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배준성

그림 그리기의 속성을 밝히는 게 내 작업

배준성
1967년 광주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1996년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0여 회의 개인전. 모스크바 사진 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서울시립미술관, ARCO 아트페어, 아트 바젤, 프리즈 아트 페어, 아모리쇼 등 주요 미술기관 및 행사의 단체전 참여. 1995년 ‘95 정경자 미술문화재단 창작 지원 신인예술가상 2000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화관광부 주관.
2007년 11월, 서울 사간동 현대갤러리의 배준성 전시 에서는 독특한 광경이 펼쳐졌다. 7개국 12곳의 뮤지엄에서 찍어 온 사진을 기초로 그린 그의 그림에는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명화를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그려져 있었다. 언뜻 사진처럼 보이는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 그림 속 관람객들이 보고 있는 그림 중에는 배준성의 기존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결국 그의 전시 오프닝 행사에 모여든 사람들이 보는 것은 ‘세계 유명 미술관에 걸려 있는 배준성의 작품을 감상하는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모습’이다.

늘 그래 왔듯이 그의 전시는 언제나 화제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전시 작품은 모두 솔드 아웃되었고, 새로운 주문작이 밀려들었다. 배준성은 사진과 회화를 교묘히 결합시킨 작품으로, 최근 한국미술의 열기 속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연희동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는 사진관련 도구와 새로 시작한 유화 작품들이 함께 있었다. 갤러리처럼 흰 벽으로 처리된 그의 작업실은 장르가 혼합되고 새롭게 태어나는 공간이었다. 밀려드는 전시 제안만큼 세간의 관심과 언론의 인터뷰도 쇄도해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스타 작가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정작 작품에 대한 관심에서 비껴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될 정도였다.

그의 이름이 미술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96년부터 발표한 ‘비닐 작업’때문이었다. 서양 명화에서 차용해 한국인 모델을 사진으로 찍은 후 그 위에 투명한 비닐을 덮고 그 비닐 위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작업이다. 투명한 비닐을 들춰 보면, 누드인 모델의 몸이 드러나는 시리즈였다. 이 작품들을 배준성은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s)’이라 명명했다. 2개 혹은 3개의 이미지가 겹쳐져 보는 각도에 따라서 옷을 입고 있는 상태로도 보이고 누드로도 보이는 렌티큘러 작품은 비닐을 들춰 보는 수공업적인 단계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이다. 비닐을 들춰 보거나 각도를 바꾸어서 보면 누드가 나타나 그의 작품에는 “관객들의 관음증을 충족시킨다”는 말이 따라 붙었다.

the Costume of Painter - Museum L, new still life with bread, 2007, Oil on canvas, lenticular, 193.9X259.1cm
“그게 전부가 아닌데, 거기까지만 이야기하는 것이 늘 아쉬웠습니다.”

대중의 이런 오해가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사실 배준성은 이보다 더 근원적인 ‘그림 그리기와 감상의 과정’이라는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the Costume of Painter - Museum GM, Bourguereau green scarf ds, 2007, Oil on canvas, lenticular, 130.3X193.9cm
배준성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어머니와 친분이 있었던 조각가 정광호 선생의 홍대 앞 화실을 방문했었는데, 정광호 선생이 한번 그려 보라고 했다. 그의 그림을 본 정광호 선생이 그림을 권유했던 것.

“그림을 시작할 때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보다는 좋은 그림이 무엇인지가 더 궁금했어요. 그림의 본질은 결국 모르더라도 그림의 속성을 밝혀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밝혀 보자, 라고 생각했지요.”

the Costume of Painter - Museum H, family js, 2007, Oil on canvas, lenticular, 181.8X227.3cm

그림과 그림을 중첩시키며 다층적인 의미 만들어 내

고등학교 때부터 그린 그림들과 이후 그린 그림들을 중첩해 보면서 자신의 그림이 그린 발전과정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다른 작가들의 그림들과 중첩해 보았다. 비닐은 이러한 중첩을 표현하기 적당한 소재였다.

