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이 만난 사람 | 아르헨티나의 탱고 댄서 치초

탱고를 한 단계 격상시킨 마에스트로

Mariano Frumbuli, 그러나 세계의 많은 탱고인들이 ‘치초(chicho)’라고 부르는 그는, 전통 탱고의 춤을 계승하면서도 독창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탱고를 만들어 가고 있는 탱고 춤의 혁명아다. 지금 치초는, 가령 탱고의 음악에서 피아졸라가 했던 역할을 춤에서 하고 있다. 피아졸라가 저잣거리의 대중 속에 흘러 다니는 탱고 음악에 뛰어난 미학성을 부여하여 탱고 음악을 현대 음악의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렸다면, 치초는 대중이 즐기는 밀롱가 마루 위의 탱고 춤을 현대 무용의 가장 높은 단계로 격상시키고 있다.

탱고는 19세기 말, 세계 4대 부국 중 하나였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항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삶을 꿈꾸며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절대적으로 여성이 부족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이성을 유혹할 특별한 무기가 필요했다. 탱고는 이성을 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전쟁이었다. 현란한 발 기술과 화려한 신체동작으로 이성을 춤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일거리를 찾아 부두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던 보카 항구 주변에는 사창가가 있었고, 노동자들은 거리의 여성들을 붙잡고 그들을 매혹시키고 감탄사를 연발시킬 수 있는 멋진 동작들을 창조해 냈다. 탱고 리듬 속에는 아르헨티나나 우루과이의 민속음악 하바네라가, 또 탱고 동작 속에는 넓은 평원에서 양을 치던 가우초들의 외로움 등이 부분적으로 흡수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 생존을 위한 강렬한 목적의식이 탱고에 담겨 있다는 것이 큰 변별점이다.

2007년 말, 탱고시덕션(대표 배수경) 초청으로 자신의 제자이자 파트너인 후아나와 내한한 치초는, 국내 최대의 탱고바인 ‘땅게리아 델 부엔 아이레’에서 2007년 12월 14일부터 20일까지 일주일 동안 탱고 워크숍을 열었다. 치초의 제자이자 동료인 세바스티안과 마리아나 커플도 함께 내한해 강습을 진행했고, 12월 15일 저녁에는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네 사람이 합동으로 탱고 쇼를 펼쳤다.

4년 전 탱고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치초는 내 머릿속 최고의 탱고 마에스트로였다. 그에게 강습을 받기 위해서 파리로 갈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를 한국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동영상으로 그의 공연을 볼 때 사자머리처럼 흩날렸었는데 한국에 온 그는 머리를 깎아 단정해 보였지만, 얼굴 여기저기에 피어싱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그에게 강습을 받고 15일 탱고쇼의 오프닝 무대에서 공연을 했다.



탱고를 추는 치초(위)와 하재봉 씨.
치초와 같이 내한한 후아나는 치초가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제자였다가 파트너로 격상된 마음씨 좋고 착한 땅게라(탱고 추는 여자)였다. 그러나 치초의 여자친구는 자신의 후배인 세바스티안의 파트너 마리아나였다. 그래서 두 커플, 네 사람이 함께 전 세계를 이동하며 워크숍과 합동공연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네 사람이 함께 공연한 40분 정도의 새로운 작품은 내한하기 전 아르헨티나에서 3주 정도 합숙하면서 만든, 세계 초연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공연 전날 탱고 바 ‘땅게리아 델 부엔아이레’ 한쪽 구석에서 다음날 오프닝 무대 공연을 연습하고 있는 나를, 치초와 세바스티안이 30분 정도 열심히 쳐다보면서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공연 연습을 안 할 수도 없었는데, 다음날 그들의 공연을 보고 이유를 알았다. 내가 만든 안무와 그들이 새롭게 만든 안무에 공통된 동작들이 있었다. 나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고 지금 치초와 정신적 소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초는 그의 스승 세대인 파블로 베론과 구스타프 나베이라, 파비안 살라스 등 세 사람이 초석을 다진 누에보 탱고를 본격적으로 완성한 인물이다. 물론 지금도 그의 스승들 역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끊임없이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지만, 치초의 상상력과 실험의식은 이미 그의 스승들이 이룬 업적을 초월해 독창적인 미학적 경지에 다다라 있다.

치초는 무대 위에 등장한 반도네온 악사 한 명의 라이브 연주만으로 춤을 추기도 했고, 때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음을 배경으로 적막한 무대에서 새로운 공간을 창조했다. 청각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며 오히려 시선을 집중시킨, 파격적이며 독보적 예술의 경지에 이른 춤이었다. 치초의 춤은 최고의 테크니션이 이룰 수 있는 경지, 무기교의 기교 즉, 테크닉이 없는 테크닉을 구사한다. 자세히 보면 테크닉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어떤 테크닉도 치초에게 오면 테크닉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온몸의 세포를 활짝 열고 음악을 흡수하여 형성된 충만한 내적 정서를, 치초는 그대로 몸 밖으로 내뿜으며 스텝을 밟는다. 그렇게 관객에게 자신이 느낀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다. 최상의 테크닉을 화려하게 구사하는 외형적 춤보다 내적 정서의 깊고 무서운 마력으로 우리를 이끄는 내성적 춤이 더 어려운 것이다.


음악과 합일된 몸의 표현

치초의 제자가 탱고 시범을 보이고 있다.
치초가 뛰어난 것은 테크닉에만 의지하는 테크니션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울리는 음악과의 합일을 통해 자신이 획득한 정서적 깊이를 탁월하게 육체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는 테크니션이 아니라 아티스트다. 진짜 춤꾼은 기교를 버린다. 치초는, 전통 탱고에서 출발했지만 독창적 상상력과 실험의식으로 전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탱고를 연구하며 발전시켰다. 그는 그의 스승인 구스타프 나비에라와 파비안 살라스 등의 영향에서 벗어나 현대 탱고가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행동반경도, 탱고에 현대적 감각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장르, 특히 현대무용과 발레의 뛰어난 아티스트들의 성과를 흡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치초의 스텝은 단호하고 예리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명하게, 치초는 여자 땅게라를 향하여 밀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온다. 그리고 순간적인 무게중심의 급격한 이동을 빈번하게 활용하면서도 상대 땅게라의 무게중심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고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다. 아주 짧은 순간, 치초는 무게중심을 왼발과 오른발로 급격하게 자주 이동하면서 미묘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그의 무게중심의 이동은 너무나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일어나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다. 그래서 얼핏 그의 춤은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무기교의 기교,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오른 상태에서나 가능한 테크닉과 예술적 표현의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진다.

치초의 춤은 현대 탱고가 가 닿을 수 있는 절정의 경지를 보여준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탱고를 떠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춤을 본 적이 없다. 치초의 공연은 당분간 그 어디에서도 만나 볼 수 없는 현대 탱고의 최고 경지에 이른 무대였다. 지금 치초는 자신의 탱고 인생 최절정기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치초의 황금시대다.

사진 : 이창주
  • 200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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