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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뭉근한 위로, 김혜수 下

어느새 롤 모델이 되어간다는 것

글 : 김민희 기자  / 취재지원 : 서경리 기자  / 사진제공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강영호 작가

브라운관의 김혜수는 낯설었다.
〈타짜〉나 〈관상〉, 〈미옥〉이나 〈차이나타운〉에서처럼 존재감만으로 영화 전체를 압도해버리는 김혜수는 없었다.
대신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찾아와버린 고통, 내 잘못이 아닌 인생의 무게를 감내하느라 분투하는 평범한 한 인간이 있을 뿐.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형사 ‘현수’로 분한 김혜수의 내면 연기는 잔상이 짙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김혜수에게서 현수가 보였다. 이제껏 무슨 작품을 해도 캐릭터 대신 김혜수가 보였던 것과는 반대다. 김혜수에게 〈내가 죽던 날〉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작품의 대사를 빌리자면, “생각보다 긴 인생”에서 배우로서의 김혜수를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말이다.
# 김혜수의, 김혜수를 위한

박지완 감독은 “김혜수에게 많은 빚을 진 영화”라고 했다. 김혜수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쓴 것부터 그렇고, 김선영, 문정희 등 많은 배우들이 김혜수와 함께 연기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흔쾌히 합류했다. 덕분에 신인 감독의 데뷔작임에도 캐스팅이 화려하다. 실제로 영화에는 해당 배우와 김혜수가 일대일로 만나게 되는 신이 많다. 김혜수와 대면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배우들을 위한 감독의 선물이다.

하지만 김혜수 스스로는 자신의 탄탄한 좌표로서의 힘에 대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의미를 부여해줘서 감사하지만, 우리의 영화”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중 그는 ‘우리’와 ‘함께’라는 말을 여러 번 썼다. 배우를 말할 때도 “우리 정은 씨”라고 표현했고, 고통의 무게를 설명할 때는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을 깊게 겪는다” 식으로 말했다. 무엇보다 “함께 만든 영화”임을 힘주어 말했다.

김혜수는 배우로서 롤 모델로 김혜자를 꼽았다. 김혜자에 대해 “그냥 우러러보게 되는 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혜수도 어느새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되어가고 있다. 1986년 그의 나이 16세에 영화 〈깜보〉로 데뷔, 연기 인생 35년 차인 그는 팜므파탈(〈타짜〉 〈관상〉 〈얼굴 없는 미녀〉), 코믹(〈굿바이 싱글〉 〈직장의 신〉), 느와르(〈차이나타운〉 〈미옥〉) 등 다양한 장르의 캐릭터를 통해 연기 변신을 거듭해왔다. 진폭 넓은 연기를 소화하면서 웬만한 영화제 상을 다 받은 ‘연기의 신’이 됐다. 게다가 독서왕인 그는 지성미에 예능감까지 더해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슈퍼스타’로 우뚝 섰다.



“어느새 롤 모델이 되어간다는 것”

연기력과 흥행력을 동시에 거머쥐며 대체 불가 배우가 된 김혜수. 이제 후배들은 그를 롤 모델로 바라보며 따르고, 그의 출연 소식만으로도 무조건 합류하는 배우가 됐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는 “남들이 저를 그런 대상으로 여겨주시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며 실감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선배 연기자들이 나를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인사를 똑바로 못” 하는 시간이 길었다고 했다. 지나친 자기 검열과 완벽주의, 겸손한 자의 자기 비하가 느껴지는 말이다.

자신감만으로 이 자리에 왔으면 지금의 김혜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뒤늦은 사춘기를 매섭게 겪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책을 읽고 시를 읽으며 배우로서의 우아함과 섬세한 감성을 다져나갔다. 인터뷰 도중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묻자, 그는 즉석에서 시의 앞부분을 외워서 들려줬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즈 글릭(Louise Gluck)의 ‘눈풀꽃(Snowdrops)’이라는 시다. 김혜수는 이 시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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