호기심은 늘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베르메르, 앵그르, 사전트, 워터 하우스 등 작가들의 원화를 보면서 인물들이 입고 있는 의복의 질감을 완벽하게 표현하려 했던 화가들의 노력에 감탄하였다. 그 감탄 뒤에 그가 본 것은 의복이라는 것에 담겨 있는 시대적 특성이기도 했다. 그런데 명화가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주는 것은 시대적인 특성의 표현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제목은 ‘모델의 옷’이 아니라 ‘화가의 옷’이었다. 저 유명한 ‘진주귀고리의 소녀’를 앞에 두고 있는 화가의 뒷모습은 베르메르의 다른 그림 ‘회화의 알레고리’에서 차용한 베르메르 자신의 뒷모습이기도 하다. 배준성의 작품에서는 베르메르가 여자 모델로 바뀌어 있으며, 보는 각도에 따라서 아름다운 누드로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렌티큘러’라는 최신의 기법으로 만들었다. 렌티큘러는 입체사진을 만드는 기법으로, 평면적인 이미지를 3차원적 영상물로 제작함으로써 평면적인 인쇄기술의 한계를 극복한 최첨단 입체물이다.

the Costume of Painter - Museum K, Vermeer flower, milk, 2007, Oil on canvas, lenticular, 193.9X259.1cm
모델을 사진으로 찍고 비닐 위에 원작의 옷만을 따로 떼어 내 그리면서 그는 거장들이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추체험한다. 그의 작품은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이 여러 겹 쌓여 있는 중층적인 공간이다. 많은 관객들을 매료시킨 2007년 캔버스 작업인 <뮤지엄 The Museum> 시리즈는 배준성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렌티큘러가 사진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것이라면, 다시 붓을 든 캔버스 작업은 ‘그림의 과정’을 밝히고 싶다는 그의 생각을 더욱 구체화한 것이다.

the Costume of Painter - Museum H, W.house boat ds, 2007, Oil on canvas, lenticular, 227.3X181.8cm
세계 유명 미술관을 찍은 사진을 기초로 한 작업인데, 이 중에는 배준성 본인이 찍은 사진도 있고, 그를 아끼는 컬렉터들이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찍어 보내 준 사진들도 있다. 아마 그의 컬렉터들은 배준성의 작품을 통해 서양 명화를 감상하는 새로운 코드를 발견한 것 같기도 하다. 그가 화면에 담은 작품은 재미있다. 모나리자 앞에서 아수라장을 이루며 사진을 찍는 열혈 관객들이 전면에 있다. 그런데 그들의 머리 위에 렌티큘러로 제작한 배준성의 작품이 함께 있다. 또 다른 그림 속에는 한 여성이 미국화가 사전트의 사진과 사전트의 작품인 <마담 X>가 합성된 렌티큘러 작품을 보고 있다. <마담 X> 속에는 모델인 한국인 미아의 누드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에 걸려 있는데, 배준성의 작품 속에서는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옮겨 와 있다. 작품의 측면에서 보면, 사전트-사전트의 그림 <마담 X>- 한국인 미아라는 맥락이 있다. 또 작품의 제작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배준성의 사전트 작품 감상 - 비닐 작업 - 렌티큘러 - 유화 작업이라는 맥락이,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메트로폴리탄(미국) - 에르미타주(러시아) - 현대갤러리(한국)라는 매우 중층적인 맥락이 깔려 있다. 이런 층층이 겹쳐 있는 의미를 좀 더 파고들어 가면서 나는 글로벌한 시대의 작가의 포부를 보았다.

the Costume of Painter-A.Pierre Cot 071003, 2007, Oil on Vinyl, Vinyl on Photograph, 215x154cm
그의 작품 속에서 서양미술 속 미끈한 미녀들의 한 꺼풀을 벗겨 내면, 작은 체구의 동양여인이 등장했다.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자신의 이런 작품이 걸려 전 세계 관람객들이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 작품을 다시 한국의 관람객들이 감상한다. 글로벌한 시대에 여전히 문화에 있어서는 패권을 쥐고 있는 서양미술에 대한 야심찬 도전으로 읽어 내는 것은 과도한 감상일까?

“중국 작가들은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힘을 받지요. 그러나 한국인들은 스스로 일을 저질러야 한국인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예술은 각개전투지요. 각인에 의한 각인들의 전투라는 기본 코드가 있습니다. 미술은 누군가 본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차별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야심찬 포부와 함께 2008년 그의 일정은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전 세계 미술시장을 향하고 있다. 2008년 봄에는 싱가포르 미술관 전시와 독일의 폰 테어 방크 전시, 가을에는 파리의 팔레 드 도쿄 전시 등 빼곡한 해외 전시 일정이 잡혀 있다.

사진 : 성종윤
  • 2008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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