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농밀함

글 : 김민희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장소협찬 : 복합문화공간 오드포트·이경민포레 청담점(메이크업 류정이·헤어 지호)
그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1악장 첫 여덟 마디에서 생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휘몰아치듯 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겨우 스무 개도 안 되는 음표로 환희와 감동, 분노와 고통을 다 표현해내다니. 갓 태어난 여린 병아리 같은 섬세함에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한 사자의 격정적인 분노까지 느껴졌다. 선율에 대한 귀가 섬세하게 열린 편이 아닌 나로서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피아노라는 악기가 연주자에 따라 얼마나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이론이 아니라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갓 서른을 넘긴 그에게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수식어를 다는 음악평론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노력형” “대기만성형”이라는 표현도 자주 보이고, “실력에 비해 저평가됐다”는 평도 눈에 띈다. 후자의 표현은 주로 한국인에게서 많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선우예권은 2017년 세계 4대 피아노 콩쿠르이자,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한 후 국내에서보다 미국이나 유럽 무대에서 더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공연이 많을 땐 1년에 100회 이상 무대에 올랐다니 말 다 했다. 또 하나, 연주 자체에만 집중하는 선우예권 특성상 다른 이슈로 그를 만날 일이 많지 않다. 말하자면 그는 연주자라는 한 우물만 조용하면서도 치열하게 파왔다.

선우예권의 연주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깊고 정제돼 있다. 감정의 과잉이나 군더더기 없는 연주를 선보이되, 꼭 필요한 감정은 과녁의 정중앙을 뚫듯 예리하고 농밀하게 표현해낸다. 글로 치자면 소설이나 에세이보다 칼럼에 가깝고, 연기자에 비유하자면 송강호보다 황정민, 김혜수보다 전도연, 톰 크루즈보다 크리스찬 베일 쪽이다. 어떤 역을 맡아도 해당 연기자가 보이는 대신, 철저히 역할 속으로 녹아드는 배우. 그래서 그가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면 라흐마니노프가 되고, 프로코피예프를 연주하면 프로코피예프가 된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서서히 녹아들어 결국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표현해낸다.

이번 모차르트 음반도 마찬가지다. 평소 슈베르트 덕후임을 공공연하게 밝혀온 그는 예상을 깨고 모차르트 음반을 냈는데, 이 역시 찰떡같이 연주해냈다. 모차르트의 옷을 갈아입은 그는 철저히 모차르트 속으로 녹아들었다. 때로는 장난기 넘치는 천진난만한 개구쟁이로, 때로는 슬픈 드라마가 가득한 비운의 음악가로.

이번 음반은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첫 음반이자, 콩쿠르 음반이 아닌 첫 음반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음반 발매를 기념해 전국 투어 리사이틀도 잡혀 있다. 12월 30일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첫 공연을 시작으로, 대전예술의전당(1/15), 부산 영화의전당(1/23), 대구 수성아트피아(1/24), 서울 롯데콘서트홀(1/26), 서귀포예술의전당(1/29)으로 이어진다.

12월 초 선우예권을 만났다. 미세먼지로 뿌연 날이었고, 코로나19 확진자는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도중이었으며, 겨울 공기는 살이 에일 듯 차가웠다. 헤어숍에 나타난 선우예권은 무대에서보다 체구가 작고 앳돼 보였다.



인상이 달라졌는데요?
이젠 ‘뮌헨 곰돌이’라는 별명이 안 어울리겠어요.


“살이 많이 빠졌어요. 4~5kg 정도 빠진 것 같아요. 일부러 다이어트를 한 건 아닌데, 무대 공연이 힘들었나 봐요.”


3년 전 미국에서 독일로 거주지를 옮긴 영향도 있을까요?

“아무래도 미국 음식이 더 기름지니까요. 독일이 저에겐 더 편안해요. 미국의 화려함보다 독일의 고요함이 맞는 것 같아요.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요.”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 3년 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일단 해외 공연 횟수가 확 늘었어요. 그만큼 경험이 쌓이다 보니 연주할 때 표현력도 달라진 것 같고요. 저 자신에게 더 집중해서 연주를 할 수 있게 됐다고 할까요. 음악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진 것 같아요. 조급하게 느끼지 않고 더 깊이 들어가려 해요. 누가 봐도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하고 싶어요.”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하는 연주”라. 어떤 경지일까요.

“경지라고 하면 되게 거창한데요, 모든 걸 노래하려 하는 거죠. 노래를 할 때 똑같은 음을 똑같이 낼 수도 있지만, 강약의 조절과 흐름의 연결, 전체의 구성에 따라 전혀 다른 음을 낼 수도 있잖아요. 음과 음이 부드럽게 이어질 수도 있고, 굴곡지게 이어질 수도 있고요. 피아노는 분명 타악기지만 제가 연주할 땐 타악기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프로코피예프 같은 작곡가는 또 그런 면모가 필요하지만, 그 외 작곡가의 곡은 최대한 모든 음들이 노래처럼 이어지도록 하려고 해요.”


