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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은 두 번이나 그를 소환했다

여성액션의 신세계를 연 배우 김옥빈

용감한 사람은 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겁나더라도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김옥빈은 독보적으로 용감한 배우다. 여성 누아르 액션영화 〈악녀〉에서 킬러 숙희 역을 맡아 마을버스, 오토바이, 자동차 보닛 위에서 쌍검, 도끼, 장총 액션을 직접 소화한 김옥빈을 만났다.

사진제공 : NEW
김옥빈은 자기 이름을 쓴다. 그에게는 옥의 성격과 빈의 성격이 두루 있다. 그의 말마따나 시골 솔(soul)이 담겨 있는 곳은 단단한 ‘옥’, 그리고 도시적인 차가움이 묻어 있는 곳은 ‘빈’이다. 〈악녀〉의 정병길 감독은 “김옥빈이 가진 세련되면서도 촌스러운 느낌이 좋았다”고 했다. 김옥빈은 전라남도 광양에서 자랐다. 영화를 보려면 한 시간은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마을이었다. 집에는 부모님이 보던 홍콩 영화 비디오가 쌓여 있었다. 〈동방불패〉의 임청하를 흉내내며 놀던 아이는 하굣길에 날이 더우면 계곡에 들어가 멱을 감았다. 운동을 좋아하고, 몸 쓰는 데 재능이 있던 김옥빈은 도장에 가서 태권도와 합기도를 배웠다. 좀 더 커서는 바이크를 타고 무아이타이(무에타이)도 익혔다.

김옥빈에게 한국판 ‘킬빌’이라 불리는 〈악녀〉를 맡겨두고, 감독은 웬만한 액션신은 “그냥 옥빈씨가 해줘요”라고 했다. 그럼 또 김옥빈은 “네. 제가 할게요”라고 받았다. 그건 의지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다. 재능과 기술이 따라줘야 한다. 123분의 러닝타임 동안 유혈이 낭자하는 이 영화에서 숙희(김옥빈)는 혈혈단신으로 싸운다. 그의 쌍칼, 도끼, 단검에 약 70명의 장정의 숨이 끊어진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시작되는 숨 가쁜 액션은 95%가 김옥빈이 직접 소화했다. 숙희는 영화의 액션뿐 아니라 감정신도 이끄는 존재다. 〈악녀〉는 역설적으로 “무엇이 여자를 악녀로 만들었는지” 질문하는 영화이고, 김옥빈은 여기에 온몸으로 대답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김옥빈이 영화에서 몸을 사리지 않은 건 처음이 아니다. 그의 인생작이 된 박찬욱 감독의 〈박쥐〉의 태주나 드라마 〈유나의 거리〉의 유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수긍하지 않고 운명 바깥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김옥빈의 거리’는 보통의 여배우들이 가지 않은 길이었다. 작품 속에서 그는 흡혈귀이거나, 소매치기였고, 심지어 그의 장편영화 데뷔작은 〈다세포 소녀〉였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씩씩하게 헤쳐 나가는 그를 응원이라도 하듯, 칸 영화제는 그를 두 번이나 소환했다. 〈박쥐〉로 한 번, 〈악녀〉로 또 한 번. 〈박쥐〉의 박찬욱 감독은 올해 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그는 〈악녀〉로 칸 레드카펫을 밟은 김옥빈에게 누구보다 뜨거운 박수를 보내줬다.

“처음 칸에 갔을 때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다 몰랐던 것 같아요. 그저 제가 너무 사랑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 흥분 상태가 그대로였어요. 제 삶에 그렇게 모든 걸 불태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부은 영화였거든요. 이번엔 제대로 즐기고 오자고 벼르고 갔죠. 가자마자 박찬욱 감독님부터 만나 술잔을 기울였어요. 제가 감독님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제시카 차스테인의 엄청난 팬이거든요. 그 배우의 모든 작품을 봤어요.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감독님이 만나게 해주시겠다는 거예요. 근데 다음 날까지 제 짐이 도착을 안 해서 그날 못 간 거 있죠? 숙소에 발이 묶여 있었어요. 말도 안 되죠. 제시카 차스테인을 만날 기회였는데!”

