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 시인 유안진

엄마라는 말뜻은 잔소리란다

사랑하는 딸 문연(紋廷)아! 이렇게 공개적으로 편지를 쓰려니 쑥스럽구나. 한집에 살며 늘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무슨 편지냐고 너도 계면쩍어할 테니 주책 부렸다 싶기도 해. 그러나 외출이나 여행 때 남기던 메모와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 물론 네가 싫어하는 또 잔소리가 될까 걱정도 되지만.

나는 내 엄마, 너의 외할머니로부터 긴 편지를 자주 받으며 컸지. 눈 감으면 코 베인다는 서울로 어린 딸을 혼자 보낸 어머니는 자나 깨나 걱정이셨고, 그땐 하숙집이나 자취집에 전화가 없기도 했고, 있어도 장거리 전화요금에다 주인댁에 미안해서 쉽게 전화하실 수도 없었기 때문이지만, 외할머니는 내게 편지 쓰시는 즐거움을 더 누리셨던 것 같았지. “야해야 보아라!”로 시작되는 편지는 늘 그 말씀이 그 말씀이었지만, 어머니 사랑이 그 깊이대로 전해져 편지 받은 며칠은 마음이 든든했지. 끼니 거르지 말고, 생일날 국수 사 먹고, 기도 열심히 하고, 차 조심, 길 조심, 남학생 조심 등등이었지만, 어머니의 기도의 힘이 전해지곤 하여 엄마란 자식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란 걸 그때 알았지. 내가 엄마가 되어 보니 역시 엄마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기도이구나 싶어. 네 오빠와 너를 낳았을 때 참으로 신이 계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너무 감격스럽고 기뻐서 신께 무릎을 꿇고 감사할 수밖에 없었어.

기쁨아! 우리가 널 ‘기쁨’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런 감격 체험에서지. 무엇보다 너는 덤으로 자라 주었어. “엄마, 오늘 학교 안 가?” 라고 물어 그렇다고 하면, 옆집에 가서 “우리 엄마 오늘 학교 안 간다!” “나는 엄마하고 슈퍼 간다!”고 자랑하고 다녀 정말 미안했지. 학교 어머니회가 있을 때마다 선생님께 미리 “우리 엄마 못 와요”라고 말해 두고, 다른 엄마들이 우산을 들고 학교에 찾아오는 비 오는 날, 선생님이 물으시면 “울 엄마 못 와요”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들을 때마다 얼마나 미안하던지.

이젠 다 자라 작업에 몰두하는 너를 보면 정말 행복해. 그러면서도 작품에 쓴다며 헌 물건을 모아 둬 집안이 어지럽다고, 식탁에서 골고루 먹지 않는다고, 네가 좋아하는 걸 만들어 놓았는데 배부르다며 먹지 않는다고 나도 모르게 잔소리하게 되지. 엄마라는 말뜻이 잔소리여서 그런가 봐. 네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네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야 할 텐데 하고. 그림과 결혼이 다 중요한데 그 둘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까 또 걱정이고. 네 안목을 믿으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얼른 알려줘. 네가 행복하면 우린 무조건 행복할 테니까. 아기 적 식탁에 기어 올라가 총각김치를 보고 “바나나김치 먹자!”던 네가 시인이 될 줄 알았는데, 화가가 됐구나. 시로 괴로워하는 내가 왜 창작의 고통을 모르겠니? 인생의 깊이와 성숙에서 작품이 나오는 거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

늘 너를 믿어. 작품에 임하는 너의 재능과 열정, 모두를. 어릴 때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자랐으니 앞으로 작품도 잘 해낼 거야. 네가 이것저것 실험하고 탐구하면서 작품생활을 하는데 내가 도움도 못 되어 미안해. 오히려 네가 읽어 보라고 건네 준 네 전공 교재와 잡지들이 내가 시를 쓰는 데 도움이 되었어. 네 작업실을 보고 싶은데, 못 오게 하는 뜻을 잘 알아. 그러나 네 전공이 내 창작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나의 詩도 네 그림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너는 엄마 작품은 물론 시집들을 안 읽어서 불만이야. 매체만 다를 뿐 시와 그림은 같은 예술이고 전혀 엉뚱한 사물이나 사건들을 의미 있게 연결시키는 상상력을 서로 자극해 준다고 생각해.

시집 좀 읽으라면 또 잔소리라 하겠지? 혹 내가 안 보는 데서 읽는 게 아니니? 우리 둘 다 보이는 것들 너머 안 보이는 세계를 보아 내는 일을 하잖니? 너는 그림으로, 나는 시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니까 얘기를 나누면 분명 도움 될 거야. 안 보이는 세계를 자기만의 눈으로 독특하게 보아 내고 독특하게 그려 내고 써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마는, 난 네가 내 작품을 읽고 촌평도 해주면 고맙겠어. 나 같은 문외한의 언급도 네 작품에 도움 될 것 같고. 그림과 시는 인접 예술이고, 畵風과 詩史는 줄곧 함께해 왔지. 시인 화가가 함께하는 시화전도 있잖아?

작업을 위해 휴학을 한 이번 학기가 네게 많은 도움이 되길 빌어. 네가 다림질이나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해놓을 때마다 “내 딸이 내 손”이란 옛말처럼 고맙지만 자주 안 해도 괜찮아. 가뜩이나 작업하느라 힘들 텐데 네 손이 거칠어질까 봐 그래. 작품이 안 될 때는 엉뚱한 것을 해봐. 나도 그런 때 딴 일을 하지. 기도하는 사람과 잔소리의 뜻을 가진 엄마가 사랑하는 딸에게 처음으로 썼다. 뻔한 얘기 또 했지? 한번 읽고 웃어 버려!
글쓴이 유안진씨는 1965년 <현대문학>으로 시단에 등단, 첫 시집 《달하》를 비롯해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다보탑을 줍다》 등 다수의 시집과 다수의 시선집 및 산문집을 냈다. 정지용문학상 ,월탄문학상, 소월문학상 특별상, 펜 문학상, 간행물 윤리위원회상 수상. 서울대 사범대 및 동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했고,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오랫동안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 200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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