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정규 앨범 ‘상사몽’ 낸 정민아

가야금 들고 홍대클럽 무대 오르는 싱어송라이터

바람이 되어 만날까 구름 되어 만날까
강물이 되어 만날까 바다 되어 만날까

무엇이 되어 만날까 어찌 이별할까
겨울밤 한 홍대 클럽, 25현 개량 가야금을 퉁기면서 한 여인이 노래를 한다. 객석 몇몇 여성들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젊은 여인이 무슨 한이 있기에 저토록 사무치는 음색을 낼까? 슬픈 전설 같은 옛사랑이라도 있는 걸까?

최초의 가야금 싱어송라이터 정민아. 스물아홉의 이 여인은 젊음의 메카 홍대 클럽에서 직접 작사, 작곡, 편곡한 노래를 가야금 반주로 부르며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최근에는 소니 BMG에서 솔로 음반 ‘상사몽’을 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표제곡 ‘상사몽’은 황진이의 시조에 곡을 붙인 것. 정민아 씨를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났을 때 그 질문부터 했다. 그 절절한 목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거냐고.

“제 안의 한(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노래에서 한을 느낀다면 그건 듣는 사람의 한에서 나오는 것일 거예요. 자신의 기억 속에서 되새김질하는 거죠. 제 음악이 그걸 건드려 주는 것 같아요.”

겸손하면서도 발랄한 말투. 노래를 부를 때와는 영 딴판이다. 노래 부를 때 그의 음색은 텅 비어있다. 끓어오르는 격정과 한을 안으로 삭이고 초월한 한 여인이 텅 빈 사막을 걷고 있는 풍경. 듣는 사람들이 그가 흘리고 간 텅 빈 백지 위에 자신의 사연을 채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듣는 사람에 따라 천양지색을 띤다.

그는 투잡스 족이다. 낮에는 강남의 소액결제대행사에서 전화상담원을 하다, 밤이면 홍대 클럽 무대에 선다.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전화상담원을 하는데, 많을 때에는 하루 180통의 전화 통화를 한다. 목소리가 생명인 그로서는 치명적인 직업일 수도 있을 터. 정 씨는 “헤헤헤” 웃으며 “일이 재미있어요” 한다. “노래를 부를 때와 평상시 목소리가 많이 다르다”고 하자 “전화상담 할 때는 또 달라요” 하면서 시연을 해보인다.

“안녕하십니까? ○○○○○ 정민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깍듯하면서도 따뜻한 음색. 천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한 달 120만 원 월급으로 월세며, 생활비를 감당하자면 빠듯할 법도 한데 “한 달에 120만 원은 적은 게 아니에요. 초봉 70만 원부터 시작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요?”하며 또 까르르 웃는다.

정민아 씨는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 국악과에서 가야금을 전공했다. 국악고 시절부터 가야금 연주 실력이 탁월해 실기 1등생에게 주어지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협연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협연비 60만 원이 없어서 2등한테 기회가 넘어갔다.

“그 친구의 이름이 새겨진 포스터를 보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넉넉지 못한 형편 덕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아르바이트로 무대에 서다 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특히 홍대 클럽 무대는 제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가야금의 매력에 빠져

자취방도 홍대 앞에 얻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음악성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정규 음악 교육 한 번 받은 적 없지만 어떤 노래든 자연스럽게 화음을 넣을 정도로 ‘절대음감’을 가졌다. 소설가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넉넉한 생활 여건을 마련해 주지 못했지만, 그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예술에 대한 열망을 심어 주었다. 언니는 피아노, 오빠는 성악을 공부해 세 남매 모두 음악가가 되었다.

정 씨가 가야금을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어릴 때부터 한국 무용을 배우던 그는 무용학원에서 처음 가야금을 접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후 무용가의 꿈을 접은 대신 기타 학원에 다녔다. 줄을 퉁기면서 나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고, 3~4개월 만에 웬만한 재즈곡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실력이 됐다.

“너무 재미있어 엄마한테 ‘나 기타과 갈래’ 했죠. 아무래도 현악기가 저한테 맞았나 봐요. 피아노는 재미없었는데.”

중2 때 가야금을 다시 배우기 시작한 그는 가야금의 세계에 푹 빠졌다.

“국악이 너무 좋았어요. 가야금이 만들어 내는 끈적끈적하고 미묘한 음감이 어찌나 매력적이던지요. 국악은 하나의 음이라도 떨림과 흔들림에 따라 다양한 음색과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서양 악기와 달리 국악기는 하나하나가 모두 독주 악기가 되지요. 그만큼 악기 하나가 폭넓은 음악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예요.”

그는 대학 졸업과 함께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지기로 했다.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학비가 없어 휴학을 하고 경마장 매표 아르바이트, 영어 학습지 강사 등을 전전했다. 돈을 벌어서 복학하겠노라고 생각했지만, 5년이 지난 지금까지 학교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는 새 길을 개척했다.

안양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그곳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주인에게 이야기해 가야금을 들고 무대에 올라갔다. 그러다 박범훈 작곡의 ‘가야송’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더니 관객들의 반응이 확 달라졌다. 노래가 얼마나 흡인력이 있는지 깨달은 그는 ‘관객들에게 내가 만든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머릿속에 떠다니던 선율들을 붙잡아 오선지에 옮기고, 가사를 붙였다. 2004년 처음 자작곡을 만들었지만 대뜸 대중 앞에 나설 엄두가 안 나 싸이월드에 먼저 올렸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신선하다’ ‘오묘하다’ ‘아련하고 신비스럽다’ ‘한국식 재즈를 듣는 것 같다’는 평이 쏟아졌다.

홍대 클럽에 올린 첫 공연부터 성공적이었다. 전통 악기인 가야금 반주에 옛 정취가 느껴지는 가사,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오묘한 목소리. 독특한 개성을 지닌 최초의 가야금 싱어송라이터의 탄생이었다. 그는 코앞에서 관객과 호흡하는 클럽 공연이 좋다고 한다. 관객들의 반응이 숨소리까지 피부에 와 닿는다고.

이 여인의 꿈은 소박하다. 음반이 잘 팔려 음악만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 좀 더 많은 관객이 자신의 공연을 보러 오고, 그들이 자신의 음악으로 인해 위로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눈을 감고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인생의 비애를 알아 버려서, 그 비애를 텅 빈 웃음으로 승화시켜서가 아닐까.

사진 : 이창재
  • 2007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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