입을 열자마자 쌓아둔 이야기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칸 영화제에서의 조우는 배우 김옥빈에게나 박찬욱 감독에게나 뜻깊었을 것 같다고 했더니 나온 대답이다. 김옥빈이 어찌나 아쉬워하던지 인터뷰를 마치고 제시카 차스테인의 작품을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생겼다. 김옥빈이 팬심을 감추지 않는 이 배우는, ‘용감하다’는 면에서 김옥빈과 행보가 비슷하다. 그는 〈인터스텔라〉 〈마션〉에 출연해 의미 있는 연기를 보여줬고, 〈미스 줄리〉와 〈미스 슬로운〉에서는 타이틀롤로 흔들림 없는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칸 영화제 심사를 마친 뒤, “영화를 통해 세계가 여성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더 잘 알게 됐고, 그것은 좀 충격적이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더불어 이런 장벽을 넘기 위해서 여성 창작자들이 주인이 되어 이야기를 만들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영화 〈악녀〉
김옥빈은 여기에 동감한다. 이를 악물고 액션신 모두를 소화한 것도 “여배우라 안 된다”는 장벽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장을 깨듯 금녀의 장벽을 넘어서면, 자신 이후에 오는 배우들은 좀 더 수월한 길을 가리라 생각했다. 지금이야 “턱이 네모가 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는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이야기지만, 현장에서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회차에 숙희가 등장한다는 건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었죠. 이런 시나리오를 너무나 기다렸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까, 체력뿐 아니라 정신력도 필요하더라고요. 동료들이 다 떠난 뒤에도 저 혼자 촬영하는 신이 많았어요. 그때는 정말 외로웠어요. 연기를 통해 감정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혼자 뛰고 구르고 찌르고 막아야 했으니까요.”

그럴 때 힘이 되어준 사람이 배우 신하균이었다. 〈박쥐〉 〈고지전〉에 이어 세 번째 만남이다. 인물의 감정선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감독이 아니라 신하균을 찾아갔다. 정병길 감독은 액션에는 치밀하게 공을 들이되, 감정은 배우들에게 맡겼다. 어려서 아버지가 무참히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고, 조선족 조직의 킬러로 자란 숙희에게 조직의 보스인 중상(신하균)은 애정과 증오의 존재였다.

영화 〈여고괴담〉
“인물 간에 감정이 다르면 액션도 달라져요. 숙희가 다른 사람들과의 액션에서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지만, 중상과의 액션은 달랐어요. 둘은 사랑했던 사이니까요. 격렬하게 싸우더라도 그 액션의 느낌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죠.”

〈악녀〉를 위해 훈련한 기간은 3개월 남짓이다. 매일 액션스쿨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날마다 훈련 영상을 SNS에 업로드했다. 〈악녀〉의 메이킹 영상을 보면 제작진이 “액션팀보다 김옥빈이 더 잘한다”면서 혀를 내두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도리어 김옥빈은 훈련한 모든 것들을 영화 속에서 다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는 반응이다. 복면을 쓰고 있을 때나, 헬멧을 쓰고 있을 때도 대역을 쓰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몸태가 다른 게 티가 나거든요. 옷이 얇으니까 대역을 쓰는 데도 한계가 있었어요. 정병길 감독님이 워낙 액션에 조예가 깊기 때문에 새로운 액션이 많이 나왔어요. 처음에는 주인공이 여자니까 좀 더 섬세하고 날렵한 액션을 쓸 줄 알았는데, 완력도 쓰고 기술도 쓰고, 장비도 다룰 줄 아는 액션이 다 들어 있더라고요.”

영화 〈박쥐〉
김옥빈은 2005년 〈여고괴담 4〉로 처음 등장했다. 당시 그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관심이 있었지만 쑥스러워서 말하지 못했다. 괜히 운동을 하고 몸을 쓰면서 개구쟁이로 지냈다. 중·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연극반 생활을 했다. 그때 무대에 서본 경험은 “연기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열아홉, 혼자 무작정 서울에 올라왔다. 오직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결심 하나로 감행한 용감한 행보였다.

