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 블루 프로젝트’로 미국에서 인기 작가 된 사진작가 윤정미

제도화된 것들에 대해 던지는 의문

최근 미국 뉴욕타임스紙에 한 한국 사진작가의 전시회가 크게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3월 6일부터 4월 26일까지 뉴욕 화랑가 첼시의 젠킨스 존슨 갤러리에서 개인전 를 열고 있는 윤정미 씨. 뉴욕으로 떠나기 직전 그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그는 2월 27일부터 3월 11일까지 서울 인사동 ‘나우갤러리’에서 열린 <한국 사진의 프런티어展>에도 참가했다.

분홍색 가방, 장갑, 구두, 인형, 목걸이, 장난감, 연필, 책과 공책…. 온통 분홍색으로 둘러싸인 채 분홍색 옷을 입고 분홍 머리띠를 하고 있는 여자아이. 반대로 남자아이는 온통 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2005년 미국 ‘School of Visual Arts’에서 공부할 때 시작한 이 작품을 그는 2006년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이어나갔다. 사진에서 보니 한국 아이나 미국 아이나 비슷한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다.

“여덟 살 딸아이가 핑크색을 너무 좋아해 핑크색 옷만 입고 핑크색 장난감만 사달라고 하더군요. 주위를 둘러보니 그 또래 여자아이들이 대부분 그런 거예요.”

2004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 건너갔는데, 그곳에선 여자아이들의 핑크 편집증이 더 뚜렷했다. ‘저걸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 학교나 아파트에 모델을 구한다는 전단지를 돌리고, 지하철이나 대형마트 ‘타깃’에서 분홍 옷을 입은 아이와 엄마를 보면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 집에 찾아가 핑크색 물건들을 모두 꺼내 놓게 한 후 4~5시간 동안 다시 배열해 촬영을 했다. 죽 나열된 물건을 보고 엄마들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는 반응. 그의 사진은 성역할(gender)과 색의 관계, 지나친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 획일화된 소비 등 다양한 사회적 함의를 던진다.

그런데 그에 앞서 먼저 시각적으로 눈길을 잡아끈다. 팝적인 요소가 있는데다 요소요소 이야깃거리가 많아 소장하고 싶게 만드는 작품. 그래서 잘 팔린다. 그가 이제까지 촬영한 ‘The Pink and Blue Project’ 작품에는 50~60명의 아이들이 모델이 됐다. 이를 각각 122×122cm, 76×76cm, 50.8×50.8cm 세 가지 사이즈로 만들어 한정판으로 내놓는데, 2006년부터 미국의 각종 사진전과 아트페어에 나가 인기를 끌었다. 특히 딸 서우를 촬영한 사진이 “귀엽다”며 잘 팔려 나간다고. 휴스턴미술관이나 텍사스의 어린이 병원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2007년 4월, 폐간 직전 誌의 표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여자아이들이 핑크를 좋아하는 게 사회에 길든 것인지, 본능인지 궁금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반대였다. 연한 빨간색인 핑크는 한때 남자다움의 표현이었다. 핑크와 블루로 남녀를 구분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아 물건을 사러 가면 두 가지 색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생산자가 조장한 색깔 구분은 이제 생산자조차 바꾸기 어렵게 됐다. 통념을 거스르는 색을 내놓으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좌| 에밀리와 에밀리의 핑크색 물건들. 우| 서우와 서우의 핑크색 물건들.
좌| 에단과 에단의 파란색 물건들. 우| 재욱이와 재욱이의 파란색 물건들.

