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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글 : 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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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축제 기간만 되면 운동장에는 단이 세워졌다. 그리고 소위 잘나간다는 친구들은 그 위에서 각자가 준비한 노래에 맞춰 멋들어지게 춤을 추곤 했다. 1반 애들이 준비한 ‘와일드 아이즈’가 끝나면 3반 애들이 준비한 와일드 아이즈가 나오고 그 와일드 아이즈가 끝나면 7반의 덕수가 김경호의 ‘금지된 사랑’을 야탑동이 떠나가라 부른 뒤 다시 4반 애들이 준비한 와일드 아이즈가 나오는 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보며 저 정도면 소품 의자를 굳이 치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사대로 와일드 아이즈의 무한 반복을 보느니 ‘내면 속의 나를 찾을 수 있게 나를 쳐다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러면서 왜 최우수상은 결국 덕수가 타는 건지에 대한 의아함을 가졌고, 이어서 나는 평생 저런 무대에는 올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단념을 하곤 했다.

그 사실이 썩 비참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누군가가 올려다보는 저 단 위에 올라갈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멋지게 의자에 앉아 폼을 잡고 있을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피카츄 돈까스’나 사먹는 게 더 편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온 친구에게,

“오늘 너의 신혜성 역할 아주 멋있었어.”

“나 김동완이었어 새꺄.”

“오 나의 미스테이크.”

식의 격려만 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배우라는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고, 그들 덕분에 꿈이 생기고, 그 선배들이 무대에 서 있는 모습에 반했고, 결국 그 무대에 홀연히 서서 관객들과 하나의 연극을 만드는 게 현재의 나다. 놀라운 일이다. 그때 김동완 역할이었던 그 친구가 알면 이마를 탁 치며 코웃음을 칠 노릇이다.

첫 무대는 꿈을 안겨준 그 선배들의 워크숍 작품이었다. 〈조선인〉이라는 작품이었고 극단의 막내들이 무대 뒤에서 실루엣으로 등장해 “민비가 사라졌다!” 하는 대사를 외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선배들은 우리에게 ‘반 데뷔’라는 표현으로 기를 살려주었고 나는 아직도 그때의 떨림을 잊을 수가 없다. ‘민.비.가.사.라.졌.다.’ 일곱 글자가 나의 첫 대사였던 셈이다.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퇴장하는 그 순간이 뭐가 그렇게 뿌듯했는지, 몇 년 후 나는 그 ‘무대’라는 곳에 서고 싶어서 같은 학교의 연기과로 학적을 옮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몇 년.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무대 위에서 서너 개의 연극을 만들어갔다. 관객들과 호흡하면서 흘러가는 두 시간은 마치 마약같았고, 내려오고 나면 또 올라가고 싶은 것이 내게는 ‘무대’였었다. 과민성대장증후군 때문에 늘 설사약을 먹고 올라가도, 무대에서 물을 과하게 마셔 오줌을 쌀 뻔했어도, 머릿속이 하얘져 대사가 생각이 안 나는 순간 얼굴이 하얘진 연출과 눈이 마주쳤어도 그 ‘무대’는 내게 언제나 향수를 일으키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또 무대에 섰다. 느낌이 좀 다르긴 하다. 와일드 아이즈를 춰왔는데 갑자기 금지된 사랑을 부르라고 하면 이런 느낌일까.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 됐든 여덟 시가 되면 내 눈 앞의 벽채는 열린다. 그리고 관객들의 눈이 정면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좀 두려웠다.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이 만들어가자는 생각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학교에서 배웠다. 연극의 3요소는 배우, 무대, 관객이라고. 연극의 한 축을 형성하는 당신들을 믿고 나는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달리겠다는 생각이다.

연극 참 어렵다. 이것보다 어려운 일도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혹자는 말한다. 너무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쉽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줬다. 분명 많이 부족한데, 그 부족한 놈이 심지어 쉽게까지 생각하는 건 일종의 ‘배임’과도 같다. 어렵게 고민해서 나오는 그 모든 방법이 분명 이 공연이 거듭될수록 관객들에게 더 좋은 공연을 보여줄 수 있는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맡은 인물도 그리고 나도, 서로에게 하루하루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나는 어느 순간 그 아이가 측은해졌고, 가여워졌고, 그 옛날 나의 모습과도 닮아 있는 것 같아 슬프기도 했다. 나의 과거와 너의 지금이 너무도 같기에 두려워 겁이 나. 좌우지간, 우리는 결국에 손을 맞잡지 못할 수도 있지만 분명 이 순간에도 눈을 마주치고 있다. 난 그의 눈동자를 통해 한 여자를 사랑한다. 그 마음은 나도, 그도, 그리고 당신도 느껴본 적 있는 저릿한 사랑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그 감정을 돕기 위해 위대한 문호의 활자를 온몸으로 연기한다. 참 아름다운 일이다. 내게 이런 꿈을 심어준 그 선배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다.


