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농사 짓는 뮤지션 루시드폴

글 : 이재훈 뉴시스 기자  / 사진제공 : 안테나 

‘푸른 밤’으로 기억되는 제주도. 제주의 채도를 감귤빛으로 물들이는 데 기여한 농부 중 한 명은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이다. ‘농부 뮤지션’의 미국 대표가 ‘아임 유어스(I’m Yours)’를 부른 제이슨 므라즈라면, 한국 대표는 단연 루시드폴이다. 사계절의 흐름에 따라 귤 농사를 짓듯, 그는 농부의 마음으로 음악을 짓는다. 노래에 담긴 그의 ‘제주살이’를 듣다 보면 마음도 제주 바다처럼 푸르러진다.
밤새 준비한 성긴 그물
작은 물고기는 놓칠 수 있게
그런데도 이렇게
좁은 이 배 한가득
채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5집 타이틀 ‘어부가’ 중


2011년에 발표한 정규 5집 〈아름다운 날들〉의 타이틀곡 ‘어부가’의 일부다. 부산에서 태어난 루시드폴은 애초부터 바다와 함께할 운명이었을까. 디지털 싱글 ‘물고기마음’을 발표하고 동명의 홈페이지를 운영해온 그는 물고기와 바다를 자신의 음악적 원천으로 끌어들였다.

‘어부가’는 그가 스위스에서 유학할 때 중국인 친구에게 받은 걸개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이다. 어부가 낚시하는 그림인데, 그림처럼 가사에는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다. 자연을 대하는 그의 마음은 물고기뿐 아니라 귤나무를 대할 때도 한결같다.

내가 루시드폴을 처음 만난 건 2011년이다. 이후 거의 2년마다 그를 만났다. 루시드폴은 2013년 말 정규 6집 〈꽃은 말이 없다〉를 내놓은 뒤 2014년 2월 제주로 이주했다.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그를 다시 본 건 2015년 12월 어느 새벽, 홈쇼핑 채널에서다. 잠결에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톺아봤는데 ‘음유 시인’으로 통하는 감성 싱어송라이터, 조윤석(루시드폴의 본명)이 맞았다. 방송 활동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그가 정규 7집 〈누군가를 위한〉을 알리기 위해, 더 정확히는 직접 농사지은 제주의 감귤을 알리기 위해 출연한 것이다.

홈쇼핑 채널이지만 루시드폴답게 평범하지 않았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귤 모양의 모자도 썼는데,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는 ‘귤이 빛나는 밤에’라는 콘셉트로 농산물과 음악을 결합한 상품을 소개했다. 7집 음반과 자신이 쓴 동화책 《푸른 연꽃》과 엽서, 제주에서 직접 재배한 귤 등을 묶은 패키지다.

홈쇼핑은 단순한 이벤트성 출연이 아니었다. 40분 동안 앨범 수록곡을 라이브로 들려주는 순서도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방송 채널에서 한 가수가 몇 곡을 연달아 부르는 프로그램은 흔치 않았다. 그의 출연은 큰 화제가 됐고, 반응도 좋았다. 한정판 앨범 1000장이 9분여 만에 동났다. 음반 마케팅의 혁신이었다. 홈쇼핑 출연 직후 만난 루시드폴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음반을 CD로 내면서 팬들이 재미있게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안테나 식구들이 나서서 도왔어요. 매니저는 물론 유희열 대표까지 제주로 내려와 귤을 따고 박스를 포장했습니다.”

겨울인데도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그가 인상적이었다. 음반 제작은 물론 판매 단계에까지 ‘제주 농부’의 마음이 배어 있었다.


제주살이가 바꾼 음악 색채


루시드폴의 제주살이는 7집 앨범부터 본격적으로 묻어난다. 그는 “제주로 간 것은 선택이지만, 귤 농사는 우연”이었다고 고백한다. 현지에서 집을 구하다 알게 된 이가 귤 농사의 매력을 알려줬고, 그는 농업 교육을 받으면서 ‘귤 농사 짓는 음악가’가 됐다.

7집에 실린 곡들의 제목에는 유독 쉼표가 많다. 앨범 제목 〈누군가를 위한,〉부터 타이틀곡 ‘아직,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 날이 저물 때’ 등이 그렇다. ‘쉼표’는 말 그대로 쉬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제목들이다. 제주살이와 농사는 그의 인생에서 쉼표가 됐다.

농부의 연간 스케줄을 줄줄이 말하는 그는 영락없는 농부였다. 2월은 루시드폴이 제주살이 중 유일하게 쉬는 달이다.

