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과 중국 넘나들며 활동하는 무용가 백향주

내 춤에는 국경이 없다

“열한 살 때 김정일 위원장 앞에서 춤을 추었죠. 6000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춤을 추면서 ‘관객하고 호흡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때 평생 무용을 하기로, 내 몸과 내 이름을 걸고 독무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온 거죠.”
동아시아 대륙의 지붕 아래 나라와 민족과 이념을 초월해 유랑한 무용가가 있다. 백향주. 재일교포 3세인 그는 어려서부터 춤을 췄다. 일본과 평양을 오가며 무용을 배웠고, 중국 북경에서 무용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 예술종합학교에서 대학원을 마쳤으니 그의 춤에는 경계가 없다. 북한에서 최승희 춤을 전수받아‘돌아온 최승희’로 불리기도 한다. 긴 이력을 가진 그의 나이는 이제 서른둘. 백옥 같은 피부에 유난히 까만 눈동자, 가녀린 몸매를 가진 그는 우리말에 서툰 듯 간혹 더듬거렸다.

“어려서부터 퍽 밀도 있게 살았죠. 하지만 늘 고향 없는 유목인이랄까, 흐르는 섬 같은 존재였어요, 전. 20세기 동아시아의 대립의 역사가 제 속에 후유증처럼 남아있긴 하지만 제 춤에는 민족애나 투쟁정신 같은 건 없어요. 저는 화합을 꿈꿉니다.”

백씨는 두 살 때 무용을 시작했다.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으니 어언 30년째다. 조총련계 무용가였던 아버지에게 체계적인 춤 수업을 받았고 열두 살 때 북한의 엘리트 무용 교육 과정에 최연소로 합격, 정기적으로 평양을 오가며 수업을 받았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에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에서 전국무용콩쿠르에 나가 보라는 권유를 받자 그는 평양으로 향했다. 최승희의 양아들이자 만수대예술단의 안무가였던 김해천 선생에게 최승희 춤을 전수받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이 처음 저를 봤을 때‘야, 뭐 이런 당돌한 애가 있나’싶으셨대요. 웬만한 무용수들에게는 춤을 가르쳐 주지 않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계신 분이었는데, 갑자기 외국에서 어린 여자애가 찾아와 춤을 배우겠다고 하니 놀랄 만도 하죠. 선생님은 제가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춤을 잘 흡수한다고 하셨어요. 혼신을 다해 가르쳐 주셨죠.”


김해천 선생은 그에게 최승희의 독무 작품들을 오롯이 전수해 주었고, 결국 그는 북경에서 총 2만 명이 참가해 석 달 동안 치러진 전국무용콩쿠르에서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금메달을 받았다. 그리고 춤을 가르쳐 달라는 중국 대학의 요청으로 4~5년 가량 중국에 더 머물렀다.

“다른 나라 춤들도 각각 개성이 있지만 우리 춤은 특히 어렵고 즉흥성이 강합니다. 즉흥성이 강하다는 건 그만큼 예술성이 강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춤은 마음으로 추는 춤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쉽게 따라 하기가 어려워요.”

그는 춤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최승희 선생을 닮았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특히 춤을 출 때 발산하는 강렬한 눈빛이 그렇다. 그는 “실크로드 춤을 배우면서 눈 동작 레슨을 많이 받았다”며 “아마 최 선생님도 그랬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돌아온 최승희’는 과분한 찬사

그에겐 언제나 자신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최승희’라는 이름이 과분한 찬사인 동시에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춤을 배우고 한국에서 살고 있는 그의 춤은 남북한 어느 쪽 누구의 춤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최승희의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찾으려 한다.

“열한 살 때 김정일 위원장 앞에서 춤을 추었죠.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데 빛나는 샹들리에와 대리석, 푹신푹신한 빨간 주단이 지금도 기억나요. 6000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춤을 추면서 ‘관객하고 호흡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때 평생 무용을 하기로, 내 몸과 내 이름을 걸고 독무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온 거죠.”

1998년 그는 남북 화해의 무드를 타고 한국에서 첫 공연을 열어 최승희의 원작 여섯 점을 비롯해 열두 작품을 보여 주었다. 수십 년 동안 조총련으로 활동한 부모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에 입성한 것. 부모 세대와 달리 정치적 이념보다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그는 남이든 북이든 양쪽 다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근 10년 동안 같은 춤을 추다보니 더 이상 쌓이는 것 없이 점점 닫혀져 가는 느낌이었어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겠다,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뭔가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2003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 입학했다. 전통예술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정작 그가 원하던 ‘새로운 에너지’는 찾지 못했다. 지난 2006년 가을 동아시아춤 컴퍼니를 창립한 그는 그해 말 비보이와 함께 공연을 했다. 우리나라와 태국, 몽골 등 동아시아의 전통 춤을 바탕으로 그가 새로 창작한 춤사위에 웃통을 벗어젖힌 건장한 비보이들의 현란한 브레이킹이 어우러져 신명나는 춤판이 벌어졌다.

“제가 먼저 제의를 했어요. 일본에 있을 때는 비보이를 그저 젊은이들이 즐기는 춤 정도로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는 굉장히 발달되어 있더군요. 또 세계에서 인정받은 춤이니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사람들을 만나보니 굉장히 순수하고 재미있었어요. 처음 맞춰보고 나서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비보이들의 매력은 폭발성과 즉흥성.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춤을 추면서 같은 춤을 두 번 추는 건 지루하다고 여긴다. 그는 비보이들을 보며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찾던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동안 제가 너무 진지하게 무용을 대했던 것 같아요. 춤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정작 원초적인 춤의 즐거움을 잊어버린 거죠. 무용을 오래 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즐거워야 해요. 내가 흥이 나지 않으면 관객들의 눈에도 다 보이거든요.”

그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평생 무용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해왔던 작업에 그치지 않고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돌이켜보면 가혹한 도전의 길과 편안한 안주의 길 사이에서 그는 늘 도전을 택해왔다. “그는 이것이 나의 운명 같다”며 웃는다. 그의 두 살배기 딸도 그처럼 이제 막 걸음마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진 : 이규열
  • 2007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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