“처음에는 고모 댁에서 지냈어요. 그러다가 좀 더 서울의 중심과 가까운 이모 댁으로 옮겼죠.(웃음) 그러다가 서울 인근에 고시원을 얻어서 생활했어요. 대학로에 있는 연기학원을 다녔고요. 그때 같이 고시원 생활을 하던 여고생들과 친구가 됐어요. ‘나는 나중에 배우가 될 거야. 배우가 되려고 서울에 왔어’라고 말했고, 친구들이 응원해줬어요.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아요. 아, 옛날 생각나네요.(웃음)”


하나에 꽂히면 끝을 봐야 한다


친구의 오디션장에 따라갔다가 우연히 지원서를 쓰고 친구가 아닌 자신이 합격했다는 이야기나, 길에서 우연히 캐스팅 됐다는 ‘흔한 데뷔담’은 김옥빈에게는 없다. 그는 심장이 울리는 소리를 따라 광양에서 서울에 왔다. 한동안은 서울 언저리를 떠돌며 연기를 배웠다. 오디션을 봤고, 훈련을 했다. 그렇게 얻은 기회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김옥빈을 만들었다. 사실 김옥빈은 하나를 하면 끝을 보는 스타일이다. 컴퓨터를 좋아해 지금은 해커에 가까운 실력을 갖고 있고, 자동차를 좋아해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 레이싱을 즐긴다. 록을 좋아해 직접 밴드를 만들고 보컬을 했을 정도다.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해보는 스타일이에요. 배우도 한 사람한테 꽂히면 그 사람이 나온 거의 모든 작품을 찾아 봐요. 〈악녀〉를 하기 전에는 동서양의 여성 액션영화는 거의 다 찾아 봤어요. 아주 오래된 영화부터 드라마까지요.”

한때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 전보다 떨어진 게 아닌가 싶어 고민하던 날도 있었다. 한번 시작하면 모든 걸 불태워야 직성이 풀리는 이 배우는, 한 작품에 온전히 모든 것을 쏟아붓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괴로웠다. 그런데 작품이 쌓이고 나니, 각각의 작품마다 고유한 성격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모든 부분에 다 꽂히지 않더라도, 하나에 꽂히면 그 부분을 깊게 파면 된다는 걸 깨쳤다.

“배우는 선택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안에 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요. 적어도 스스로는 알거든요. 내가 얼마만큼 노력했는지를요. 거기에 대해서 후회가 없으면, 작품이 끝나도 미련이 안 남는 것 같아요.”


〈악녀〉의 숙희는 김옥빈이 한국 영화에서 할 수 있는 어떤 부분을 증명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김옥빈은 소화할 수 없는 어떤 캐릭터를 기어이 소화해내는 능력을 지녔다. 그건 일종의 초능력에 가까운데,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인물을 이 세상 사람으로 만드는 ‘그 어려운 일’을 김옥빈은 해낸다. 그러고는 ‘푸흐흡’ 소리를 내며 웃는다. 김옥빈은 언젠가는 자신의 고향 근처나 고향의 풍경과 비슷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살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가진 ‘시골스러움’이 그에게는 ‘사랑스러움’의 다른 말이다. 그 풍경이 그리워서 지금도 자주 고향에 내려간다고 했다.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게 제게는 엄청난 자산이에요. 남들과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힘도 거기 있는지도 몰라요. 저는 주어진 길을 가거나 누가 만들어준 세계에 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맡는 작품 속 인물들도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선택을 주체적으로 하길 바라죠. 목소리를 내길 바라고요.”

결국 그 선택의 끝이 파국으로 마친다고 해도, 그 결론까지 받아들이겠다는 게 김옥빈의 포부다. 정병길 감독은 “내가 여자 액션영화를 한다고 하니까 한국에서 ‘과연 되겠느냐’라는 주변의 우려가 컸다”며 “그런 우려를 들으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 들더라”고 말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왜 안 돼?’라고 물은 이들이 있다. 그 질문에 온몸으로 답한 김옥빈 덕분에, 우리도 꽤 근사한 여성 액션영화를 갖게 됐다.
  • 2017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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