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 소설가 조경란이 어머니에게

엄마와 살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술 마시면 평소 때보다 기분이 좋아지고 쾌활해지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어. 엄마와 난 술 취해 공연히 울고 화내고 시비 거는 사람, 너무나 싫어하잖아. 그런데 지난주 월요일 밤에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인터뷰 잘 마치고 기분 좋게 술 취해 들어온 것 같은데. 작업실 열쇠 때문에 엄마한테 짜증 부리고 화내고 급기야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하고 말이지. 엄마 항변대로 그게 억지라는 걸 나도 알았지만 실은 그래서 더 멈출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건, 엄마한테 부린 짜증이 아니라는 것, 그 순간에도 알고 있었지 엄마? 기다리는 데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가 오지 않고, 원고 마감 날짜는 다가오는데 여전히 막막한 상태였고. 아마 그 월요일엔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단단한 공처럼 뭉쳐져서는 하필이면 엄마한테 튀었던 것 같아.

그래도 다음날 엄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시장을 봐와 내가 좋아하는 시금치나물, 된장찌개, 생선구이로 상을 차려 주고 내가 냉장고에 맥주 떨어져 있는 것 싫어하니까 무겁게 사들고 온 맥주를 새로 채워 주었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도 짜증이 왈칵 솟구치는 거야. 엄만, 화도 안 날까? 내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신경질을 부려 댔는데도? 한 번 더 그런 공연한 시비를 걸어 볼까 하는데 엄마 얼굴에 검은 반점들, 그리고 염색할 때가 지났는지 성성한 흰 머리카락들이 눈을 찔렀어. 그걸 보니 이상하게 기가 탁 꺾이는 느낌이지 뭐야.

지난해 여름, 내가 베를린에서 지내고 있을 때 말이야, 엄마. 함께 술 마시던 외국 친구들하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생각이 나. 없으면 살 수 없는 것.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난 딱 두 가지를 말했어. 글쓰기와 가족. 글쓰기와 엄마. 그러자 친구들이 세상에, 니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엄마 타령이니? 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어. 내가 첫 책을 내던 스물여덟 살 때, 엄마가 했던 말 생각나? 네 나이 때 엄만 딸 셋을 다 낳았는데, 라고 했지. 그 말끝에 하고 싶었던 말, 엄마가 접었던 꿈들. 나는 그런 것을 읽었어. 요즘도 내가 예쁘게 화장하고 외출할 때면 구두를 챙겨 주면서 젊은 날의 엄마가 그렇게 외출하는 거라고, 내가 새 책을 내면 젊은 날의 엄마가 새 책을 내는 거라고, 엄마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서 난 글쓰기와 ‘나’가 아니라 슬쩍 ‘엄마’라고 말했던 건데, 그 친구들은 도통 못 알아듣더군.

<아버지와 살 수 있다면>이라는 일본 영화가 있어. 이따금 난 그 제목을 이렇게 한번 바꿔 보곤 하는 거야. ‘엄마와 살 수 있다면.’ 그럴 때마다 어쩐지 조금 슬퍼지는 것 같아. 그러나 지금은 정말 다행이지 엄마?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살 수 있으니. 그리고 또 지금은 언젠가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엄마 생각을 하면서 ‘엄마와 살 수 있다면’이라고 혼잣말을 하게 되지 않기를, 그런 시간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엄마. 우리 가족이 언제나 행복하진 않았지만 슬픔이 모여 또 다른 온기를 만든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 기다리면 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것도. 그건 엄마가 우리 자매들한테 자주 하는 말이잖아. 그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신경질 부려서 진짜진짜 미안했어 엄마! 그리고 참, 내 작업실 냉장고에 맥주 떨어졌어요, 엄마.
글쓴이 조경란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창작집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국자 이야기》,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혀》 등을 펴냈다. 제1회 문학동네 작가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 2008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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