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이 만난 사람 | 한국 마임의 대부 유진규

“나는 운명론자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세계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흘러간다. 남들이 보면 우유부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내버려 둔다. 그냥 흘러가게 놓아 둔다.”
한국 마임의 대부, 유진규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연극공부를 하면서 대사가 없는 신체동작의 무한한 가능성에 흥미를 가졌고, 영화 〈인생유전〉에서 본 장 루이 바로의 판토마임은 나를 매혹시켰다. 마르셀 마르소의 내한공연을 본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우리나라에 판토마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 방태수가 대표로 있던 극단 에저또의 공연을 통해서였다. 나는 한국 마임 1세대라고 불리는 유진규, 김성구 등을 1970년대 후반에 만났다. 숙대 앞에 있던 김성구의 작업실에 가서 술을 마신 기억은 있는데, 누구와 같이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와 유진규를 만나게 한 사람은 시인 이문재였다. 극단 프라이에 뷔네의 공연에 주인공으로 참가하고 있던 유진규는 내 예상과는 달리 대사가 있는 배역이었다. 나는 이문재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연습실에 갔다가 그를 만났다.

판토마임 연기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진규의 팔과 다리는 키에 비해 길다. 그의 얼굴은 마치 탈을 쓰고 나온 것처럼 표정이 극대화되어 있다. 돈이 안 되는 연극관계 서적만 전문적으로 출판하던 예니의 신영철 씨는 역시 돈이 안 되는 마임축제를 기획했었는데, 나는 거기에서 유진규의 초기 대표작들을 거의 다 보았다.

그 후 1981년, 유진규가 결혼해서 춘천의 한 농장에서 산다는 말이 들렸다. 그 뉴스는 당시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평생 무대에서만 살 것 같던 그가, 장화를 신고 농장에서 쇠똥을 치우는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이대로 무대에서 사라질 것인가. 한국 마임의 간판인 유진규의 낙향은 당시 우리 사이의 가장 놀라운 화제였다. 그를 마임으로 다시 불러들인 사람은 신영철이었다. 한국 마임의 길을 연 사람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영철의 말에 설득당한 유진규는 1988년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온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한국 마임 관계자들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마임축제 이야기가 나왔다.

1989년 서울에서 제1회 한국마임페스티벌이 열렸다. 그 다음해인 1990년 춘천MBC가 이 공연을 초청해서 2회부터는 춘천에서 마임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춘천국제마임축제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6년 연속 문화관광부의 우수축제로 지정되었고, 2007년과 2008년 2년 연속 문화관광부 최우수축제로 지정되었다. 이제 국제적 축제로 성장한 춘천국제마임축제는 올해 20주년을 맞아 지난 5월 23일부터 6월 1일까지 열흘 동안 성대한 축제를 벌였다. 춘천국제마임축제 예술감독인 유진규는 이 모든 일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다. 춘천국제마임축제는 대사가 없는 마임으로 축제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다양한 몸짓의 신체언어를 총망라하는 거대한 축제로 성장하고 있다.

“올 10월에 춘천국제마임축제 2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을 열려고 한다. 마임이라는 장르 자체는 해체되고 있다. 그래서 지나간 예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비주얼 퍼포먼스, 피지컬 퍼포먼스, 오브제 퍼포먼스 등으로 신체 움직임을 통한 예술 장르를 구분하려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종래의 마임 개념을 뛰어넘어 몸, 움직임, 이미지 이런 모든 공연 형태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춘천에 마임을 뿌리내리기 위해 유진규는 초겵?고와 대학을 찾아가 많은 공연을 했다. 극장에서는 수준 높은 예술적 작품을 공연했지만, 거리에서는 대중적인 공연을 했다. 마임축제를 시민문화운동으로 전개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마임축제에는 2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시민들의 관심으로 성공했지만 시민문화운동으로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시민들의 요구는 쉽고 재미있는 것을 무료로 많이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입맛에만 맞는 작품을 하는 것은 질적 성장을 위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춘천 시민의 세금으로 하는 축제가 시민과 거리가 있어서는 안 되지만 공연예술의 미학적 특성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지금 마임이나 연극 무용을 넘어서 새로운 개념의 예술이 형성되고 있다. 나의 역할은 그런 쪽으로 마임축제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는 비전이 없다. 예술적 태도가 빈약하고 이 시대에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지 신념이 없다.”


이 세계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흘러간다고 믿는 운명론자

10년 전, 유진규는 갑자기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고 종적을 감춘 적이 있다. 마임축제 때문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머리가 아팠고 병원에 가서 MRI를 찍어 보았더니 뇌종양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남원 실상사로 들어가 3주 동안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왜 아픈가? 뇌종양이 왜 생겼는가? 그것은 욕심 때문이었다. 서로의 욕심이 부딪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천주교 수양원에서 한 달을 지냈다. 석 달 뒤 다시 MRI를 찍어 보았는데 뇌종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운명론자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세계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흘러간다. 남들이 보면 우유부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내버려 둔다. 그냥 흘러가게 놓아 둔다.”

유진규의 초기 대표작 〈도둑 이야기〉는 침묵과 어둠 속에서 놀라운 위트와 유머로 상상력의 경이로움을 안겨 주었다. 유진규는 뇌종양이 사라진 후 1998년, 삶의 무게를 털어 버린 사유의 몸짓 〈빈손〉이라는 한 시간 분량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에딘버러 페스티벌 등 수많은 국제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다시 한 번 한국 마임을 대표하는 유진규의 존재를 각인시켜 주었다.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나는 더 이상 뺄 수 없는 것까지 빼 보려고 했다. 그러나 미니멀리즘의 극한 상태에서도 빛과 어둠은 뺄 수 없었다. 어둠과 빛, 소리의 근원적 요소를 가지고 움직임만으로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는 예술적 실험 없이 작업하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그 자신도 지금까지의 작업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예술적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마임 연극 무용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될 것이다. 아무리 삶이 바뀌어도 이런 예술의 고유한 형태는 유지된다. 다만 장르의 고유함을 새롭게 변형해야 한다. 마임도 얼마든지 동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고 미래의 비전을 가질 수 있다. 예술가적 태도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노력해서 새로운 방법적 측면을 모색해야 한다.”

유진규는 춘천국제마임 축제를 준비하느라 자신의 공연에는 전념하지 못하고 있다. 〈빈손〉 이후 단편은 발표해 왔지만, 장편은 발표하지 못했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하나의 주제로 끌어 모아 올 11월쯤 새로운 장편을 발표하려고 한다. 그의 시선은 삶에 대한 대긍정 아래서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데 가 있다. 그러나 어둠은 어둠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것은 그의 다음 작품 주제이기도 하다.

사진 : 김선아
  • 200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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