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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뭉근한 위로, 김혜수 上

"1년 넘게 내가 죽는 악몽을 꿨어요"

글 : 김민희 기자  / 취재지원 : 서경리 기자  / 사진제공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강영호 작가

브라운관의 김혜수는 낯설었다.
〈타짜〉나 〈관상〉, 〈미옥〉이나 〈차이나타운〉에서처럼 존재감만으로 영화 전체를 압도해버리는 김혜수는 없었다.
대신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찾아와버린 고통, 내 잘못이 아닌 인생의 무게를 감내하느라 분투하는 평범한 한 인간이 있을 뿐.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형사 ‘현수’로 분한 김혜수의 내면 연기는 잔상이 짙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김혜수에게서 현수가 보였다. 이제껏 무슨 작품을 해도 캐릭터 대신 김혜수가 보였던 것과는 반대다. 김혜수에게 〈내가 죽던 날〉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작품의 대사를 빌리자면, “생각보다 긴 인생”에서 배우로서의 김혜수를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말이다.
# 섬세하면서도 뭉근한 위로의 결

〈내가 죽던 날〉은 위로에 관한 영화다. 그 위로는 “내가 네 곁에 있어줄게” 같은 단선적인 위로가 아니다. “괜찮아, 잘될 거야” 식의 뻔한 ‘토닥임’의 위로도 아니고,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나도 그랬어” 같은 동병상련의 위로도 아니다.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위로하게 되는 ‘간접 위로’이자, 타인의 삶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적정 거리에서 건네는 뭉근한 위로다. 결국 ‘나를 구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면서.

이런 위로를 건네는 ‘현수’ 역에 김혜수가 아닌 다른 배우를 상상하기 어렵다. 박지완 감독 또한 “시나리오 단계부터 김혜수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썼다”고 했다. 이 작품의 위로는 자기 자신에게 깊이 몰입만 해온 사람이라면 표현하기 어렵다. 시선이 타인을 향해 있으면서, 공감력과 감정 이입에 능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또 공감력이 강하기만 한 여린 사람이어서도 안 된다. 넓은 마음 자락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포용력까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고통의 결을 읽어내는 섬세한 촉수를 가졌으면서도, 삶의 이면까지 헤아리는 마음 자락 넓은 위로. 흔들리면서도 단단함을 차근차근 쌓아온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위로의 깊이다. 이런 위로를 김혜수 말고 또 누가 할 수 있을까.

김혜수는 기자간담회에서 “영화의 다양성을 위해 이런 영화 하나쯤 있어도 되지 않을까”라고 했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죽던 날〉은 기존의 어떤 한국 영화와도 결이 다르다. 영화는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 ‘세진’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마주하는 삶의 진실을 다룬다. 외딴 섬에서 웃음기 하나 없이 펼쳐지는 영화는 전반적으로 우중충하다. 그런데도 마지막에는 뜨끈한 속울음을 삼키게 하는 감동을 안긴다. 좋은 시나리오와 배우의 호연이 주는 선물이다.

김혜수와 이정은의 조합은 압권이다. 말을 못 하는 순천댁 역을 맡은 이정은과 꼭 필요한 말만 뱉어내는 김혜수 사이에는 대화가 별로 없다. 말보다 눈빛이 더 많은 말을 한다. 김혜수는 이 영화를 통해 존재와 존재의 온전한 소통을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이정은과는 “눈만 마주쳐도 눈물이 났다”고 했다. 영화를 찍으면서 둘은 자주 그렇게 바라봤고, 자주 포옹을 했다. 말보다 눈빛의 언어, 몸의 언어가 더 진실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는 둘의 마지막 교류 장면을 꼽았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공감한다는 것”