“2월은 보통 집에서 쉽니다. 세금 처리, 올해 농사 계획, 보조금·원금 신청 등 밀린 사무일을 하면서요. 또 1월에 채 못 딴 일부 파치(깨어지거나 흠이 나서 못 쓰게 된 것)를 마저 수확하기도 합니다. 3월이 되면 가지치기를 하는데, 꼼꼼하게 하려면 저희 부부가 꼬박 한 달을 공들여야 합니다.”


제주살이는 그의 음악 세계도 바꿔놓았다. 그는 고상한 노동을 하듯 음악 작업을 한다. 2017년 10월, 2년 만에 발매한 정규 8집 〈모든 삶은, 작고 크다〉는 그런 노동의 색깔을 압축한다. 루시드폴은 당시 음악 작업을 위한 오두막을 귤 농장에 손수 지었다. 작사, 작곡, 편곡은 물론 녹음과 믹싱 작업까지 이 공간에서 이뤄졌다. 농사짓는 일상을 에세이와 사진으로 남긴 8집에는 그의 이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앨범에는 제주도민의 도움의 손길도 묻어난다. 타이틀곡 ‘안녕’에 이상순이 일렉기타로 참여했다. 제주에 사는 가수 이효리의 남편, 그 이상순 맞다. 아홉 번째 트랙 ‘밤의 오스티나토’는 오두막에서 여름밤에 채집한 소리로 만든 곡이다. 풀벌레가 숲속을 가득 메운 어느 여름밤의 기억을 녹여냈다. 하지만 음원 사이트에서는 들을 수 없다. 오직 CD에만 실린 보너스 트랙이기 때문이다.

농부로서 그의 정체성은 음악인으로서의 정체성 못지않다. 그가 운영하는 감귤 과수원이 ‘무농약 인증’을 받았을 때의 그 환한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음원이 1위를 차지한 것 이상으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루시드폴의 생체 리듬은 이제, 농부와 음악가의 교집합이다. 그는 저녁 7~8시쯤 잠들어 새벽 3시쯤 일어난다. 집을 나서 농장에 도착하면 3시 30분쯤. 음악 작업은 새벽에 틈틈이 하는데 오전 9~10시 이후에는 노래 작업이 안 된다고. 트랙터 소리 때문이다. 그 소리는 그에게 농장 일을 해야 한다는 알람과도 같다. ‘음악인 루시드폴’에서 ‘농부 루시드폴’로의 전환을 재촉하는 알람인 셈이다.


반려견 ‘보현’이 직접 연주


지난해 말, 그는 제주에서 만든 정규 9집 〈너와 나〉로 돌아왔다. 이 앨범에서 루시드폴은 한 발 또 나아간다. 9집은 반려견 ‘보현’과 함께 만든 앨범이다. 이 앨범에는 “반려견이 뮤지션과 대등한 위치에서 음악을 만드는 주체로 참여한, 대중가요 역사상 최초의 사례”라는 설명이 따라다닌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으나 음원을 듣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앨범 곳곳에 보현의 흔적이 가득하다. 수록곡 ‘콜라비 콘체르토’부터 그렇다. 보현이 콜라비를 씹을 때 내는 소리를 채집해서 협주곡으로 녹여낸 곡이다. ‘그래뉼라 신테시스(granular synthesis)’ 기법을 통해 표현한 보현의 소리는 새로운 차원의 소리를 들려준다. 그래뉼라 신테시스는 소리의 작은 단위부터 출발해 이를 배열, 가공, 조합해 다른 차원의 사운드를 만드는 디지털 음악 합성 기법 중 하나다.

“‘콜라비 콘체르토’는 보현이 직접 연주하고, 넓은 범주의 의미에서 ‘작곡’까지 한 곡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편곡을 한 거죠. 반려견이 단순히 감상하는 존재가 아닌, 주체적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느낌을 싣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스페셜 앨범으로 내려다 보현의 참여 비중이 높아지면서 정규 음반으로 내게 됐다고 한다. 또 다른 수록곡 ‘산책 갈까?’ 역시 짖는 소리, 문을 긁은 소리 등 보현의 소리로 80%를 채웠다. 루시드폴의 동물권에 대한 존중은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는 보현의 저작권료를 관리하는 ‘보현이 통장’도 만들었다.

“보현이 통장을 직접 만들 수 없으니 제가 대신 관리해주고 있어요. 우리 어릴 때 부모님이 세뱃돈을 영원히 맡아주시는 것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할 거예요.(웃음)”


보현의 이름은 불교에서 실천의 상징인 보현보살에서 따왔다. 지금은 루시드폴의 부모님 집에 사는, 또 다른 반려견 ‘문수’ 역시 불교에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에서 가져왔다.

반려동물과 함께 입장할 수 있는 콘서트를 열고 싶다고 예고한 루시드폴은 이를 성사시켰다. 지난 1월 19일 대학로 파랑새극장에서 ‘킁킁콘서트×루시드폴’이라는 타이틀로 반려견 동반 콘서트를 진행했다.