그런 소리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보를 보면 머릿속에 상상하는 소리가 있어요. 그 소리가 현실로 구현될 때까지 연습하는 거죠. 이렇게도 쳐보고, 저렇게도 쳐보고 계속 고쳐가면서 쳐요.”


연주자에게도 상상력이 중요하군요.

“그럼요. 상상력을 빼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음악이에요. 예민한 감수성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겉으로는 제가 감수성이 예민해 보이지 않는데, 가까운 친구들은 알죠. 늘 신선한 감정 상태를 유지해야 좋은 연주가 나오는 것 같아요.”



어른이 되어가면서 감수성이 무뎌지기 쉽잖아요. 신선한 감정을 유지하기 위한 선우예권 씨만의 방법이 있나요?

“감수성은 의도적으로 자극을 줘서 유지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아요. 일상의 순간순간 그런 감정이 느껴질 때마다 회피하지 않고 푹 젖어들려 해요. 아프더라도, 고통스럽더라도 그 감정을 충분히 즐기는 거죠. 유럽에 있을 때 기차를 타고 다른 도시를 여행하는 것도 도움이 됐어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극을 많이 받아요.”


음반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의외였어요.
슈베르트를 자주 언급했는데, 왜 하필 모차르트였나요.


“많이들 그렇게 말씀하세요. 모차르트를 그동안 프로그램에 많이 넣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저를 생각하면서 떠올리는 작곡가는 늘 다른 작곡가였으니까요. 모차르트 음반을 내기로 한 건 작년 12월쯤이에요. 많은 작곡가들을 후보에 놓고 생각해봤는데요, 가장 먼저 떠오른 작곡가는 역시 슈베르트였어요. 제가 특별히 애정하고, 평소 가장 많이 연주하니까. 그래서 엄두가 안 났어요. 더 완성된 소리로 녹음하고 싶은데, 아쉬움이 남으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았거든요. 나이가 들면서 음악 세계가 바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떠올린 작곡가가 모차르트였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우선 15세에 제가 미국 커티스음악원으로 유학을 간 이후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가 모차르트였어요. 제 스승이신 세이무어 립킨 교수님은 표현방법을 일일이 가르쳐주시는 분이 아니어서 많이 헤맸어요. 어떤 악상을 어떻게 표현할지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시기를 2~3년간 겪다가 모차르트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동료들이 특별히 연주가 좋았다면서 칭찬과 인정을 해줬어요. 그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고요. 두 번째 이유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와 관계있어요. 세미파이널 무대에서 모차르트를 연주했는데 그때 좋게 들어준 분들이 많았거든요.”


‘하고 싶은 것’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택했군요.

“모차르트는 좋아하는 작곡가이기도 해요. 제가 슈베르트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여러 번 밝혔는데, 모차르트는 슈베르트와 성격적으로 닮은 면이 많아요. 일반적으로 모차르트는 자유분방하고 쾌활하고 자기 멋대로라고 알려져 있는데, 들여다보면 슬프고 우울한 면도 많고, 감정의 굴곡도 많이 느껴져요.”


녹음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모차르트의 면면이 있다면요.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면을 많이 봤어요. 특히 느린 곡을 모아둔 CD2를 녹음하면서 어두운 구석을 많이 느꼈죠. 전체적으로 모차르트의 드라마적인 요소를 살리려 신경 썼어요. 곡마다 하나하나 디테일을 살리면서 드라마 전체의 큰 스토리를 들려드리고 싶었거든요.”


이 음반이 청중의 마음에 어떻게 가 닿길 바라지요?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어요. 고민이 깊은 분이라면 더 깊은 고민 속으로 빠져들고, 휴식 중이라면 완전히 릴렉스 상태가 되고요. 산들바람이 불면서 아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는 듯해서 눈과 마음이 정화되는 악장이 있고, 그 밝음 속에서도 애잔하고 슬프게 변주되는 악장도 있고, 운명적으로 어두운 느낌이 다가오는 듯한 곡도 있어요. 각자 처한 상황이 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감상하는 시간만큼은 본인에게 투자해서 나 자신을 오롯이 느끼셨으면 해요.”


모차르트가 이 음반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요?

“혼날 것 같은데요(웃음)?”


(웃음) 질문을 바꿔볼게요. 모차르트에게 어떤 평을 듣고 싶어요?

“나쁘지 않았다,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연주자의 의도를 굉장히 중시하잖아요.
연기자에 비유하자면 극 중 역할에 녹아드는 메소드 연기 쪽이지요.


“그러면 좋겠어요.”


지향하나요?

