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전하는 말 | 소설가 안정효

로마의 수녀 소근이에게

어머니, 아버지, 아내와 남편, 딸과 아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소중함을 잊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이번 호부터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가슴속에 담아 두고 못 다한 말을 쓴 ‘가족에게 전하는 말’을 연재합니다.

첫 편지는 소설 《하얀 전쟁》 《헐리우드키드의 생애》의 작가 안정효 씨가 쌍둥이 딸 중 동생인 소근 씨에게 보냈습니다. 서울대 인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해 화제가 됐던 소근 씨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수녀로, 현재 로마 교황청에서 성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낚시광으로 유명한 안정효 씨는 최근 자연과 삶에 관한 성찰을 담은 에세이집 《인생4계》를 펴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두 번째 봄이 마당에 왔다. 여느 해나 마찬가지로 보랏빛 라일락이 만발했고, 할머니가 심어 놓은 참나리 꽃이 담을 따라 여기저기 올라온다. 도라지와 토란은 할머니가 옮겨 심으며 돌보던 손길이 없어져서인지 작년에 사라지고는 이제 싹도 나지 않는다.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 병상에서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꽃들이 그러겠구나. 이 할망구 어딜 가서 우릴 돌봐주지 않느냐구….”

한 사람의 삶이 함께 거두어 가는 것들. 할머니는 아예 하나의 세대를 온몸에 감고 떠나셨단다.

할머니와 매주 목요일에 삼겹살 먹는 행사가 없어져 금년에는 채소를 심지 않고 고구마를 재배할까 해서 상추밭을 비워 두었더니, 지난 주일 엄마가 재빨리 갓과 쑥갓과 상추를 시장에서 사다가 심어 버렸더구나. 서오릉 화원에 부탁하여 겨우내 싹을 틔운 두 개의 고구마가 난처한 꼴로 신발장 앞에 아직도 놓여 기다리고.

마당 제일 안쪽 감나무 옆에서 자라던 백목련 생각나니? 꽃잎이 지면 마당이 지저분해진다고 할머니가 그것도 언젠가 내가 낚시 간 사이에 다른 나무로 바꿔 심었단다. 그런데 새 나무에는 봄마다 벚꽃이 만발하면서도 왜 통 버찌는 매달리지 않을까 궁금했었는데, 재작년에 파출부 아줌마가 매실을 물통으로 하나 가득 마당에서 쓸어 담아 술을 담갔지. 매실을 벚나무로 알고 몇 해를 보낸 나를 한심하다고 웃던 할머니의 얼굴은 이제 마당에 없다. 포도나무와 덩굴장미 따위가 할머니의 손길이 끊어진 넝쿨만 자꾸 몸을 뒤틀며 마당을 덮는다. 영산홍과 작약도 할머니를 찾아 올라오고.

모과나무에 지난 20년 만에 가장 많은 꽃이 분홍 빛깔로 피었단다. 내 방에서는 지금도 창문으로 하늘에 뜬 매화처럼 모과꽃이 어른거린다.

봄과 가을이 없어지고 금년 여름은 무척 더우리라고 하는데, 로마에서는 또 수돗물 때문에 금년에도 고생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네 얼굴을 본 지도 2년인가 3년인가 얼른 계산도 안 된다만, 그나마 미란이가 한국에 와서 멀리서나마 살아 기분이 덜 황량하다. 행사 만들기 좋아하는 작은고모가 주말 모임을 자주 개최하는 덕택이지. 네가 이 편지 받을 무렵이면 고모와 고모부가 그곳에서 널 만나 같이 지내겠구나. 수녀의 가방까지 털어 대는 로마의 집시 소매치기에 대해서는 내가 경고해 두었단다.

내년 2월쯤 네가 휴가를 나온다는 소식 들었다. 그러면 정말 오래간만에 네 식구가 모두 서오릉 돼지갈비 집에 가겠구나.

할머니가 계셨다면 정말로 즐거워하셨을 텐데, 봄이 지나가는 마당에서는 잔디밭에 앉아 풀을 뽑는 할머니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되었구나.


2007년 5월
수녀를 사랑하는 아빠가 서울에서
  • 2007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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