무대.

나와 관객 사이에는 스크린도 브라운관도 없다. 편집도 CG도 없다. 그저 미묘한 공기와 긴장감만이 보이지 않게 흐르고 있다. 관객과 나는 그렇게 만나 매일 다른 공연을 만든다. 스무 살, 매일 다른 공연을 보여준 선배님들을 보며 무대를 꿈꿨는데, 오퍼석에서 매일 선배들을 바라보는 스무 살 사빈이 녀석에게 십년 전 내가 느낀 그 감정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는 내일 또 다른 공연을 보여줄 것이다.

여덟 시가 되면 조명이 들어오는 무대. 그 무대 안에는 내 손길이 거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는데, 딱 하나 없는 것이 ‘나’였던 그 시절. 나는 그 시절의 ‘나’와 또 사빈이 녀석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때 나의 선배들처럼 말이다.

박정민은 영화 〈동주〉 〈순정〉 〈오피스〉 〈신촌좀비만화〉 〈들개〉 〈전설의 주먹〉 〈파수꾼〉,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G코드의 탈출〉 〈키사라기 미키짱〉, 드라마 〈안투라지〉 〈응답하라 1988〉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7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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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ㅂㅎㄹ   ( 2017-01-21 ) 찬성 : 0 반대 : 0
두려워 겁시 나.
   지구인   ( 2017-01-09 ) 찬성 : 5 반대 : 0
적어내려간 시간보다 읽어내려간 시간이 짧아 미안함을 느끼는 글이에요. 언희는 항상 편안히 읽혀져서 좋은 글이에요.
      ( 2017-01-06 ) 찬성 : 1 반대 : 1
멋져요. 항상 기다리고 있는 글! 서울에서 하는 연극 놓쳐서 너무 아까웠는데 2월 대구 공연을 보러가요ㅠㅠ! 제인생 첫 연극! 빨리 보고싶고 언제나 응원해요!
   배우   ( 2017-01-01 ) 찬성 : 6 반대 : 6
계속 읽고있어요. 쓸만한 인간부터 언희 칼럼까지 작지만 글로서라도 박정민이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있는것같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나와 비슷한 면모가 많구나 라고 느낄때가 많아요. 그래서인지 가끔은 정말 큰 위로가 됩니다. 만나서 길게 한번 이야기 해보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훗날 저도 꽤 능숙하게 이 분야에 발 좀 담그게 되었을때 이야기하고싶습니다. 항상 솔직한 글, 좋은 연기, 감사합니다.
   winona   ( 2016-12-27 ) 찬성 : 7 반대 : 2
태도가 참 멋집니다. 항상 믿고 볼 수 있게끔 연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췌췌   ( 2016-12-26 ) 찬성 : 5 반대 : 3
배우님 진짜진짜 팬이에요! 앞으로도 좋은 글 남겨주세요ㅎㅎ
   다잘될겁니다   ( 2016-12-23 ) 찬성 : 13 반대 : 8
배우님이 연기하실때 얼마나 진중한 자세이신지, 연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배우님만큼은 아니지만 저희도 그걸 느껴요 배우님만의 고유의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가 배우님을 좋아하는게 아닐까 싶어요^-^
 항상 배우님 연기를 볼때마다 작품이 주는 감동이나 소름 외에 또다른 행복을 느껴요
 배우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배우님의 연기 계속 볼수 있게 해주세요
 남은 연극도 건강하게 다치지 않고 잘 해내시길 바랍니다~ 겨울 추위, 미끄러운 길 조심하시고 눈 아픈 것도 속히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hayun   ( 2016-12-23 ) 찬성 : 3 반대 : 4
글 잘 읽었어요~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소중한 글 남겨 주셔서 김사합니다.^^
 남은 공연들 무사히 마치시길... 1월에 또 뵈러 갈 예정이예요~
 건강 조시하세요~>_<
   비로코   ( 2016-12-23 ) 찬성 : 7 반대 : 9
영상과 같이 재 촬영 수없는 매일 다른 삶 무대.
 매번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배우님을 만나기 위해 내년 일본에서 다시 보러가요.
 
 관객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세요. 몸에 조심해주세요~
   ㅃㅇㅃ   ( 2016-12-23 ) 찬성 : 8 반대 : 10
연극평도 점점 좋아지고 있네요~~ 너무 겁내지마시고 예전에 무대에서 재기발랄 재간둥이였던 박정민씨로 돌아오세요^^
   ㄷㄴ   ( 2016-12-23 ) 찬성 : 9 반대 : 7
멋있어요, 배우님.
 항상 이런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셨었군요.
 연극 정말 잘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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