“지향한다기보다 어떤 곡을 연주하든 그렇게 돼요.”


선우예권 씨한테 가장 궁금한 건 ‘소리’의 표현이에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하면서 부드러운 소리, 한음 한음 과녁의 정중앙을 통과하듯 정확하면서도 서로 연결된 소리를 낼 수 있나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되게 감사해요. 소리에 대한 고민을 진짜 많이 하거든요. 악기 중에서도 피아노는 현악기에 비해 구별이 더 어려울 수 있는데, 그걸 알아봐주시면 굉장히 특별하고 감사하죠. 제가 소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고 예민하게 신경 쓴 건 커티스음악원 립킨 교수님 덕분이에요. 레슨 때마다 소리에 대해 고민하라는 말씀을 해주셨거든요. 한번은 제가 연습하는 걸 친구가 지나가다 듣고 물었어요. ‘왜 너는 똑같은 부분을 자꾸 반복해서 쳐?’ 하고요. 그때 생각해봤죠. 제가 원하는 소리가 아니면 그 소리가 나올 때까지 계속 다시 치는 거였어요. 도미솔도의 단순한 멜로디 라인에도 심오한 세계가 있거든요. 맨 위가 보이스고, 맨 아래는 현악 사중주, 중간에 베이스, 테너, 알토 같은 것들이 깃들어 있는데 하나하나가 다 중요해요. 한 뭉텅이가 아니라, 맨 위의 소리만 중요한 게 아니라, 각각의 음이 최상의 소리를 내야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뤄서 좋은 노래를 할 수 있어요.”


도대체 얼마 동안 소리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한 겁니까.

“2005년에 유학 왔고, 2006~2007년경부터 소리에 신경 썼으니까, 14~15년 됐네요.”


힘의 강약을 주는 노하우 같은 게 있나요?
손이 아닌 온몸으로 연주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힘을 실어 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치는 동시에 힘을 빼는 것이 더 중요해요. 손목에도 힘이 꽉 들어가면 안 되고요. 그렇지 않으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풍성한 소리를 담을 수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소리는 손끝이 아니라 배에서 끌어올린 소리예요.”


배에서요?

“네. 배에서, 코어에서 나오는 듯한 소리를 상상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배에서 힘을 끌어올려 소리를 내죠. 사실 배뿐 아니라 온몸에 힘이 들어가요. 마사지해주시는 분이 저더러 운동하느냐고 물어요. 등에 잔근육이 많이 잡혀서요.”


선우예권 씨가 생각하는 좋은 소리란 어떤 소리인가요.

“제가 정의하는 피아노에서의 좋은 소리란 특정 작곡가의 곡에서 그 프레이즈(멜로디 라인)에 적합한 소리예요. 그게 부드러움이 될 수도, 거침이 될 수도, 날카로움이 될 수도 있는데, 결국 상상력에 달려 있어요.”


악보에 충실한 소리라는 얘기인가요?

“네. 그게 웃긴 게요, 악보를 딱딱 지킨 연주는 어떻게 보면 틀에 박힌, 재미없고 딱딱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어요. 하지만 작곡가의 의도를 진심으로 고민하고 느낀 후 전달하는 소리는 겉으로 듣기에 좋은 소리와는 달라요. 그래서 기본을 지키는 게 중요해요. 특히 모차르트 작품은 디테일한 부분이 굉장히 많거든요. 잘 보면 아티큘레이션 표시나 슬로(이음줄)가 여러 가지로 많아요. 그것들을 무시하고 느끼는 대로 연주하면 본질을 벗어나는 거죠.”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최선을 다한 이유 중 하나가, 우승하면 무대 기회가 많아서라고 했지요.
무대 연주가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일단 연주자의 길을 걷기 위해 제가 8세부터 달려온 것이니까요. 다른 연주자분들도 그렇겠지만, 무대에 서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아요. 잠시 꿈을 꾸고 온 느낌이랄까요. 거기에서 오는 아드레날린도 엄청나고, 공연이 끝난 후 흥분과 긴장감도 어마어마해요. 한 곡 안에서 느껴지는 업다운이 주는 스릴감도 상당하고요.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느낌까지 들어요.”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느낌이라.
조금 더 표현해줄 수 있어요?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웃음). 프로그램에 따라 다르긴 한데,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극도의 행복감인가요?

“행복감과는 달라요.”


그러면 인간사 희로애락의 다양한 감정들이 밀도 있게 채워지는 느낌?

“네, 거기에 가까워요. 편안함과는 다르거든요.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막연한 편안함은 아니에요.”


혼자 연주할 때는 그 느낌이 안 드나요?

“절대로 안 들죠. 연주자에게는 관중의 존재가 굉장히 중요해요. 어릴 때도 공개 레슨을 받을 때 꼭 누군가를 옆에 앉혀뒀어요. 심지어 음악을 안 하는 친구를 앉혀놔도 혼자 하는 연주와 달라요.”