“이정은 씨가 맡은 순천댁과 현수가 마지막으로 교류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서로 이 사건의 모든 진실을 대면하면서 비밀의 연대를 느끼는 순간이죠. 저 멀리서 정은 씨가 리어카를 끌고 오는데, 눈물이 났어요. 가까이 와서 보니 정은 씨도 똑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더군요.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어요. 현장에서 처음 경험하는 특별하고 복합적인 감정이었죠.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온전히 공감하고 공유하고 소통하고 연대한 느낌. 소중하고 완벽한 순간이었죠.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경이로운 정은 씨”. 김혜수가 이정은에 대해 한 표현이다. 그는 순천댁을 이정은이 맡게 됐다고 했을 때 마음이 쿵쾅거렸다고 했다. 작품을 오래 하면서 좋은 사람과 좋은 배우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는데, 이정은은 좋은 사람이자 좋은 배우라고 했다. 친구 민정 역을 맡은 김선영도 마찬가지다. “선영 씨와 함께한 공감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 운명같이 만난 작품

김혜수에게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가 또 있다. 〈국가부도의 날〉 촬영을 마친 후, 제안받은 여러 작품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그중 〈내가 죽던 날〉이라는 시나리오가 가장 위에 얹혀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운명이라고밖에 설명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했다.

“‘내가 죽던 날’이라는 제목이 줌인 되어 눈에 들어왔어요.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죠. 기분이 이상했어요. 장르가 뭔지, 어떤 역할인지 보기도 전에 왠지 이 영화를 해야 할 것 같은 운명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원래 글이 좋으면 그 감독의 전작 단편을 모두 보고 작품에 임해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생각도 못 할 정도로 글이 좋았죠. 나중에야 이 감독의 전작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무엇에 이끌리듯 하게 됐어요.”

작품에서 ‘죽음’은 하나의 은유다. 김혜수는 작품 속 ‘죽음’에 대해 “감정적 사형 선고를 스스로 내리는 것”이자 “내 마음이 죽어버린 날”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죽어버린 날”로 해석했다. 이런 해석은 ‘진짜 삶이란 뭘까?’ ‘내가 내 삶의 온전한 주체가 되어서 살지 못하면 과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우회적으로 던진다. 극 중에는 “내가 죽는 악몽을 자주 꾼다”는 현수의 대사가 있다. 김혜수의 실제 이야기를 작품에 그대로 녹여낸 부분이다.


“1년 넘게 내가 죽는 악몽을 꿨어요”

“한때 심리적으로 죽은 상태 같았어요. 꿈에서 내가 죽었고, 그 상태가 오래된 것 같았죠. 죽은 나를 보면서 무섭거나 그런 기분보다 ‘누가 나를 좀 치워주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을 매번 하면서 자다 깨다 했어요. 1년 이상 같은 꿈을 반복적으로 꿨죠. ‘내가 심리적으로 죽은 상태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나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다. 죽어 있는 나를 보면서 ‘누가 나 좀 치워주지’라는 무의식중의 생각은 결국, 크게는 구원, 작게는 연대의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김혜수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나의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심리적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극 중 현수와 배우 김혜수가 하나로 녹아드는 장치가 됐다. 현수는 세진의 실제적 죽음을 추적하면서 자연스레 김혜수 자신의 ‘감정적 죽음의 꿈’을 떠올렸다. “아무도 그 아이의 마지막 순간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죽을 애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단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절박한 대사는 결국,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내미는 SOS의 손길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를 선택했을 때 시기적으로 저 스스로 드러내지 못했던 좌절과 상처가 있었어요. 촬영하면서 함께하는 배우들을 통해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촬영 현장에서 따뜻한 연대감이 충만했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그는 신기하게도 ‘내가 죽는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됐다고 했다. 이 작품은 김혜수 자신의 이야기가 녹아든, 김혜수를 염두에 둔 영화지만, 정작 김혜수는 영화 속 좌절과 상처가 자신과 동일시되는 건 경계했다.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을 깊게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며 “누군가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죽던 날〉은 뚜껑을 열자마자 호평이 쏟아지고 있지만, 개봉까지 쉽진 않았다. 여성 서사 중심의 영화라는 점, 상업적인 소재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투자가 이뤄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시나리오의 어떤 부분을 수정하면 투자를 하겠다는 조건부 투자 제안도 받았다. 하지만 영화는 애초의 시나리오대로 용기 있게 밀어붙였고, 결국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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