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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스무 살에는 스무 살의 신이 산다

안미린 〈반투명〉

사진제공 : 안미린
스무 살의 신(神)이 있다
거울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결과물

갓난애 눈물을 굳혀 만든 양초를 잃어버렸어
꿈속의 나와 꿈밖의 내가 동시에 울기로 한다
눕혀진 거울을 세우던 최초의 시간
한번쯤 울어 보려고 퇴화하는 마지막 감정
나는 꿈밖의 내게 이름 불렀지
나 자신을 전부 만져 봤던 감각을 기억해?
입에 넣어 봤던 꼬리의 길이를 가늠해?
투명의 반대말이 뭐게?

스무 살의 신(神)이 있어
빛으로 빛을 비추는 짓 한다
그림자가 가까운 인형에게 이름을 줬다 빼앗았을 때
눈물처럼 눈알이 떨어졌을 때
다음은 네 차례야
충분해진 촛불을 끄고
케이크에 얼굴을 푹 박아 줄 차례

안미린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 민음사, 2016


스무 살은 도덕이나 미학의 측면에서 완성이 끊임없이 지체되고 유예되는 때다. 여러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은 뒤 비로소 자기만의 기질과 개성의 싹이 움트는 시기다. ‘투명’의 반대편에 서 있는 스무 살, 그 시원(始原)의 시간은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온 자의 시간이다. ‘반투명’은 자아와 비자아의 경계에 드리워진 소통 불능에 대한 암시를 드러낸다. 그 자신은 밝고 따뜻하며 명징하게 빛나지만, 그의 의식에 투사된 세계는 회색빛 유령들이 걸어 다니는 듯 모호하고 낯설고 칙칙하다.

자아 저편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스무 살의 자의식이란 곧 신(神)인 것. 스무 살의 신은 “눕혀진 거울을 세우던 최초의 시간”을 안고 있으며, “한 번쯤 울어 보려고 퇴화하는 마지막 감정”을 갖고 산다. 그래서 스무 살의 신은 그 세계 안으로 성큼 들어서서 그것과 마주하기보다는 자기의 자의식 안에서 세계를 주무르며 논다. 그 놀이의 방식은 자기 식으로 이름 불러주기다. 아이는 사물과 세계에 제멋대로 이름을 붙여 호명한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우연의 우연성을 인지하고, 제 눈앞에 새로 펼쳐지는 기적으로 인해 재미에 흠뻑 빠져든다. 그 놀이의 소도구로 흔하게 등장하는 게 ‘거울’인데, 그 ‘거울’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구멍’ 같은 것이다. 그 ‘구멍을 빠져나오자 뜻밖의 몽상과 기묘한 뒤틀림들이 나타난다.

자, 시를 더 깊이 들여다보자. ‘나’는 꿈밖의 ‘나’를 부른다.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시절의 자아, 기억에만 존재하는 ‘그림자 자아’다. 꿈속의 ‘나’와 꿈밖의 ‘나’는 닮았으되 동일인은 아니다. 그것은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 혹은 거울에 비친 ‘나’와 거울 밖에 서 있는 ‘나’와의 관계와 같다. 이 시는 스무 살의 자의식을 내비친다. 스무 살은 아이의 세계에서 나와 어른의 세계로 입문하는 통과의례의 시기다. 그 시절은 계절로 치자면, 아이로서 누린 것의 상실과 영원히 회귀할 수 없다는 고통으로 앓는 성스러운 봄이다. 아이의 세계란 곧 처음으로 누린 낙원이다. 정작 아이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 시절을 다 흘려보내고 난 뒤 문득 상실을 통해 방금 자신이 낙원에서 추방되었음을 인지한다. 잃어버린 낙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혼자만의 ‘거울 놀이’를 할 때뿐이다. 거울 앞에서 퇴적된 과거의 ‘나’를 불러내 대화를 나눈다. 시인은 그 대화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채록한다.

나 자신을 전부 만져 봤던 감각을 기억해?
입에 넣어 봤던 꼬리의 길이를 가늠해?
투명의 반대말이 뭐게?

