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주가 만난 미술가

축광안료 작품들로 개인전 연 노상균 작가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며 변신하는 그림들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Light Lines_#2180102, acrylic and phosphorescent pigment on canvas, 137 x 137 cm, 2018
전시장 입구에 두꺼운 검은색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휘장을 들치고 들어가니 벽면을 꽉 채운 대형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호랑이 무늬 같기도 하고, 지형 같기도 하고, 우주공간 같기도 한 그림들에서 꿈틀꿈틀 역동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전시장의 조명은 1분마다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고, 이에 따라 그림들도 표변한다. 노란색이 붉은색으로, 붉은색이 푸른색으로, 푸른색이 녹색으로 시시각각 바뀐다. ‘이게 뭐지?’ 마술같이 변하는 색의 향연을 보면서 미지의 시공간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7월 21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6길 갤러리 시몬에서 열리고 있는 노상균 작가의 개인전 ‘가벼움의 빛’이다.

노상균 작가는 보통 스팽글이라고 부르는 시퀸(sequin)을 활용한 작품으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었다.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고, 한국뿐 아니라 미국,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일본 등에서 개인전을 열고, 세계 각국에서 열린 전시에 참여하면서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왔다.

그런데 작가는 한동안 새로운 작품을 내놓지 않았다. 지난해 청주 우민아트센터에서 회고전을 열긴 했지만, 작가는 이번 전시가 ‘7년 만의 개인전’이라고 강조했다. 시퀸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7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동안 전시 요청을 거절하고 그냥 놀았죠”라고 말했다. ‘놀았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다양한 재료와 방법을 실험하면서 새로운 작품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찾아낸 게 축광안료(蓄光顔料)였다. 축광안료는 햇빛이나 조명 같은 빛에너지를 흡수해서 축적했다 어두울 때 방출하는 성질을 가진 광물질로 만든 안료다.

“축광안료는 축적한 빛에너지를 10시간 정도까지 방출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햇빛 강도에 따라 작품의 색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변화 과정을 모두 보여드릴 수가 없어요. 관람객들은 보통 한 작품 앞에서 1분 이상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1분마다 조명을 켰다 껐다 하도록 설정했습니다.”


지문으로 새긴 우주

Installation view of Light of Lightness, Gallery Simon, 2018
1층 전시장 앞쪽 벽을 채우고 있는 259×388cm의 대형 작품 〈Particles(미립자들)〉에는 소용돌이무늬의 푸른색 구(球)가 겹쳐져 있다. 둥근 형태에 그려진 소용돌이무늬는 사실 작가와 지인 열네 명의 지문이라고 한다.

“우주의 최소 단위가 미립자라면 인간을 최소 단위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지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사람들의 지문을 그려 넣었다”고 설명한다. 조명이 꺼지면 둥근 형태나 무늬는 흐릿해지지만 화면 자체가 빛을 내뿜으면서 우주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지문의 소용돌이무늬는 소용돌이치는 우주의 이미지로 보이기도 한다.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먼지와 같은 인간 존재, 그중에서도 최소 단위가 다시 우주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작품이다.

1층 왼쪽 벽에 걸려있는 작품 〈Light Lines〉에는 푸른색 바탕 위에 노란색 줄무늬가 그려져 있다. 푸른색 바탕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산의 형태가 보인다.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지리산, 설악산, 인왕산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인왕산 근처 옥인동에서 살았기 때문에 인왕산은 그에게 특히 가깝게 느껴지는 산이다.

꿈틀거리는 호랑이의 등처럼 보이는 노란색 줄무늬는 그의 지문을 변형해서 그렸다고 한다. 불이 꺼지자 푸른색 바탕의 노란색 줄무늬는 초록색 바탕의 빨간색 줄무늬로 바뀐다. 노란색의 사막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불이 꺼지자 용암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붉은색으로 바뀐다. 우주의 생성 과정처럼 역동적으로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지문과 자연, 우주공간이 혼재된 작품은 새로운 시각 경험으로 끝없이 상상력을 확장한다. 그는 이번 작품 역시 ‘우리 시대의 회화는 어떠해야 할까?’라는 고민 가운데 나왔다고 설명했다.

