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혜원

삶과 죽음, 생명과 인연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다

눈 쌓인 자작나무 숲, 하얀 눈 위에 군데군데 빨간색 털실 뭉치가 놓여 있다. 누가 벗어두고 갔는지 검정 외투와 긴 부츠도 보인다. 주인 없는 옷과 구두가 처연한 슬픔을 자아내지만, 빨간색 털실 뭉치가 생명의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 사진으로 남아있는 박혜원 작가의 설치작품 〈한 낮 꿈〉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우선 미학적으로 이끌렸다. 군더더기 없이 하얀색과 빨간색, 검은색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장면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빨간색은 생명, 검은색은 죽음을 상징하는 듯했고, 잎을 모두 떨군 채 하얗고 호리호리한 몸으로 겨울을 버텨내고 있는 자작나무들이 우리 삶을 보여주는 듯해 안쓰럽게 느껴졌다. 방금 떠난 것 같은 검정 옷과 구두의 주인은 부재함으로써 더욱더 그 존재가 부각된다.

한 낮 꿈 / The Butterfly Dream, 2012
〈한 낮 꿈〉은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을 주제로 만든 작품이다. 나비가 되어 훨훨 나는 꿈을 꾼 후 ‘인간인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된 것인지’ 물었던 것처럼 사실은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이 혼재된 게 아닐까? 일상적인 물건들 사이에 모래시계, 엎어진 물잔, 해골 등을 함께 그려 넣어 삶의 유한함, 죽음을 상기시켰던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정물화가처럼 박혜원 작가도 삶과 죽음을 함께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죽음이 없다면 삶의 의미가 이토록 생생해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박혜원 작가의 작품은 빨간색 실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상징처럼 어디든 빨간색 실이 등장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수많은 끈으로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인간뿐 아니라 인간과 사물, 동물, 꿈, 현실, 영혼까지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끈, 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고, 붉은 실로 형상화했습니다. ‘운명의 실’에 관한 이야기는 동서양 전통에 모두 나타납니다. 중국의 경우 월하노인이 붉은 실로 남녀의 인연을 이어준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그리스신화에도 운명의 여신 세 자매가 등장합니다. 그중 클로토는 운명의 실을 뽑아내고, 라케시스는 인생의 길이를 정해 운명의 실을 감거나 짜고, 아트로포스는 운명의 실을 가위로 잘라 생명을 거두는 역할을 합니다.”


서울과 런던, 그리고 서산

메모리얼 데이 / Memorial Day, 2011
아직 마흔 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작가이지만 그는 일찍이 삶과 죽음, 보이지 않는 힘 등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해 왔다. 작가의 삶이 어떠했기에 그런 작품이 나왔는지 궁금해졌다. 충남 서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님의 교육열 때문이었다. 경희대 미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후 영국으로 유학해 2007년 런던예술대학 첼시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부모님에 대해 그는 “묵묵히 믿고 지지하되 간섭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펄 벅의 《대지》 속 강인한 여주인공이 우리 어머니와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중학교 때 부모님께 ‘미술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며칠 동안 묵묵부답이셔서 속이 탔죠. 그러다 갑자기 미술학원에 데려가셨습니다. ‘미술을 하면 돈이 많이 든다고 하는데, 우리가 밀어줄 수 있을까?’ 고민하셨다고 해요.”

그는 영국 유학 후 사진, 오브제, 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운명의 실을 감는 여신 / Clotho, 2011
“유학 초기에는 주로 그림을 그렸지만 서산의 할머니가 돌아가실 즈음 작업이 확 바뀌었습니다. 할머니가 오래 사시기 어렵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들은 후부터 어린 시절에 대한 꿈을 정말 많이 꾸었습니다. 평생 쪽 찐 머리로 사신 할머니는 병들어 머리를 자르게 되자 다 잃은 듯 허탈해하실 정도로 옛날 분이셨습니다. 남동생이 눈을 다쳤을 때 밤새 굿을 했던 기억도 났습니다. 서울과 런던에서 생활하던 저에게 어린 시절을 보낸 서산은 미스터리로 가득한 삶의 근원적인 공간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머리카락을 가지고 작업하고, 오브제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먼저 영국에서 자리 잡아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버티다 2009년 귀국하면서 ‘작업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했고, 귀국 한 달 만에 영어유치원 미술선생님이 되었다.

