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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참 좋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다”

드라마 여신 박신혜의 스크린 적응기

사진제공 : 솔트엔터테인먼트
몇 번인가 베이커리에서 박신혜를 본 일이 있다. 좋아하는 빵을 골라서 계산대로 가지고 가 포장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CF의 한 장면 같다…기보다는 일상의 한 장면 같았다. 워낙 자주 오는 빵집이라 그런지 주변 사람들이나 직원들도 딱히 그를 연예인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우리의 이웃으로,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하고 빵 봉투를 들고 이윽고 합류한 부모님과 함께 빵집을 빠져나갔다.

“주말에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면 제가 먼저 나오거든요. 엄마는 성가대를 하고 계셔서 정리하고 나오면 좀 더 걸리세요. 그러면 엄마도 기다릴 겸 교회 앞 빵집에 가 있어요.”

SNS나 지인들을 통해서 ‘박신혜 목격담’을 보거나 듣게 되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그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돕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 등산을 가거나 여행을 가는 일도 즐긴다. 현재 가장 큰 고민 중에는 곧 있을 ‘부모님 결혼 30주년’에 ‘어떤 선물을 해드리면 좋을까’도 포함돼 있다. 그는 한국 여배우로는 최초로 2013년부터 4년 연속 ‘아시아 투어’를 하는 한류 스타다. 그러면서도 연예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자연인으로서의 박신혜의 삶과 누군가의 딸이자 친구인 그의 일상을 모두 잠식하지는 않게 하려고 한다.

“워낙 어렸을 때 데뷔해서 주변을 의식하느라 어깨도 펴고 다니지 못할 때도 있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얼굴이 조금씩 알려져서,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신경 쓰이더라고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을 사귀면서 달라진 것 같아요. 여고였는데 정말 학생이 많았거든요.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원래 제 모습을 찾게 됐죠.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게 됐고요.”

스물여덟인 그는 올해로 데뷔 15년 차 배우다. 열세 살이던 2003년 가수 이승환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면서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브라운관 안에서 보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지 않았다. 아역에서 성인 연기자로 성공적으로 넘어온 배우로 꼽혔고, 실제로 그가 출연한 드라마 <미남이시네요>, <피노키오>, <상속자들>, <닥터스> 등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는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어요. 실시간으로 반응이 오니까, 시청자와 함께 만든다는 느낌도 있고요. 우리가 치열하게 만든 이야기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 오는 희열이 있죠. 함께하는 분들과 ‘전우애’도 생기고요.”

드라마 쪽에서 박신혜가 갖고 있는 신뢰도는 높다. 일단 상대 배우와의 호흡이 좋다. <피노키오>에서 함께한 이종석, <상속자들>에서 함께한 이민호·김우빈 등은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남사친’이자 동료다. 함께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다, 시청률 면에서도 불패의 면모를 보였다. <닥터스>에서 김래원과 함께 출연해 나이 차를 뛰어넘어 사제지간에서 연인으로 변하는 모습을 위화감 없이 보여준 것도 박신혜의 저력이었다.


드라마 여신 박신혜의 스크린 적응기


영화 <침묵>의 시나리오는 <닥터스>를 마칠 때 즈음 찾아왔다. 드라마에서는 단련이 됐지만, 영화 쪽에서는 아직 신인 같은 마음이다. <해피엔드>, <은교> 등을 만든 정지우 감독의 작품인 데다, 최민식과 함께 출연하는 영화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긴장이 많이 됐다. 영화의 문법과 드라마의 문법은 다르다. 게다가 <침묵>의 최희정은 그가 그동안 드라마에서 보여준 얼굴과 다르다. 생활의 고단함을 알고, 배신의 쓴맛을 아는 얼굴이어야 했다. 커다란 스크린에 꽉 채워진 자신의 얼굴로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까가 새로운 숙제로 다가왔다.

“일단 영화는 만드는 과정 자체가 다르더라고요. 오랫동안 준비해야 하고, 호흡도 길죠. 무엇보다 너무 쟁쟁한 배우들이 함께한 작품이라 설레기도 했지만 부담도 많이 됐어요.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배우끼리 주고받는 에너지가 비슷해야 하는데, 제가 그러지 못할까봐 걱정도 많이 됐고요.”

<침묵>은 인물과 인물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영화다. 사건은 이 인물들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장치일 뿐이다. 인물 위주의 영화에서 중요한 건 당연히 배우다. 최민식은 ‘가장 완벽했던 어느 날 가장 소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남자 임태산으로 나온다. 박신혜는 최민식이 고용한 변호사다.


그가 연기하는 최희정 변호사는 관객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관객은 영화가 상영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박신혜와 한마음으로 보낸다. 임태산의 약혼녀 역할로 나오는 배우 이하늬와 그의 딸로 등장하는 이수경은 진실을 점점 미궁으로 밀어 넣는다. 박신혜는 이 두 사람의 에너지를 보는 것 또한 좋은 자극이었다고 한다.

“배우 중에서도 좋은 에너지를 가진 분들을 보면 자극을 받아요. 특히 수경이는 저보다 한참 어려요. 대부분 현장에서 제가 제일 어렸었는데, 이제 제가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입장이 된 거죠. 그런데 이 친구가 현장에서 정말 솔직하고 투명하게 연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저 나이에 저렇게 했나 싶을 정도로 충격이었죠.”