이 화법은 아이의 화법이고, 이 화법에 나타나는 자신의 전부를 손으로 만졌던 감각들, 입에 넣은 꼬리의 길이를 떠올리는 것도 아이답다. 이성과 도덕으로 굳어진 어른의 것이 아니라 미성숙하고 분별없는 아이의 흥분과 재미로 빚어진 상상 세계다. 시인의 상상 세계에서 어린 시절은 무의식의 유적(流謫)이다. 이 구절들은 또 다른 시편인 〈다른 다리〉에 나오는 “나는 깨진 무릎을 꿇고 / 더 어린 알을 알고 / 언젠가 내 손이 앞발이었던 실험 / 발자국으로부터 어깨를 / 날개로부터 걸음걸이를 / 공룡으로부터 암컷까지의 시간을 쟀지”라는 시구와도 호응한다. 독자는 여기서 ‘반투명’의 기원을 유추해 볼 수가 있으리라. 아이들은 사물을 손에 쥐려 하고, 막무가내로 손에 쥔 것은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본다. 아이는 제 감각만을 통해서만 세계를 기억하고, 판단하고, 인식한다. 아이의 의식에 비친 세계는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반투명’은 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호함, 혹은 윤리의 명징함을 얻지 못한 의식의 은유에서 빛을 발한다. 그것은 ‘투명’의 저편, 한 마디로 선과 악이 미분화된 채 엉겨 있는 심원이다.

스무 살의 신은 세계와 자아의 경계 안쪽, 즉 자기만의 고해실에 웅크린 채 저 바깥에 온 첫 봄을 맞는다. 〈반투명〉의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감정의 진자 운동은 크다. 스무 살에는 상승과 추락, 기쁨과 슬픔, 쾌와 불쾌 따위 감정의 극단과 극단을 수시로 오간다. 감정의 극단에서 흔히 나타나는 게 폭력성이다. 이 시에서도 난폭의 징후는 “그림자가 가까운 인형에게 이름을 줬다 빼앗았을 때 / 눈물처럼 눈알이 떨어졌을 때 / 다음은 네 차례야 / 충분해진 촛불을 끄고 / 케이크에 얼굴을 푹 박아 줄 차례”라는 시의 후반부에 돌연 나타난다. 케이크나 촛불에 유추해 볼 때 이 시는 어떤 생일 파티에 대한 기억을 펼치는 것이리라. 이 은유의 무의식에 폭력의 기억이 침입한다. 인형에게 줬던 이름을 빼앗고, 인형의 눈알이 떨어지며, 케이크에 얼굴을 처박는 폭력은 곧 시의 화자가 경험할 자아와 세계, ‘나’와 타자의 관계가 폭력으로 말미암아 일그러질 것이라는 직관을 보여준다.

〈반투명〉은 스무 살의 기억이 없다면 쓸 수 없는 시다. 꿈 밖에 있는 미지의 ‘나’에게 이름을 붙여 불러주던 그 통과의례의 기억을 천진한 방식으로 호명하는 데서 시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천진하고 모호한 화법으로 스무 살의 신에 대한 기억을 펼쳐낸다. 그의 시는 당신의 스무 살이 지나갔다고, 스무 살의 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 우리가 겪은 스무 살의 신은 내 안의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는 이 스무 살의 신과 삶이라는 긴 여정을 함께 한다.


안미린(1980~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에 당선하며 문단에 나온 신예다. 2016년 첫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을 펴냈다. 첫 시집에서 그의 세계 인식과 미적감각은 충분히 펼쳐진 것 같지 않다. 그의 화법은 말을 처음 배운 아이같이 어눌하고, 툭툭 끊기며, 그 어눌한 언어에 비친 세계의 상(像)은 어딘가 모르게 기묘하게 뒤틀려 있다. 그러나 그 언어가 사회적 불합리와 모순, 위선과 악덕, 폭력과 부조리 따위로 인한 트라우마로 왜곡된 언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는 내향성의 폭주에서 얻은 자기만의 언어를 천천히 내뱉고 있다. 이를테면 자폐적인 자아가 실재의 세계보다 거울 상들에 빠져 그것을 현실로 믿는 태도의 산물이다. 그로 인해 생기는 슬픔의 정조(情調)가 배면에 깔린 미적 모호함과 몽롱함을 안미린이 펼치는 ‘반투명의 세계’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 2017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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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지나가다   ( 2017-07-09 ) 찬성 : 4 반대 : 1
이 시집이 온전히 평가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안미린 시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위의 글은 잊고, 채널예스에 실린 황인찬 시인의 평을 찾아보시는 편이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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