“현대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영상이 쏟아지면서 ‘회화는 죽었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회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살아남을 수 있을까?’가 언제나 저의 숙제였습니다. ‘회화가 살아서 스스로 숨 쉬게 할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축광안료를 쓰기 시작했죠.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모니터 화면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원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 수시로 불을 켰다 껐다 확인하면서 작업했죠.”

시퀸에서 축광안료로 재료와 방법은 바뀌었지만, ‘새로운 회화에 대한 모색’, ‘인간과 우주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는 바뀌지 않았다. 노상균 작가는 1984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후 주로 회화작업을 하다 1990년 뉴욕 프랫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4~5년 작업하다 보니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해도 이게 세계적으로도 새로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편중되어 있었으니까요. 남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아야 내 위치를 알 수 있겠다고 생각해 뉴욕으로 갔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작가가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공한 작가뿐 아니라 무명의 작가들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볼 수 있었죠. 한국에서의 기반을 모두 버리고 밑바닥에서 새로 출발했습니다.”


새로운 회화 모색

Light Lines_#2180109, acrylic and phosphorescent pigment on canvas, 218 x 218 cm, 2018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다양한 재료로 물고기 그림을 그리던 그는 패션용품이 모여 있는 뉴욕 거리에서 시퀸을 발견하고 물고기 비늘을 떠올렸다. 그 뒤 무대의상에 많이 사용하는 시퀸이 작품의 주된 재료가 되었다. 그의 작품을 설명할 때 ‘물고기’는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수영장에서 죽을 뻔했던 경험이 있어요. 물에 빠진 나를 누군가 금방 건져냈으니 별일이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저는 그때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구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죠. 그때쯤일 거예요. 밤마다 한밤중에 눈을 떠 창호지 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그냥 쓸쓸하고 슬펐어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때 형성된 것 같아요.”

물에 빠진 경험 때문인지 그는 물고기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회화도 물속에 갇혀 헤엄치는 물고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게 헤엄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면 바로 죽어버리는 존재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이 아니라 시퀸을 빈틈없이 붙여나가면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작은 시퀸을 하나하나 눌러가면서 캔버스에 붙이는 작업은 엄청난 집중과 노동, 시간, 인내력이 필요해 선승(禪僧)이 도를 닦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 과정이 그는 ‘고통이자 즐거움이었다’라고 표현한다. 시퀸을 어떤 방식으로 붙이느냐에 따라 볼록하거나 오목한 입체감이 느껴지고, 끝없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붙여나간 시퀸 작품은 무한히 확장하는 우주 혹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느낌을 준다. 싸구려 재료였던 시퀸은 그의 손에 의해 영원하고 우주적인 이미지로 변신했다. 그는 합성수지로 만든 불상과 예수상, 마네킹에도 시퀸을 붙였다. 똑같은 크기의 자그마한 불상 머리를 젤리나 캔디같이 달콤한 색깔의 시퀸으로 뒤덮자 ‘귀엽고 앙증맞고 먹음직하기까지 한’ 불상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깨며 사람들에게 화두를 던졌다.

그의 작품은 한 가지 색으로 캔버스를 덮었다는 점에서 단색회화나 미니멀리즘,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적극 수용했다는 점에서 팝아트, 시각적 착시효과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옵티컬아트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작가는 “갈수록 머리로만 작품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죠”라고 말했다. 작가는 2005년, 붓의 손잡이에 시퀸을 붙인 작품 〈Endless Love〉로 그리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축광안료는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처음 사용했고, 2017년에는 자신의 지문 무늬에 시퀸을 붙인 작품 〈Self Portrait〉를 발표해 작품이 변화한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올해가 환갑인 작가는 “너무 늦기 전에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의 새 작업이 어떻게 다시 작품세계를 확장해나갈지 기대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8월 15일까지 열리는 ‘디지털 프롬나드’ 전시, 9월 16일까지 서울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진동: 한국과 미국 사이’ 전시에서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노상균

1958년 충남 논산 출생.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뉴욕 프랫대학원 회화과 졸업. 198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뉴욕 히긴스 홀 갤러리, 밀라노 지안 페라리 갤러리, 런던 로버트 샌델슨 갤러리, 뉴욕 브라이스 왈코비츠 갤러리, 바젤 메세바젤, 도쿄 E.S. 갤러리, 서울 금호미술관, 갤러리 현대, 갤러리 시몬,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내외 유명 갤러리에서 19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휴스턴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 2018년 08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