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ing & Life| “매운 맛을 내려면 매운 맛을 가슴에 담아야죠”

밀레니엄 서울 힐튼호텔 레스토랑 ‘일 폰테’(Il Fonte)의 총주방장 아니타 비디니

사진 권용상
폭우가 그쳐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 화통하기로 유명한 이탈리안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유쾌했다. 밀레니엄 서울 힐튼호텔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일 폰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반갑게 인사를 하며 걸어 나오는 셰프(총주방장)는 여성이었다. 이탈리아인 아니타 비디니 씨. 한국의 특급호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최초의 여성 셰프로,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여성 셰프요? 저한텐 늘 붙어 다니는 꼬리표죠 뭐. 한국에 오기 전 19년 동안 중동지역에서 일을 했는데, 중동에서 5성 호텔 셰프까지 승진한 여성은 저밖에 없었어요. 언제나 남자들보다 두 배씩 일했어요. 남자들만큼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데 두 배의 힘이 들더라고요.”

그의 파란만장한 스토리와 함께 요리가 시작됐다. 오늘의 메뉴는 ‘건강식 도미요리’. 올리브 오일과 각종 허브, 신선한 야채들을 이용하는 전통적인 이탈리안 가정식이다. 새로 셰프가 된 그녀가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해 내보인 회심의 메뉴다.

“제 레시피(요리법)의 80% 이상은 이탈리아 보통 주부들의 요리법에서 얻은 거예요.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남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힌트를 얻는 게 훨씬 빨라요. 물론 제게 가장 훌륭한 스승은 어머니죠. 이 방식은 이탈리아 북동지방 레시피예요.”

그녀의 고향인 우디네는 알아주는 햄 생산지인 상다니엘레에서 가까운 곳이다. 그녀는 19년 전 이탈리아를 떠났지만, 세계를 떠돌며 ‘이탈리아의 맛’을 전파하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마누엘은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근무 중이다.

“이거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마누엘을 가졌을 때 내 나이 열아홉이었어요. 그러니까… 사고를 친 거지. 그러니 어떡해? 결혼을 했죠. 그러곤 사연이 길어요. 마누엘을 낳고 건설 일을 하는 남편을 따라 중동으로 갔고 이혼을 했죠. 생계 때문에 일을 시작했는데, 한 달 전까지 중동에 있었으니 반평생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죠.”

올해 마흔아홉인 그녀는 솔직하고 거침이 없다. 보통 사람 같으면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얘기를 거침없이 한다. 남편 따라 사우디 아라비아로 간 것이 19년 전. 나이지리아와 오만, 두바이를 옮겨 다니며 그는 ‘요리사’에서 ‘주방장’으로 변신했다. 중동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요리가 아니었다. 이혼 후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제너럴 일렉트릭(GE) 오만 지점에 취직했다. 그 회사 주방에서 청소, 설거지 등 허드렛일을 하다 요리사로 발탁된 것.

고등학교 졸업 후 무슨 일을 할지 몰라 방황하던 그녀에게 “너, 어렸을 때부터 요리 좋아했지 않니? 요리 한번 제대로 배워 봐”라고 권유했던 가족들의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졌다. 2년제 요리학교 졸업 후 장롱 속에 넣어 뒀던 조리사 자격증 덕분에 요리사로 새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서른셋, 아들 마누엘이 열세 살 때였다.

이탈리아인 가정이 대개 그렇지만, 그녀 집안의 요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유별났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파스타 종류만도 100가지가 넘는다는데 맛의 비밀은 집에서 만드는 치즈에 있단다. 데이터베이스가 풍부하니 세계 어느 지역에 가도 그곳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가정식과 현지 입맛이 결합된 그의 레시피가 인기를 끌면서 오만의 무스켓 인터내서널 호텔, 두바이 인터콘티넨탈 호텔 등으로 스카우트되어 갔다. 총주방장인 셰프가 된 것은 2000년 오만 알 부스탄 팰리스 호텔로 적을 옮기면서부터다.

지난 9월 초 그녀는 밀레니엄 서울 힐튼호텔에 스카우트돼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국행 제의를 받고 고민할 때 이탈리아에 있는 가족들이 “네가 가야 우리도 한국 구경 한번 해 보지”라며 종용했단다. 그래도 미심쩍어 일부러 한국에 와 사흘 정도 머물렀는데, 딱 마음에 들어 무조건 왔다고 한다.

“한국은 다 좋은데 딱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어요. 첫 출근 날 저는 평소대로 주방 식구들을 껴안고 키스해 주려 했어요. 그런데 다들 어색해하며 머뭇거리는 거예요. 그것만큼 내 애정을 표현하기 좋은 방법이 없는데, 대체 왜 안 되는 거예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도미는 그릴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올리브 오일과 소금 후추를 넣고 센 불, 중 불 순으로 볶아 낸 다양한 색의 피망과 마늘 슬라이스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준비 완료. 접시에 야채부터 깐 다음 도미를 올리고 페스토 소스를 뿌린다. 마지막 장식은 파슬리였다. 군침이 돌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요리는 내 사랑과 정성을 담아 내는 그릇이죠. 어떻게 보면 내 자신이기도 합니다. 손님이 매콤한 걸 요구한다고 쳐요. 마음속에 매콤한 느낌을 담고 요리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정말 마음이 맛에 녹아든다니까요.” ■
  • 200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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