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하성란님은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풀》로 등단, 《루빈의 술잔》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웨하스》 등 소설집과 《삿뽀르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등 장편소설을 출간했습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묘사’로 주목받으며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수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딸에게 전하는 말 | 한 번쯤 우산은 두고 가렴

글쓴이 하성란님은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풀》로 등단, 《루빈의 술잔》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웨하스》 등 소설집과 《삿뽀르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등 장편소설을 출간했습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묘사’로 주목받으며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수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던 날, 우산을 들고 가지 않은 네 생각이 났어. 네가 초등학교 1학년 때던가, 일 때문에 한 발 늦게 학교에 갔다가 비를 맞고 오던 너와 마주쳤었지. 넌 실내화도 갈아 신지 않은 채 이제나저제나 엄말 기다렸다고 했어. 함께 서있던 아이들이 하나 둘 제 엄마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고 네 작은 가슴에 이런저런 불안감들이 스쳐갔을 거야. 넌 한 번도 엄마가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했어. 그날 우린 학교와 집 중간쯤에 대치하듯 서있었지. 넌 윗도리에 달린 후드를 잔뜩 당겨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조그만 눈을 홉뜨고 날 노려봤지. “엄마 미워! 다른 엄만 다 왔단 말이야!” 그때 너의 그 표정이 너무도 우습고 또 마음이 아파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신 비를 맞게 하지 않겠다, 가슴에 담아 두었단다.

잠든 아기를 내려다보면서 한동안 망설였어. 아기가 깨어 울면 어쩌나, 그러다 우산을 챙겨 들고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어. 하필 네 중학교 입학과 출산이 맞물리면서 초등학교 졸업식도 중학교 입학식에도 엄만 가볼 수가 없었지.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누워 있는데 네가 갓 산 교복을 보여주려 들렀었지. 짜잔, 분홍색 코트를 들추자 그 속에 너무도 낯선 교복을 입은 네가 숨어 있었어. 세상에, 언제 저렇게 키가 큰 걸까, 허린 언제 저렇게 잘룩해졌을까. 대견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창문이 열린 듯 찬 바람이 들이닥쳤지. 엄마들은 제 딸이 크면 그렇게 추워진단다. 첫 교복을 맞추던 때가 생각났어. 할머니는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맞을 교복을 고르려고 교복사 주인에게 자꾸 더 큰 사이즈의 옷을 달라고 주문했어. 나중엔 곁에 있던 비닐 종이를 둘둘 말아 가슴께에 집어넣기도 했지. 네 교복은 내 손으로 골라 주고 싶었는데. 이모가 골라 준 교복은 네 마른 몸에 너무도 딱 맞는 교복이었어. 나는 괜히 너무 작은 거 아냐, 퉁명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요즘 누가 교복 하나로 3년을 나겠니?

출산 후 외출은 처음이라 오랫동안 걷지 않던 다리가 기름칠이 덜 된 듯 삐걱거렸어. 두 다리보다 마음이 몇 발짝은 앞서 자꾸 뒤뚱거렸지. 너희 학교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이 비를 쫄딱 맞고 걸어오더라. 너인 줄 알고 성큼 다가섰는데 넌 아니었어. 두 여학생이 비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낄낄 웃으면서 지나쳤어. 우산 한 개 밑에 네 명이 머리만 넣은 채로 지나가기도 했지.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거렸어. 교복은 또 다른 교복들과 뒤섞였어. 가뜩이나 똑같은 모양의 교복 때문에 이 학생이 너 같고 저 학생도 너 같은데 다른 학교 학생까지 뒤섞이니 정신이 다 없더구나.

교문이 가까워오자 터진 자루에서 쏟아지는 콩알처럼 와르르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어. 그제서야 엄마는 내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 십만 명이 군집한 여의도 광장이라 해도 넌 단번에 찾아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었는데 말이야. 엄만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다가 너에게 큰 상처를 줬는지도 몰라. 1학년 1반 교실을 물어물어 올라가 보니 교실 문은 잠겨 있었어. 어느 줄 어느 자리에 네가 앉아 공부하는 걸까. 유심히 바라볼 시간도 없었어. 부리나케 뛰어나와 비를 맞고 걸어가는 아이들 틈에서 널 찾았지. 그때쯤 넌 이미 친구와 비를 맞고 뛰어와 집에 도착해 있었다고 했어. 교문 앞에서 널 기다리다 널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데, 다시는 비를 맞게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엄말 그렇게 못 믿어? 조금만 기다렸으면 만났을 거 아냐?” 화를 내는 내게 넌 애 낳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밖에 나왔냐며 할머니처럼 이야기했지.

내 딸 잘 자라 주어 너무 고맙다. 어느 날은 너무도 훌쩍 자라 내 딸은 어디 가고 그애 언니가 와 있는 듯 낯설 때도 있지. 언젠간 엄마손이 필요치 않은 날이 올 거고 더 이상 네게 우산을 챙겨다 줄 일도 없어질 테지. 지금처럼 사진 박듯 엄마 얼굴 여기저기를 들여다볼 겨를도 없어질 테지. 넌 조금씩 집 밖으로 세상 밖으로 발을 넓혀 가겠지. 머리로는 다 준비하고 있었는데도 네가 내게서 한 뼘쯤 멀어질 때마다 서운해지네. 준비성 없다고 투덜대지 않을 테니 한 번쯤 우산을 두고 가렴. 기꺼이 우산을 들고 뛰어갈게. 수많은 아이들 중에 네가 내 딸로 와준 것에 너무도 감사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하다. 사랑한다.
  • 2007년 09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910

201910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10

event
event 신청하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30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