박신혜는 이제 더 이상 막내가 아니다. 그가 맡은 희정도 일종의 보호자이자 ‘해결사’ 역할이다. 이 역할의 중요함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긴장으로 뻣뻣해진 박신혜를 풀어준 건 최민식의 배려와 정지우 감독의 디렉션이었다. 이 두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서 ‘박신혜’가 아닌 ‘최희정’으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다. 이들은 박신혜에게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희정의 마음을 느끼고, 희정의 말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설계해 주었다.

“최민식 선배님과 함께하면서 제가 배운 건 그분의 그릇이 엄청 크다는 거예요. 정말 모든 걸 품을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장에서는 후배들이 긴장하지 않도록 정말 장난도 많이 치시고,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거든요.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는 완벽하게 임태산이 돼서 서 계세요. 그럼 저도 바로 희정이 되어서 들어가는 거죠.”


배우의 그릇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들이 항상 큰 건 아니었다. <뷰티 인사이드>에서 그는 수많은 우진 중 한 사람이었고, <상의원>의 중전은 슬픔을 품고 궁궐 어디쯤에 숨어 사는 가련한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박신혜는 그 역할들이 좋았다. 드라마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다른 얼굴로 서볼 수 있어서 좋았고, 영화 안에서 자신의 그릇을 넓혀가는 느낌이 좋았다고 했다.

“영화에서 반드시 주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를 바라고 의미 있는 역할이라면 작은 분량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에요. 실제로 최근에 제작된 영화 중에 제 또래의 여자 배우가 의미 있는 역할로 나오는 작품이 많지는 않았어요. 시나리오가 들어오긴 했지만, 누군가의 동생이거나 누군가의 연인으로 끝나는 작품이 많았죠. 그보다는 좀 더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역할이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기다렸고요.”

막상 <침묵>을 마친 뒤 박신혜는 생각이 더 많아졌다고 했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그릇의 크기를 다시 가늠해보는 시간이었다.

“저는 이 일이 참 좋아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고요. 그런데 <침묵>을 하면서 제 한계를 본 것 같기도 해요. 특히 법정에서 했던 신들이 기억에 남아요. 희정은 정의롭고 따뜻한 인물이지만, 절대 밀려서는 안 되거든요. 그런 기운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어요. 용의자에게 자백을 받아냈을 때, 연기인데도 소름이 돋더라고요. ‘내가 해냈어’라는 느낌도 들고요. 감독님께서 ‘오케이’ 컷을 하셨을 때 기분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나 박신혜가 빛나는 순간은 일상적인 장면을 ‘연기하는 느낌’이 아니라 ‘살아내는 느낌’으로 해낼 때다. 또래의 배우들이 가진 뾰족한 느낌과는 다른 아주 평범하고 아늑한 느낌이다.

“사실은,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속으로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 일상, 그런 평범함을 진짜같이 보여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요. 아주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도 많지만, 사실 저는 길가에 핀 민들레 같은 꽃들을 좋아하거든요. 언제 저런 게 있었나 싶은데, 어느 날 보면 피어있는 꽃이 있잖아요. 그런 소소하고 소박한 기쁨을 주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임팩트 있는 연기보다 그런 스쳐 지나가는 연기가 더 어려운 법이라고 배우들은 입을 모은다. 최민식은 박신혜와 호흡을 맞춘 뒤 “희정이처럼, 아니 희정이보다 더 따뜻하고 반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박신혜가 왜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배우인지를 알겠다고 했다. 정지우 감독은 희정을 힘들어하는 박신혜에게 “네가 한다면 사람들이 희정을 믿을 것 같다”는 말로 그를 설득하기도 했다.


길가에 핀 민들레처럼


대중이 박신혜에게 갖는 이미지가 있다.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도 있다. 밝고, 반듯하고, 명랑하고, 무언가를 해내는 21세기형 캔디의 얼굴. 박신혜는 그 얼굴이 고맙고 마음에 들지만, 거기에만 머물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 역시 화가 나면 분통을 터뜨리고, 한없이 우울하게 침잠할 때도 있다. 언젠가는 그런 연기로 자연스레 대중 앞에 설 수도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해본다.

“누군가의 무엇이기보다는 ‘중심이 있는’ 인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껏 해온 인물들도 그랬던 것 같아요.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사랑에만 목을 매는 인물은 아니었어요. 자신의 삶도, 주변의 가족도 소중하게 여겼죠. 앞으로 제가 맡게 될 역할이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소중한 이들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었으면 좋겠어요.”

<닥터스>의 혜정은 응급실에 들어온 괴한을 발차기로 제압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침묵>의 희정은 거짓의 덫에 걸렸으나 그 덫에 갇히지 않는 인물이다. 자신이 놓친 진실이 무엇인지 끝내 찾아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박신혜가 맡은 인물들은 선하고 반듯하지만, 유약하지 않다. 이들은 선을 지켜내기 위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박신혜도 그렇다. 좋은 이미지를 지켜내기 위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앞으로 제 바람은 더 진솔하고 솔직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영화는 그런 면에 더 가까운 매체인 것 같기는 해요. 그러려면 저 스스로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죠?”

영화를 보고 나온 어느 날, 어느 빵집에서 박신혜를 또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도 그는 정성껏 빵을 고르고,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건네고 빵집을 나설 것이다. 알아보는 이들과 사진을 한 컷 찍을 수도 있고, 그날의 상태가 SNS에 공유되기에 부적합(?)한 모습이면 웃으며 사양할지도 모른다. 아주 화려한 연예인의 삶과 아주 보통의 삶을 함께 잘 살아내는 그는 결국 그 균형추가 자신의 중심에 있다는 걸 안다. 그 중심에 그가 아끼는 꽃이 ‘민들레’라는 건 퍽 고운 일이다.
  •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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