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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남경민

위대한 선배 작가들에 대한 오마주

남경민
1969년생. 덕성여대 및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현재 동 대학 미술대학 서양화과 강사. 1999년부터 6회의 개인전과 20여 회 주요 단체전 참여. 1996년 대학미술대전 동상 수상. 2006년 송은미술대상전 우수상 수상. 현재 영은미술관 경안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활동.
참 오랜만이었다, 커다란 창밖으로 투명하게 비가 내리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은. 갓 볶은 커피의 부드러운 향, 영화 <그녀에게>의 O.S.T 음악, 인터뷰 중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분위기에 빨려 들어갔다. 일상의 남루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이곳은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에 위치한 영은미술관 창작스튜디오의 화가 남경민의 작업실.

한 달여 간의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그녀는 새로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미완성이지만, 지극히 충만함을 주는 작품이었다. 100호 크기의 네 폭 연작인 이 작품은 민트, 연보라, 연한 핑크색의 화사한 색들이 이어지며 눈을 편하게 해주었다. 미술사 책들로 빼곡한 서고 위에 중세미술부터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등 현대미술까지 미술사의 중요한 작품들이 걸려 있는 실내풍경이었다. 그 실내풍경 한가운데 춤추는 나비떼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솟구쳐 오르듯 군무를 추는 나비들은 그녀의 분신으로, 그녀가 동경하는 예술가들의 그림 앞을 날아다니며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나비는 오랜 기억 속 낡은 학교의 복도에도 날아다닌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사라진 텅 빈 복도를 채우고 있는 것은 따뜻한 빛이다. 쓸쓸한 듯한 그 기억에는 온기가 느껴진다. 학교 다닐 적 선생님들은 그의 가정 통신문에 “말이 없고, 조용하며, 착합니다” 라고 적었다. 그 조용한 소녀는 마음이라는 가장 큰 영토를 항해하는 화가가 되었다.

실내풍경 4 _ Oil on Canvas, 194x118cm, 2002.

광고회사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대학원에서 회화 전공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남경민은 광고회사 디자이너로 잠시 일했다. 그러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해 회화를 공부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원을 졸업할 당시에는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오히려 미학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원 졸업전시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은근슬쩍 작업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5년 반 동안 혼자 작업을 했다. 어떤 큐레이터에게 그 그림들을 보여주자 “부르주아적인 그림”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설치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민중미술의 여파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2000년 초에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은 자기와의 싸움이죠. 자기가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5개의 병이 있는 실내풍경 _ Oil on Canvas, 162x131cm, 2000.
자기 자신에 골몰할 수밖에 없던 시간에 나온 그림이 나비 그림이다. 그는 나비가 되어 화면을 날아다니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충분히 이해 받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나비 그림에 이어 화가들의 작업실 시리즈를 그렸다.

“작업실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지요. 어느 날 내 작업실을 보니 나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고흐의 작업실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상상력에 의지해서 그녀는 고흐의 작업실과 세잔의 작업실을 그렸다. 그녀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화가의 아틀리에 시리즈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서둘러 그림을 발표하지 않았다. 차곡차곡 쌓아 둔 작품을 2005년 대안 공간인 브레인 팩토리와 스톤앤워터에서 동시에 발표하였다.

마티스, N과 세잔느에 대해 논하다 _ Oil on Canvas, 194x260cm, 2005.
이 그림들은 평단과 화랑가의 주목을 받았다. 필자가 처음 본 그녀의 작품은 현대갤러리의 윈도우 갤러리에서 본 <마티스, N과 세잔느에 대해 논하다>였다. 젊고 신선하고, 그림에서 청순한 향기가 나는 듯 잊히지 않았다. 시작하자 봇물이 터진 듯했다. 2006년 겨울에는 이화익갤러리에서 성공적인 개인전을 가졌고, 2008년 현대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잡혀 있다. 꼼꼼하고 느린 그림이라 주변에서 원하는 만큼 많이 그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 유명 화가들의 도록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작업실. 그 한 귀퉁이에는 ‘섬세함과 작업의 집요함’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이보다 더 그녀의 작업을 잘 설명하는 말을 찾을 수 없을 듯싶다.

고흐의 방 2 _ Oil on Canvas, 80x116.5cm, 2006.
“화가들의 삶에 말을 걸고 싶었어요”

화가들의 작업실 시리즈는 그녀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으로 돌아가 그림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회화의 알레고리>를 그리고 있는 17세기 화가 베르메르의 방, 그 유명한 <텀벙> 시리즈를 그린 호크니의 작업실, 로댕의 키스와 함께 있는 화가 모네의 방 등 중요한 작가들의 그림들이 그녀의 그림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모네 방의 창밖으로는 모네가 생전에 좋아했던 일본식 다리가 있는 수련이 핀 연못이 실내로 밀려들 듯이 가까이 보이는데, 이것 역시 모네가 그린 그림의 일부이다. 작가의 그림을 그들의 작업 환경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대한 회화의 선배들에게 바치는 그녀의 오마주이다.

모네와 N 빛과 색에 대해 이야기하다 _ Oil on Canvas, 224x145cm, 2006.
그녀가 그린 초현실적인 상상의 공간의 주인공은 거울, 촛불, 유리병, 해골, 모래시계 같은 사물들이다. 이 사물들은 회화의 황금시대였던 17세기 서양미술에 흔히 등장했던 것인데, 이것들에 대해 그녀는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바 욕망을 비추어 준다. 평생을 육체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했던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 작업실의 거울은 타고 다니던 휠체어 대신 평범한 화가의 작업용 의자와 새가 날아간 새장을 비춘다.

“모래시계는 지금이 몇 시인지 알려 주지 못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환기시키잖아요? 모래시계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시간이 아닌 이전 시대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도 모르죠.”

두 개의 새장 _ Oil on Canvas, 255x80cm, 2005.
위대한 회화의 시대를 그녀는 꿈꾸고 있나 보다.

“‘화가에게는 일요일이 없다’라고 피카소가 말했어요. 화가에게는 모든 날이 휴일일 수 있지만, 일반인과 같은 휴식이란 없어요. 그림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으니까요.”

두 개의 의자 _ Oil on Canvas, 80.5x100cm, 2004~05.
요즘 그림을 곧 돈으로 생각하는 험악한 풍조가 기세등등하게 저 창밖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남경민의 작업실은 끝도 없는 미술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무풍지대이다. 그녀의 그림처럼 조용하고 섬세한 무풍지대!

사진 : 이창주
  • 200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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