연리지 / Taiwan Tree, 2014
“아침 일찍 출근해 야근, 주말 근무까지 마다하지 않고 일하면서 ‘작가로서도 이렇게 매일매일 최선을 다했는가?’ 반성했습니다. 어느 날 누에와 뽕잎이 들어있는 과학상자 교구가 유치원에 도착했어요. 열심히 뽕잎을 먹은 누에는 실을 토해내더니 동그랗고 예쁜 고치를 만들어 자신의 몸을 감쌌습니다. 생명의 신비가 경이로워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 작업해야겠다’는 욕구가 치솟아 1년을 못 채우고 퇴직했죠.”

그때부터 그의 작업에 본격적으로 붉은 실이 등장했다. 실을 감고, 뜨개질하고, 매듭짓고, 늘어뜨리면서 생명과 삶, 인연에 관해 이야기했다. 누에가 나방으로 변신하기 위해 동그랗게 고치를 만들 듯 빨간 털실을 동그랗게 감아 생명을 상징했다. 생명과 삶을 이야기하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실종 1주일 만에 주검으로 발견되는 어이없는 일을 당했다. ‘삶이 이렇게 허무할 수 있을까?’ 뼈저리게 느끼면서 매일매일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삶보다는 죽음이 가깝게 느껴졌다. 평생 감정표현을 안 하시던 어머니가 그때 “널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내가 죽으면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우비와 삶은 닮은꼴

세한도 , 2018
그때부터 그의 작품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등장했다. 2011년 미국 프리맨재단의 아시안 펠로십 위너로 선정되어 버몬트스튜디오센터에서 작업할 때 그는 그곳 주민들을 작업에 참여시켰다. 검은색 옷을 입은 주민들이 빨간색 털실 뭉치를 들고 묘지에 서 있는 퍼포먼스였다. 2014년 대만 국제예술촌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도 묘지와 봉안당을 찾아다녔다.

“납골당(봉안당)에 고인이 좋아했던 물건을 넣어둔 게 보였습니다. 그 물건만 보아도 고인의 나이, 성격까지 짐작할 수 있었죠. 그 물건들이 고인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서 납골당을 촬영한 후 물건만 남기고 배경을 지웠습니다.”

2016년 대만에서 열린 개인전 〈여우비〉에서 발표한 작품들은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을 보여준다. 투명 우산에 붉은 실을 늘어뜨린 후 햇빛이나 전구의 빛을 받게 만든 작품이다. “맑은 날 잠시 내리는 비를 여우비라고 하잖아요? 여우비가 오고 나면 풀빛은 더 진해지고, 물빛은 더 맑아진다고 해요.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최근에는 주로 ‘집’을 주제로 작업해왔다.

여우비 / Fox Rain(Sun Shower), 2016
“대만에 있을 때 알록달록 예쁜 곳이 보여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가족묘라고 해요. 한 평 정도의 가족묘를 저마다 예쁘게 꾸며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사람이 태어나 생활하고, 죽어서 묻히기까지의 공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한 평의 집’이라는 설치작업을 했습니다.”

그는 최근 영은미술관에서 〈궁(宮)〉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추사 김정희의 작품 〈세한도(歲寒圖)〉에 등장하는 간결한 형태의 집을 3차원으로 구현한 뒤 붉은 털실로 감싼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의 경력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궁(宮)은 원래 왕족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집을 통칭하는 말이었어요. 최초의 인간인 태아의 집도 자궁(子宮)이라고 하잖아요? 지금은 16개월이 된 딸을 임신했을 때부터 궁(宮) 한 글자를 놓고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직접 아이를 낳아보니 인간의 탄생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더군요. 그런 기적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대단해 보였습니다.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고, 엄청나게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작가는 이제 한 발짝 떨어져 좀 더 객관적으로 작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 더욱 자신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 201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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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이한   ( 2018-05-31 ) 찬성 : 5 반대 : 8
aw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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