살림하고 아이 키우며 작가로 ‘살아남기’

우리나라보다 미국에서 먼저 인기 작가가 되어 돌아온 그. 그는 “1992년 사진작업을 시작했는데, 2006년 와서야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생활의 어려움은 없었지만, 주부 자리에서 비용을 써가며 수입도 생기지 않는 작품 활동을 계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친정이나 시댁이나 “너 하나 희생하면 모든 사람이 편안하지 않느냐?”고 했다. 살림하고 아이 키우며 작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서바이벌’이었다고 한다. 스스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이러나’ 회의가 들 때도 많았다. 그런 시기를 견디며 끈질기게 작업을 해왔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큰아들이 중학생, 딸이 초등학생이 되고 보니 조금 손에서 놓여 난다고. 가장 강력한 지지자는 남편. 남편은 아내의 갈망을 이해했고, “돈을 벌어 오지 않아도 좋으니, 자신의 일을 하라”고 격려했다. 미국에서 공부할 것을 강력히 권한 것도 남편이었다.

“남편이 일 년 동안 미국에서 연수할 기회가 생겨 그곳에서 다시 공부를 할까, 생각하다 그냥 슬슬 작업이나 해야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이제까지 준비해 놓고 무슨 말이냐고, 학교에 들어가라고 강력 권했죠.”

몸은 힘들었지만, 미국에서의 새로운 학교생활은 너무 즐거웠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 서양화과 출신. 대학에 들어갔더니 너도나도 추상화를 그리는 분위기라 그와 맞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얼마 안 돼 결혼한 그는 판화로 바꿔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작업실을 마련하고 도구도 다 사들였는데, 임신이었다. 임신한 몸으로 독한 화학약품 냄새를 맡을 수는 없는 일이라 모두 처분해야 했다. 임신에 대해 그는 “기쁘다기보다 쇼킹했다”고 표현한다.

좌 | <동물원>. 우 | <자연사박물관>.
출산과 육아, 시집살이. 빡빡한 주부의 일상에서 돌파구를 찾던 그는 문화센터에 다니며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골목길이나 지하철에서 몰래 숨어 사람들을 촬영하며 ‘street photographer’가 됐다. 그리고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에 들어가 사진디자인을 전공한 후 ‘동물원’과 ‘자연사 박물관’ 등 작품을 발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에게 왜 동물원을 소재로 촬영했는지 물으면서 “우리에 갇혀 있는 침팬지의 눈에서 인간과 너무 흡사한 슬픔, 무력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요. 그래서 동물원을 소재로 삼았죠. 답답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처음에는 터널 안에 뒷모습을 넣어 찍기도 했어요. 그러다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사람들을 분류해 가두고 있는 틀, 시스템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를 가두는 시스템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결혼이라는 시스템. 시댁과의 관계 등 끊임없이 나를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야 하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의 현실이 다른 여성들보다 힘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시어머니가 굉장히 좋으신 분이다”라고 덧붙인다. “결혼도 안 한 여자가 무슨 말이냐?”는 부모의 반대에 유학을 포기하고 일찍 결혼했다는 그. 아내와 엄마,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맞춰 살아온 그는 자신을 규정 지어 온 시스템에 대해 작품으로 ‘되묻기’를 했다.

| < Real Face Series >.
미국 유학 시절, 뉴욕공립미술관 사진컬렉션에서 한국관련 파일을 찾았더니 한국전쟁 혹은 산과 강 사진만 있었다. 현대 한국은 거의 없었다. 미국 친구들이 떠올리는 한국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사진들을 스캔해 뮤직 비디오로 만들면서 그는 ‘당신들이 아는 한국이 진정한 한국인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자신의 얼굴에 ‘woman’ ‘mother’ ‘wife’ ‘korean’ ‘daughter’ ‘daughter in law’ ‘endure’ 라는 단어를 빨간 립스틱으로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주어진 여러 역할을 감당하면서 작가로 살아가는 것은 ‘버티기’, ‘견디기’였다.

그는 자신이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내 이야기’에서 출발해 피부로 느껴지는 작업을 하다 보니 이런 작품들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를 다시 ‘한국 여성 작가’, ‘엄마 작가’라는 카테고리에 넣으려고 하더라고. 그는 자신이 카테고리 안에서 해석되는 게 싫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미 제도화된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되묻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다음으로 메스를 들이댈 대상은 무엇일까? 히트작을 낸 다음이라 부담이 더 클 것 같다.

사진 : 김선아
  • 200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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