애국투사처럼 뛰어다니는 사람이 꽤 있다. 최정화 작가는 동대문의 오래된 아파트를, 이진경 작가는 동네 방앗간과 오래된 이발소, 을지로 뒷골목의 공작소에 틈만 나면 나를 끌고 다닌다.

사라져 가는 것을 대할 때 느낌이 궁금하다.
기존의 획일화된 아름다움의 기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잘 와 닿지 않는다.


세상은 점점 고급화되고 세련되어 가는데, 그 감탄의 계단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습관화되더라.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싫증 나고 우리 감사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듯이. 고급, 세련이 발달돼 가는 와중에 뭔가 신선한 게 보이면 싫증이 안 날 텐데 그런 게 안 보였다. 건축과 패션은 늘 진화하지만 도토리 키재기 아닌가. 오래된 것들에게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일종의 신기함과 충격이다.

농사를 예술에 접목시킨 발상의 계기와 그 취지가 궁금하다.

작년 헤이리 조그마한 텃밭에 배추를 심었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어 벌레도 많이 먹고 키도 작았지만 100포기를 뽑아서 김장을 했다. 지인들이 모여 김장하는 풍경에서 어린 시절의 향수와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때 재미를 들여서 올해는 좀 더 다양한 품종을 심었다. 고추, 상추, 오이, 호박 등. 씨를 뿌리고 싹 나는 걸 처음 경험했다. 배추는 모종을 했었다. 참 신기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식물이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오이는 따도 따도 또 나고, 호박이 주렁주렁 열리는데, 정말 신기했다. 디자인하면서 그렇게 위대한 디자인을 한 적이 없었다. 이런 생경한 아름다움을 도심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이 프로젝트를 하게 됐다. 처음 생각한 게 시청 앞에 논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10월 10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되는 서울디자인올림픽에서 ‘쌈지농부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

시청 앞 논 프로젝트라고 했더니 진짜 시청 앞에 논을 만드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더라. 그건 아니고, 내 생각 속에 있는 가상의 작품이다. 시청과 논을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합성하는 거다. 지금은 개념미술이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도 구현해 보고 싶다. 동양 문화의 한 단면인 논을 서울 중심인 시청에 가져다 놓는 것, 멋지지 않은가.

작품은 어디에서 감상할 수 있나.

잠실운동장 70평 정도의 공간에서 전시할 거다. 농촌 현장을 재래시장처럼 꾸밀 예정이다. 농사를 테마로 한 구두와 가방도 가져다 놓고.

쌈지는 튀는 디자인으로 승부해 왔다.
남들이 생각해 내지 못하는 독특하고 기발한 발상의 디자인이 많은데, 아이디어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건가.


나를 주변 사람과 비교해 보면 상식과 깊이, 지혜가 아주 부족한 것 같다. 내가 남과 좀 다른 면이 있다면, 특기가 ‘가만히 있기’라는 거다. 가만히 있기 대회가 있으면 1등할 자신 있다. 나는 틈만 나면 아무 생각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 무념무상의 경지가 되는 거다. 그 다음으로 자신 있는 건 쓸데없이, 이해관계 없이 막 사랑하는 것. 조건 없이 사랑하기 대회가 있으면 1등할 자신이 있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떤 부류의 사랑인가.

사랑하면 그 대상의 입장, 상대방의 입장, 자연의 입장, 농사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크리에이티브하려면 사랑해야 한다. 직원을 뽑을 때도 사랑의 경험을 얘기해 보라고 한다. 그게 직원 채용의 기준이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외출 외박 기록을 세웠다. 부대장님이 부대 역사상 최고라고 하더라. 그것도 사랑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 감사가 평택에 있는 학교에 윤리 선생님으로 부임해 왔다. 부대 근방으로. 외롭게 혼자 있을 그 친구를 생각하니까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외출 외박할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 그 아이디어만 모아도 책 한 권은 나올 거다. 최고의 효과는 미팅 주선이다. 군인들은 미팅에 약하다. 아무리 무서운 사람이라도 미팅 한 번 시켜 주면 끝이다. 사랑은 기적을 낫고 기적이 크리에이티브로 연결된다.


시기마다 사랑의 대상이 조금씩 바뀌어 온 것 같다.
지금은 그 대상이 농사인가.


그렇다. 농사와 사랑에 빠졌다. 농사를 사랑하고, 농촌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을 후원할 거다. 임옥상 씨는 진작부터 쌀로 작업을 해 왔다. 밀레의 ‘만종’을 보면 농사짓는 게 경건하지 않나. 농부 자체도 비주류의 예술가, 창조가가 아닌가 싶다. 농사는 예술이다.

미래에는 농부가 지배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얘기를 했다.
시대에 역행하는 말처럼 들리는데 어떤 논리인가.


예술 문화의 발달 정도가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가늠한다. 농촌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지가 선진국의 기준이 될 거라는 데는 모두 동의하는 것 같다. 우리 지구가 어느 순간부터 ‘불편하기 문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20년, 30년 뒤로 돌아가되 불편을 느끼지 않으면서 불편해지는 연구. 최고의 기술은 농사다. 70세가 넘은 할머니가 우리보다 열 배 빠른 속도로 일하시더라. 정말 예술이라고 느꼈다.


형 천호선 쌈지길 대표와 김홍희 관장 부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2007년 6월호.
볼수록 형과 많이 닮았다.


그런가? 감사가 들으면 기분 나빠하겠다(하하).

형 부부와 자주 교류하나.

거의 매주 만난다. 형 가족과 잘 통하는데 스타일은 너무 다르다. 형님 가족은 늘 공부한다. 그 집은 밤 12시에 가도 도서관이다. 아이들도 책벌레다. 우리 집은 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 딸은 딸기에서 마케팅을, 아들은 쌈지 아트디렉터 일을 한다.

토털 잡화 브랜드인 쌈지는 서브 브랜드가 많다. 쌈지의 대표 브랜드 ‘쌈지’ 외에도 재활용품을 이용해 만드는 수공예 라인인 ‘고맙습니다’, 빈티지 스타일 ‘쌤’, 팬시 문구 브랜드 ‘딸기’, 영캐릭터 브랜드 ‘아이삭’, 절제된 디자인이 특징인 ‘진리’, 도자기와 자기 등 리빙 아이템 ‘숨’ 등. 끊임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구상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와중에 쌈지가 일관성 있게 추구하는 게 있다. 바로 자연과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 ‘고맙습니다’ 라인은 작년 유럽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쌀가마니, 은박지 돗자리, 텐트 천, 쌀자루, 헌 옷 등을 오리고 붙여 만드는 이 가방들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쓰레기가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이다.

사진 : 김선아
  • 200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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