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 김다은 - 사랑하는 조카에게

빈둥거리는 시간도 가져 보렴

서원아, 아직 너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밤이 깊어가는데 말이다. 밤의 눈동자인 달도 잠이 와 눈꺼풀이 무거운지 거의 빛이 없다. 요즘 네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밤 12시가 되어야 겨우 네 얼굴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시계를 보니 밤 11시 17분이구나. 너를 나무랄 수도 없다. 다른 친구들은 도서관에서 밤을 샌다고, 5일째 집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버티고 있다고 했다. 매번 너만 빠져나와 같이 프로그램을 짜야 하는 팀원들의 눈치가 곱지 않다고 했던가. 나는 너를 통해 대학생들의 고달프고 불안정한 생활을 본다.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학교에서 칫솔질을 하고 밥을 먹고, 앉아서 잠을 잔다고. 남학생들은 스트레스로 대머리 증상을 보인다고도 했다. 너도 머리카락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고 했지. 네 생활을 지켜보지 못한 사람들은 허풍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고달프고 힘든 생활에 대한 최소한의 불평이라고 여긴다.

서원아, 아직 너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네가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처음 내 아파트에 들어오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네 엄마는 너를 딸처럼 데리고 있으라고 했지. 징그럽게, 결혼도 안 한 내가 무슨 딸! 스무 살이 다 된 숙녀를 딸로 여길 수도, 여겨지지도 않았다. 나는 너를 친구로 여겼다. 그래서 네 엄마처럼 꼬박꼬박 음식과 속옷과 스타킹을 챙겨 주지 않았고, 지나치게 관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와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서원아, 벌써 3년이 되어 가는구나. 같이 외출해서 간혹 사람들이 너를 내 딸이라고 여기면 네 심정은 어땠을까. 그럴 때마다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런 내색을 별로 하지 않았지. 나도 사람들이 너를 내 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물론 눈썰미 있는 사람들은 내가 네 예쁜(!) 이모라는 것을 알아보지만 말이다.

서원아, 이번 겨울방학에 인도 여행을 떠난다고 했지? 최근 너는 너무 컴퓨터에 매달려 있어서 네 허리도 걱정스럽고, 네 눈도 걱정스러웠다. 학과 공부에 매달려 책이나 뮤지컬을 보는 시간도 줄어들고, 사색적이고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네가 점점 말수를 잃어 가는 것도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방학 동안 학교 보충과목을 듣지 않고 인도로 가겠다고 해서 나는 도리어 기뻤다.

서원아, 여행을 하는 동안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 보기 바란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인도에 가면 무심하게 걷고, 무심하게 먹고 자고 해보렴. 산이나 강이나 시장이나 길에서 보이는 그대로,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렴. 세상의 과제들이 던져 준 무거운 억압에서 벗어난 네 몸과 영혼이 빈둥빈둥 쉬도록 내버려두려무나. 이상한 조언이지만 인간에게는 조금 게으른 시간도 필요하단다. 때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그래, 어서 와!

이모가
글쓴이 김다은씨는 이화여대 대학원 졸업 후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자 창작집 《이상한 연애편지》, 《러브버그》, 《위험한 상상》 등을 펴낸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편지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작가들의 편지를 모아 《작가들의 연애편지》, 《작가들의 우정편지》를 엮어 냈습니다.
  • 200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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