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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 속 인물에 눈 코 입이 없는 이유

이상원 작가 |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리다.

재즈페스티벌, 록페스티벌, 불꽃축제 등 각종 축제나 행사, 집회가 열릴 때마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일까?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각기 다른 사람들의 집합이지만 먼 거리에서 보면 그저 알록달록한 패턴으로 보이지 않을까.

성곡미술관의 ‘내일의 작가’로 선정되어 11월 19일까지 개인전을 연 이상원 작가는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다. 그는 여름이면 수영장이나 해변, 겨울이면 스키장, 봄가을이면 산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찾아다니며 사회학자가 사회현상을 분석하듯 거리를 두고 군중의 모습을 관찰해 그려냈다.

노란 풍선이 꽃처럼 뒤덮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 지난해 가을부터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군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같이 정치 집회를 그린 작품도 있지만, 작가의 정치 색깔이 특별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중심 구도도 원근법도 없이 화면 전체를 균일하게 표현하는 올 오버 페인팅(all over painting)처럼 그린 작품은 끝없이 이어지는 장면으로 느껴진다. 미술관에서 만난 작가는 “아무리 대형 캔버스를 사용해도 수만 명의 군중을 한 화면에 담을 수는 없기에 생각해낸 방법”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군중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6년부터다.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어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늘 지나다니던 성산대교 밑 한강공원과 수영장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주 5일 근무제가 시작되면서 그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띄게 많아졌고,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인 취향에 따라 주관적으로 선택하는 여가에서조차 비슷한 곳에 모여 비슷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갔습니다. 시각적으로도 인상적이었고요. 해변, 수영장, 스키장, 산뿐 아니라 전국의 지역축제장, 야구장과 축구장, 전국노래자랑, 유명한 일출·일몰 장소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녔습니다.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 타종 행사를 본 뒤 두 시간 자고 일어나 일출 현장으로 달려간 적도 있어요.”


군중에 관심을 갖다

〈The Crowd〉, 350x200cm, acrylic on canvas, 2015
대학원을 졸업한 후 군중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돌이켜보니 중학교 때부터 군중에 관심을 가졌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충남 청양 칠갑산 기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중학교 때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청양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왕복 3시간씩 걸어서 등하교했어요. 밤이 되면 사방이 새까매지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은하수가 보이는 곳이었어요. 그러다 서울 역삼동으로 이사하니 완전히 딴 세상이었습니다.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고, 강남역 지하든 놀이공원이든 대학가든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새로운 풍경을 많이 보고 뉴욕의 빌딩 숲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그때만큼 시각적인 충격을 받은 적은 없어요. 그때 받았던 인상이 제 작품의 소재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은 그러나 실제 군중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화면에 골고루 배치하고,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인데도 다시 점으로 사람들의 옆모습을 그렸다. 그가 그린 사람들의 얼굴에는 눈, 코, 입이 보이지 않는다. 군중의 일원이 된 사람들의 익명성, 몰개성을 보여주는 장치가 아닐까 생각됐다.

그의 작품은 유화, 아크릴화, 수채화, 수묵화 등 회화와 드로잉, 영상이나 설치작품 등 폭넓은 영역을 아우른다.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형상이 거의 사라지고 마티에르가 두드러지면서 추상화로 보이는 유화 작품도 있다. 그의 작품을 많이 보아온 사람이라면 추상화에서도 군중의 이미지를 금방 찾아낼 수 있다.

〈In summer〉, watercolor on paper, 2013
“예전 일을 떠올리면 사진처럼 또렷하게 기억나기보다 어렴풋한 느낌만 남아있을 때가 많잖아요? 어렴풋하게 묘사한 그림이 더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공유된 경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제 추상화를 쉽게 읽어내는 것 같아요”라고 작가는 말한다. 다양한 인종, 여러 나라 사람들이 똑같은 동작으로 달리기를 하는 그림을 연속해서 보여주는 영상작품도 재미있다. 동작은 똑같지만 사람이 계속 바뀌니 변신하는 듯 보인다.

“운 좋게도 작품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주목받았습니다. 2007년 창동 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금호미술관의 ‘금호영아티스트’에 선정되어 개인전을 했고, 2008년에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아트센터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뉴질랜드는 인구 밀도가 낮아 우리나라와 같은 군중을 볼 수 없었어요. 어떤 작품을 해야 할까 고심할 때 새벽에 달리는 그곳 사람들의 모습이 한강공원에서 달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보였습니다. 나라는 달라도 사람들이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이는 게 재미있었죠. ‘달리기’ 영상의 경우 달리는 사람들을 그린 250장의 수채화를 연속해서 보여줍니다. 훌라후프나 줄넘기하는 사람들을 연속해서 보여주는 영상도 있어요. 현대인은 여름이면 바닷가, 겨울이면 스키장을 한 번쯤 다녀와야 하고, 운동으로 몸을 단련해야 제대로 산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조깅이 유행하면 공원마다 달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인라인스케이팅이 유행하면 거리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으로 넘쳐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자신만의 우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리를 두고 보면 이렇게 비슷하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전시장의 한쪽 벽면은 42×56cm의 수채화 154장을 붙여놓은 설치 작품 〈In summer〉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의 해변이나 수영장에서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각기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그린 수채화를 모았지만, 하나의 그림처럼 보인다.


일기를 쓰듯…

“2012년 파리 시테데자르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작업한 작품입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촬영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같은 크기의 종이에 한 장 한 장 그려 넣었습니다. 우리나라 해운대·경포대나 프랑스 생말로 해변이나 미국 라스베이거스 실내수영장이나 여름을 즐기는 풍경은 비슷합니다. 끝없이 붙여 나갈 수 있는 작품을 통해 유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지구촌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인종이 보여요. 같은 흑인이라도 피부색이 조금씩 다르죠. 제 그림 속 인물에게는 눈, 코, 입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 그 속에 자신을 집어넣어서 볼 수 있어요. 제 그림을 보면서 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가고, 어린이날에 부모님 손을 잡고 유원지를 찾았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설치미술작가인 오유경 씨와 결혼해 일곱 살짜리 아이를 둔 그 역시 그림 속 인물들처럼 여가를 즐겼기에 그저 관찰자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그러나 2014년 4월 세월호가 침몰한 후 한동안 밝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신도 함께 물속에 잠긴 듯 갑갑하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세상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림 그리기가 싫어질 정도로 무력감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때 그는 숨 막힐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서 있는 학생 등 획일화된 우리 문화를 어두운 색감으로 그리면서 집단주의와 획일화에 내포된 위험성을 내비쳤다. 자기치유를 하듯 이리저리 떠오르는 생각들을 빼곡하게 써넣은 작품도 있다.

“일기를 쓰듯 그때그때 제 감정에 충실한 작업을 해왔던 것 같아요. 제가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저 담담하게 제시하고 싶었어요. 해석은 보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겠지요.”

큰소리로 외치지도 않고 어떤 메시지를 강요하지도 않는 그의 작품은 우리들의 모습을 반추하는 거울 역할을 하지 않는가 생각되었다.
  •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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