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사람| 젊은 수도승 같던 박서보 선생

글 정미조
수원대 미술대 조형학부 조교수
몇 년 전 파리 4대학(옛 소르본 대학)의 블랑숑 교수로부터 한국 미술에 대한 특강을 의뢰받았다. 나는 화가이자 그림을 지도하는 교수이지 이론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거절했다. 하지만 블랑숑 교수는 편지와 함께 정식 특강 의뢰서를 내가 근무하는 대학으로 보냈다. 나는 다시 정중히 사양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그는 “파리 4대학에서 최초의 한국 미술 강의가 될 것”이라며 초청장을 보냈다.

프랑스 학문의 전당인 소르본 대학으로부터 특강 의뢰를 받았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하지만 한국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걱정부터 앞섰다. 고민 끝에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편지와 함께 1년의 준비 기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블랑숑 교수는 쾌히 승낙을 했고, 그때부터 나는 한국 미술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우선 큰 서점에서 그 분야의 책을 전부 구입해 살펴보니 내용들이 서로 비슷했다. 내용들을 간추려 보았으나 강의하기에는 미흡했다. 생각 끝에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 화가 몇 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작업 방법이나 작품세계를 직접 가서 보거나 듣기로 했다.

나는 준비한 카메라를 메고 1960년대 추상회화의 대부(代父)인 박서보 선생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그 분의 작업실은 겉모습이 마치 창문 없는 갤러리 같았고 지붕은 검정에 가까운 잿빛 줄무늬의 요철로 되어 있어 그의 작품을 연상시켰다.

부인의 안내로 화가를 기다리는 동안 작업실 의자에 앉아 화실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책상이 놓여 있는 한쪽 일부만 밖이 보이고 사방이 막혀 있었으며, 천장을 좁고 길게 터 놓았다. 공간은 높고 컸지만 아늑했다. 작업을 진행 중인 대작들이 벽에 기대 있거나 바닥에 뉘어 있었다.


그렇게 힘든 작업을 수십 년간…

잠시 후 칠순에 가까운 박서보 선생이 자신의 작품이 연상되는 가볍고 짙은 잿빛의 옷에 맨발로 나와 나를 반겨 주셨다. 커다란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그의 작품세계와 미술활동에 대한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선생은 처음부터 시종일관 똑같은 어조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네 시간 동안 얘기를 계속하셨다. 인터뷰 중에 나는 그의 화실 내부와 작업 중인 작품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놀라운 것은 선생의 작업 방식이었다. 큰 캔버스 전체에 작은 크기의 물에 젖은 한지를 일정한 간격으로 접힘이나 구김 없이 몇 겹을 잇대어 붙인다. 이것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굵은 연필심 같은 것으로 문질러 한지가 양 옆으로 밀리면서 골이 져서 수없이 줄이 생기게 한다. 그런 작업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에 10시간씩 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같은 화가인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 작업을 수십 년간 하셨다니…. 선생은 쓰러질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지칠 줄 모르고 얘기하셨는데, 그런 선생의 모습이 산중의 젊은 수도승을 연상시켰다.

오후 두 시가 지나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하니 선생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는 안 먹을수록 좋아요” 하며 사양하셨다. 선생은 작품 설명을 하다가 벽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것은 내 사후(死後)에 나의 납골 앞에 걸어 놓을 것인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칠보 기법으로 구워 만들었어요. 내 사진 옆에는 같은 기법으로 만든 나의 작품도 걸어 놓을 거예요”라고 말씀하셨다. 사후까지도 영원히 자신의 작품과 얼굴을 후대에도 보여 주려는 그의 열정은 내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또 책상 위에 높게 쌓아 놓은 줄이 가늘게 쳐진 흰 종이를 가리키며 “이것은 내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드로잉들인데, 목표는 몇천 장을 그리는 거예요” 하셨다.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선생을 뵙고 나니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 4대학의 특강 준비 덕분에 내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화가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도 그 총총한 눈빛과 낭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
글쓴이 정미조 님은 1972년 이화여대 서양화과 졸업 후 대중가수로 활동하다 프랑스로 유학, 파리 장식미술학교와 파리 7대학에서 회화 전공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수원대 미술대 조형학부 서양화과 조교수로 있다.
  • 200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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