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한한인생| 바람처럼 세계를 떠도는 사나이 네덜란드人 마틴 메이어

네덜란드에서 22년, 미국에서 11년, 러시아에서 9년, 그리고 한국에서 6년째 살고 있는 마틴 메이어 씨.
네덜란드 사람들은 평균 신장이 세계 1위다. 그래서인지 네덜란드인 마틴 메이어 씨도 키가 188㎝나 됐다. 그러나 키를 빼고 그를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그 나라에서 22년을 살았지만, 그 후 미국에서 11년, 러시아에서 9년을 살다 한국에서 6년째 살고 있기 때문. 영락없는 코스모폴리탄인 그에게 국적(國籍)을 따지는 것은 쩨쩨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태를 묻은 곳은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의 남동쪽에 자리한 자이스트라는 작은 도시다. 고위 장교였던 아버지의 3남매 중 둘째인 그는 어려서부터 여행에 홀렸다. 다른 세상은 어떤지 궁금했고, 자유를 열망했다. 집에 요트가 있어 가족들과 함께 요트를 타고 유럽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그의 떠돌이 인생이 본격화된 것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80년의 일이다. 그해 여름 메이어 씨는 히치하이킹으로 네덜란드를 출발, 유럽과 아프리카가 마주 보는 카나리아 제도까지 흘러갔다.

매년 9~10월이면 카나리아 제도에는 태풍을 피하기 위해 수백 척의 요트들이 몰려든다. 그는 잉카와 마야 문명을 체험하기 위해 남미행(南美行) 요트를 찾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미행 요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미국행 요트에 몸을 의탁했다. 벨기에 중년 부부의 요트에 얹혀서 23일간의 긴 항해 끝에 미국에 도착했다.

당시의 대서양 횡단 항해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북위 22도 선으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항로를 택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기후도 온화하고 파도도 높지 않았다.

요트 뒤편에서 불어오는 순풍 덕에 항해는 무료할 정도로 순조로웠다. 바다에서 갓 건져올린 퍼득이는 생선으로 요리를 해서 식사하고, 어둠이 내리면 요트 갑판에 벌렁 누웠다. 하늘도 바다도 새까만데, 수많은 별들만 형형하게 빛났다. 우주 속 자신의 존재를 절실히 느낀 순간이었다.

유럽 귀퉁이의 작은 나라에서 성장한 그로서는 미국이란 나라의 거대한 ‘사이즈’에 매료됐다. 그 거대함이 그곳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나 생각했다. 기업 정신이나 자유로운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했던 그는 미국 뉴욕 주립대로 학사 편입해 전공인 과학과 함께 철학, 신학 등 인문학 분야까지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지역에 따라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 문화가 달라지는 것은 그 바탕에 있는 종교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뉴욕에서 공부하는 도중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여성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이 그의 역마살을 진정시켜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의 떠돌이 생활에 아내와 가족이라는 동반자가 생겼다.

그는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숲으로 둘러싸인 집에 살던 청년기에는 ‘자연의 세계’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해 과학을 공부했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가 관심의 대상이 됐다.

캘리포니아, 워싱턴, 오리건, 몬태나, 뉴저지 등 미국 전역을 돌며 생활하던 그의 삶에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란 단어들이 날아와 박히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의 호기심을 따라 ‘러시아’라는 또 다른 대륙에 닻을 내린 것은 1991년, 러시아가 개혁 개방으로 요동치고 있을 때였다. 국제교육재단에서 러시아로 파견된 그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고, 톨스토이 연구로 모스크바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할 때 아침마다 그의 코를 강렬하게 자극하는 지독한 냄새에 잠이 깼다. 극동의 코리아란 나라에서 온 한국 유학생들 방에서 나는 김치와 된장 냄새였다. 그와 그의 가족이 또다시 보따리를 꾸려 서울로 날아온 것은 2000년의 일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울릉도, 제주도, 경주 등 곳곳을 다니면서 한국만의 독특한 정(情)문화에 흠뻑 젖어들었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엄청난 파워를 실감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한국은 세계 4위, 3위, 아니 2위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 나라다. 반 동강이 난 몸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그 잠재력은 더욱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한국 전도사’ 역할을 했다.

마틴 메이어 씨가 최근에 펴낸 책 표지.
말로는 모자랐는지 최근 자신의 생각을 묶어 책을 냈다. 《마틴 씨, 한국이 그렇게도 좋아요?》라는 제목의 책을 영어판과 한국어판 두 가지로 냈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의 교육과 가족 제도, 문화와 관습 등을 조목조목 분석했다. 그냥 한국에 살면서 느낀 인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영어로 된 한국 관련 책 수십 권을 섭렵하며 연구해서 쓴 학구적인 책이다.

“한국인들이 저만 보면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거지요. 그들에게 ‘당신들이 갖고 있는 게 얼마나 훌륭한지 아느냐’고 일러주고 싶었어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 문화의 특질을 소개하고 싶어 영어판도 냈어요.”

특히 가족과 끈끈한 정을 중시하는 한국의 전통문화는 가족이 해체되는 서양인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본받고 싶은 것들’이란다. 한국인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며 전통을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을 볼 때 너무 안타까워 한국인들에게 고하는 ‘쓴소리’도 담았다. 그는 “요즘 젊은 부부들은 왜 그렇게 쉽게 이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한다.

마틴 씨의 가족. 부인(오른쪽)은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이고 막내(마틴 씨가 안고 있는 아기) 리암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서구의 문란한 성(性)문화에 혀를 끌끌 차면서 윗사람과 조상을 존중하는 한국의 유교문화를 찬양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세 살짜리 막내 리암까지 포함해 3남 1녀의 아버지인 그는 가족이야말로 사회 질서와 융합의 바탕이라고 강조한다.

한국의 교육제도도 서구 어느 나라보다 우수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 살고 있는 그는 맏딸 레네와 둘째 보비, 셋째 바시야를 모두 동네의 일반 초겵?고등학교에 보내고 있다. 그는 아이들 공부시킨다고 가족들을 모두 외국에 보내 놓고, 혼자 생활하는 한국의 기러기 아빠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 모두 한국 학교에서 즐겁게 생활하고 있고, 독서와 글쓰기, 음악을 좋아한다고 자랑한다. 고등학생 큰딸은 지난 여름 태국에 다녀왔다. ‘Service for Peace’ 프로그램의 일원으로 쓰나미 피해지역에서 복구 작업도 돕고 여행도 다녔다. 큰딸에 대해 그는 “나를 닮아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20대 초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부모가 “언제 올 거냐?”고 묻자 “글쎄요. 3~4년 후가 될지, 영원히 안 가게 될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한국에 정착해 대학과 학원의 강사로 영어를 가르쳐 온 그는 2006년 문을 여는 청심 국제중·고등학교의 윤리 선생님이 된다.

그에게 “한국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냐?”고 묻자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의 삶 자체가 ‘바람’이었으니 언제 또 한국을 뜨게 될는지….

그러나 요즘은 조금 흔들린다. 자꾸 나라를 옮겨 다니는 게 커 가는 애들에게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아들은 잠꼬대도 한국 말로 할 정도로 아이들 모두 한국에 익숙해졌다. 그가 이참에 한국에 주저앉을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
  • 200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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