관객으로부터 기운을 받나 봅니다.

“그것도 무시 못 하죠. 관객분들이 티켓을 사서, 두 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 공간에서 같이 집중한다는 자체가 어마어마한 축복이잖아요. 관객에 따라 공기의 기운이 달라지기도 해요.”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많은 공연이 취소됐어요. 잃은 것과 얻은 것이 있을 테지요.

“일단 잃은 부분이라면 스케줄이 취소되면서 금전적인 부분과 연관되는 것들이죠. 처음에는 머리가 셧다운이 돼서 두 달 가까이 연습을 안 한 적도 있어요. 그런 시간이 처음이라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콩쿠르 전에도 크고 작은 공연들이 계속 있었고, 콩쿠르를 앞두고는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살았으니까요. 그러면서 얻은 것도 있어요. 이런 일이 없었다면 계속 앞만 보면서 정신없이 달려왔을 테지만,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 주변을 돌아본 계기가 됐죠.”



두 달간 연습을 안 하다니요. 불안하진 않았어요?

“사람마다 다를 것 같은데, 저는 연주가 많은 시기에도 계속 연습하지는 않아요. 연주 2주일을 앞두고 3~4일 동안 안 하기도 해요. 손가락이 굳는다는 걱정을 많이들 하시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아요. 저에겐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도 그런 시간이 있어서 풀리거든요. 쉬고 나면 더 집중해서 잘할 수 있고요. 은근히 고집이 있어서 제가 생각하는 바대로 나아가는 편이에요. 제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 저에게 맞는 스타일을 밀고 나아가요. 잔소리 듣는 걸 진짜 싫어하고, 잔소리를 귀담아듣지도 않고요. 보는 분에 따라서는 고집이 세고 독단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자신감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자신감이라면 자신감이고요. 그렇다고 제가 저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에요(웃음). 좋은 사람 잘 챙기는 걸 좋아하거든요.”


다소 늦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를 시작했지요. 피아니스트의 전성기는 언제라고 생각해요?

“기교적인 측면에서는 20대 초반 같아요. 저 역시 그땐 특별히 고민하거나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아도 기교적으로 잘 돌아갔어요. 지금은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에 다양한 각도가 생긴 것 같아요. 표현력이 더 풍부해졌다고 할까요. 예전에 만족스러웠던 연주를 최근에 다시 들으면 못 듣겠더라고요(웃음).”


선우예권 씨의 전성기는 언제일까요?

“저에게 전성기가 있을까요? 과연 올지 모르겠어요.”


스스로 바라는 시기는요.

“죽기 직전이면 좋겠어요. 그때까지 열정을 잃지 않고 꾸준히 성장해가고 싶어요.”


피아니스트가 안 됐다면 뭘 하고 있을까요?

“피아노 앞에 앉은 8세 이후로 피아니스트가 아닌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단 한순간도. 늘 좋은 연주자가 되기 위해 달려온 것 같아요. 만약 중간에 딴 길로 갔어도 다시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있을 거예요. 다른 쪽엔 특별히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아주 어릴 때 꿈은 뭐였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장래 희망을 그림일기로 그려낸 적이 있는데 달리기 선수를 그렸던 기억이 나요. 당일에 바로 내야 해서 가장 빨리 그릴 수 있는 게 달리기 선수였거든요(웃음).”


그럼에도 피아노를 시작한 20여 년 동안 슬럼프는 있었겠지요.

“별다른 슬럼프는 없었어요. 물론 시시때때로 굴곡은 겪지만 그 정도의 굴곡은 누구나 겪는다고 생각해요. 편안하게 생각하고, 편안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연주 여행을 다니다 보면 연세 있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는데요,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좋은 사람과 가까이에서 잘 지내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고 하세요. 진심으로 공감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먼 훗날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을 딱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문장이 좋겠어요?


“아, 잠시 생각 좀 해볼게요. (한동안 침묵) ‘좋은 사람, 음악가’ 이렇게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스트레스는 없어요. 억지로 되려 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누군가 저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그보다 더 큰 칭찬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표현으로 남겨진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좋은 사람, 음악가 선우예권.”


인터뷰와 사진 촬영이 끝난 선우예권은 작은 부탁을 하나 해왔다. 사진 보정을 과하게 하지 말아달라는. “자연스러운 게 좋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이번 음반 재킷 사진에도 거뭇한 턱수염 자국을 그대로 살렸다고 했다.

선우예권과의 인터뷰도 그랬다. 그의 연주 스타일처럼 화려한 수사나 과장 없이 진솔하고 깊었다. 투명한 눈빛을 먼 곳에 고정하고 조곤조곤 하는 말에는,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예술혼이 꿈쩍 앉는 바위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 2021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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