9집에서는 점점 넓어지는 그의 음악적 반경이 느껴진다. 스웨덴 작곡가 루드빅 심브렐리우스와 협업을 통해 완성한 ‘산책 갈까?’는 산책을 떠날 때의 보현의 두근거리는 마음, 심장 소리가 킥 드럼 소리로 잘 표현됐다. 제주 목장의 새소리에서 시작해 스웨덴의 파도 소리까지 섬세하게 담아냈다.


세 번의 인생 변곡점


루시드폴은 공대생 출신이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스위스 로잔연방공대에서 생명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음악인으로 데뷔한 건 1998년 밴드 ‘미선이’ 1집 앨범 〈드리프팅(Drifting)〉을 발매하면서부터다. 한동안 그는 음악과 공부를 병행해나갔다.

루시드폴은 자신의 인생에서 세 번의 커다란 변곡점이 있었다고 말한다. 먼저 미선이로 활약하던 인디 시절이다. ‘음악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안테나뮤직의 수장인 유희열을 알게 됐고, 당시 소속사인 토이뮤직과 계약하면서 오버 그라운드로 진출한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연구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 음악가로 나섰을 때, 세 번째는 제주에 새 터전을 잡았을 때다.

최근 앨범을 찬찬히 들으면서 떠올린 곡은, 유희열의 2002년 편집앨범 〈어 워크 어라운드 더 코너(A Walk Around The Corner)〉에 실린 루시드폴의 ‘몽유도원’이다. 의식적인 음악 감상에 목적을 두지 않고, 환경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청취하게 되는 ‘앰비언트’ 장르의 음악이다. 루시드폴의 최근 앨범에 실린 ‘산책 갈까?’가 이런 풍이다. 이는 오래전부터 루시드폴 안에 잠재돼 있던 음악적 색채였다.

“연구원 시절, 스웨덴에서 스위스 취리히로 실험실을 옮겨온 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앰비언트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물소리, 바람소리를 채집해 음악으로 만들고 싶었죠.”

루시드폴은 삶의 소리를 음악으로 구현하고 싶어 한다. 삶 자체가 음악적으로 발화하는 셈이다.

“자연에는 귀를 아프게 하는 소리가 없어요. 날카로운 소리가 없기 때문이죠. 천둥소리가 굉음 같지만 귀를 아프게 하지는 않아요. 제주에서 유유자적하며 살면 자연의 소리를 많이 들을 것 같았는데, 최근에는 그렇지 않아요. 땅 파고 집 짓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들어요. 어디를 가나 공사를 하고 있죠. 그래서 더 자연의 소리가 생각나요. 보현이를 매개로 자연의 소리를 찾는 데 팔을 걷어붙일 생각입니다. 이번 앨범이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그에게는 제주 자연 자체가 일종의 오선지다. 다양한 사운드를 실험하는 ‘고요연구소’를 설립한 루시드폴은 “누군가 땅속의 미생물을 소리로 바꾸려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면서 자신은 “‘나무들의 노래’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숨어 있는 음표들을 찾아 그것을 소리로 들려주는 작업이다.

소리와 자연을 탐색하고 채집하는 루시드폴은 일면 호기심 많은 ‘탐험대장’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제주의 서정적인 면에만 매달리는 모험가는 아니다. 제주는 아픔의 땅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추방당한 이들을 가두는 유배의 땅이었고, 제주 4·3사건의 기억을 곳곳에 간직한 슬픔의 땅이기도 하다. 그는 제주의 환상적인 풍광뿐 아니라 제주의 슬픔도 함께 담아냈다. 7집에 실린 ‘4월의 춤’은 떠난 자의 영혼이 느껴지는 곡으로, 4·3평화공원을 다녀온 뒤 만든 노래다.


노래로 다큐를 만드는 사람


루시드폴은 만날 때마다 숙성된 인상을 준다. 정신적인 창작인 음악 작업과 육체적인 창작인 농사를 병행하며 뿜어내는 시너지 덕분인 듯싶다.

“농장에서 농사일을 하고 나무, 새, 벌레, 반딧불이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저를 가꿔요. 몰랐던 제 모습을 찾아가니, 음악도 자연스레 달라지죠. 영화 장르로 빗대자면, 저는 노래로 픽션이 아닌 다큐를 만드는 사람 같아요. 앞으로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이 공간에서 계속 농사짓고, 노래를 만들 겁니다.”

루시드폴에게 이제 제주는 삶의 터전이다. 그래서 그의 ‘제주살이’가 담긴 음악에는 고단한 바람을 견뎌낸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루시드폴은 자연과 문명의 다양한 요소들이 합창하는 제주의 섬세한 일상을 잡아내 공감대를 형성하는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의 음악 근육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
  • 2020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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