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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게 해주고 싶고, 저를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요”

영화 〈어느날〉의 주인공 배우 김남길

연기 경력 14년 차인 이 배우의 이미지는 차갑고 어둡다. 그런데 그를 막상 만나보니 장난스럽고 심지어 수다스럽기까지 하다. 때로는 진중하다. 혹시 “이것도 연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변화무쌍한 얼굴을 보여준다. 그는 배우다. 배우에게는 보여주는 삶 전체가 연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천생 배우다.

사진제공 : 인벤트스톤, 오퍼스픽쳐스
“오빠, 가만히 좀 있어!”

김남길(37)에게 천우희(30)는 이렇게 말했단다. 진중하고 외로운 캐릭터를 주로 맡아온 김남길은 왠지 해야 할 말 그 이상은 하지 않을 것 같고, 예민한 성격을 갖추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기자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그는 수다스러웠고 한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 장난기를 자랑한다. 한 질문에 5분 이상 답하는 것은 물론, 간간이 농담을 섞었다. 천우희는 김남길이 촬영장에서 ‘대장’ 같은 존재라고 했다.

“예전부터 촬영 현장에 가면 분위기를 띄웠어요. 일하는 환경 자체가 힘들 순 있어도 사람들끼리는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카메라 앞에 지나다니는 게 원래 안 좋은 건데 전 카메라 앞에 앉아서 ‘앞으로 좀 밀어봐~’ 하면서 장난치고 그래요. 오지랖도 넓은 편이라 촬영 전에 여기 살짝 저기 살짝 왔다 갔다 하다가 ‘슛 들어간다’고 하면 ‘이제 할까?’라고 하는 스타일이죠.”


김남길과 천우희가 주연을 맡은 영화 〈어느날〉(4월 5일 개봉)은 아내가 죽고 난 뒤 절망감에 휩싸인 보험회사 과장 강수(김남길)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시각장애인 미소(천우희)의 영혼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강수는 미소의 사고 조사를 위해 병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스스로 ‘미소’라고 주장하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자꾸만 자신에게만 보이는 미소를 수상하게 여긴 강수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고도 어두움 없이 자란 미소는 차츰 강수의 웃음이 되어주고,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동반자가 된다.

강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김남길과 천우희, 여기에 주로 남녀의 멜로에 두각을 드러냈던 이윤기 감독의 조합이 돋보인다. 〈여자, 정혜〉(2005), 〈멋진 하루〉(2008), 〈남과 여〉(2015) 등을 연출했던 이윤기 감독이 다소 색다른 화법을 선보였다.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를 지우고 판타지를 가미해 무거운 소재를 가볍게 풀어냈다.


김남길 역시 이윤기 감독의 모든 작품을 봐온 관객 중 한 사람으로서 〈어느날〉이 남녀 간의 일반적인 멜로로 그려질 줄 알았단다. 지난해 개봉했던 이윤기 감독의 〈남과 여〉 때문에 “천우희랑 격정멜로를 하는 거냐”는 얘기도 들었다. 그는 “이윤기 감독님의 전작에서 오는 기대치 때문에 멜로를 생각하는 것 같다. 남녀가 나오지만 사랑이 아닌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영화가 방향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윤기 감독으로부터 〈어느날〉 출연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김남길은 거절했다. 아내를 잃은 주인공의 상황이나 심정에 십분 공감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시나리오를 다시 읽었을 때 그는 눈물을 쏟았다.

‘이 친구, 참 안타깝다.’

인물의 아픔을 이해했고, 그 감정을 관객에게도 전달하고 싶어졌다. 그는 “영화에 대한 강박증이랄까. 영화는 묵직하고 사실적인 걸 많이 다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어느날〉에서 장치적인 요소로 ‘판타지’가 들어간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강수의 아픔이 공감은 됐지만, 어떻게 표현할지가 고민이었다. 이 영화는 ‘어른 동화’ 같은 느낌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서 보니까 유독 그때 당시 강수가 가진 아픔들이 더 와 닿았다. 내가 느낀 정서를 관객들께 전달하고 싶었다. 이윤기 감독님이 이걸 어떻게 풀지에 대한 기대치도 있었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삶은 계속 이어가야 하죠.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짠함’이라고 할까요. 우리 다 그렇게 살잖아요.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일부러 더 밝게 지내려 노력하죠. 누구나 아픔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 않나요? 좀 더 용기 내서 밝게 살자는 거예요. 다함께 더불어 잘사는 사회 말이에요. ‘너도 이제 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게 우리 영화가 하려는 말인 것 같아요.”


아내가 죽은 후에도 강수는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간다. 울지도 않고 종종 웃기도 한다. 김남길은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내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럴까 싶더라. 구두에 깔창을 깔고 그러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그러시더라. ‘아내가 죽으면 깔창을 못 해? 그럼 나쁜 거야?’ 생각해보니 그렇더라. 그게 강수의 성격인 것 같다. 아픈 사람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강수는 겉으로 보기엔 강하고 거칠지만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나약한 자신을 감추고 산다. 상처를 직시하지 못하고 외면하는 강수와 달리 실제의 김남길은 유쾌하고 적극적이다. “나는 긍정적으로 뭐든지 돌파하는 스타일이다. 강수는 죄책감도 있고, 어떻게 보면 용기가 없는 친구다.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회피하니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강수가 아내와의 추억을 회상하는데 계속 아내를 보다가 마지막에 자신을 보더라. 짠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거니까”라고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설명했다.

“요즘은 이야기에 힘이 있는 작품에 많이 끌리게 되더라고요. 〈어느날〉에서는 각자 하나씩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픔을 용기 있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에 대한 영화예요. 결국 ‘아픔’과 사람이 가진 상실에 대한 이야기죠. 강수라는 캐릭터를 찾아봤을 때, ‘상처받은 치유제’라는 설명이 있더라고요. 자기 연민과 아픔을 강수와 미소가 서로 배려하면서 아우르고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김남길의 연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무뢰한〉(2015), 〈판도라〉(2016) 등과 달리 힘을 뺐다. 최대한 담백하게 표현하려 했다. 그는 “과거 작품들에선 고독하거나 센 느낌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는 전체적인 이야기에 중심을 두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느날〉 속 강수를 표현하면서 “어디서 봤을 법한 연기, 편안함에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한때 장첸과 양조위를 롤 모델 삼았던 김남길은 상처와 카리스마가 있는 캐릭터들에 꽂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 〈선덕여왕〉(MBC), 〈나쁜 남자〉(SBS), 〈상어〉(KBS2)에서 연기한 캐릭터들은 죄다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연기에 힘을 빼야겠다고 처음 생각한 건 〈해적〉 때였다. ‘연기라는 게 내게 맞지 않는데 억지로 부여잡고 있는 건 아닌가. (배우를)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무뢰한〉을 하며 다시 연기에 재미를 느꼈다. 내가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고독하거나 센 느낌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그땐 뭘 모르니까 일단 힘을 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디테일보다 큰 그림을 보는 편이고 이야기의 흐름을 보고 연기하게 된 것 같아요. 울 때도 격하게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천천히 젖어드는 느낌으로 연기했어요. 대사나 눈빛을 통해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옆모습이나 뒷모습, 혹은 걸음걸이를 활용한 장면도 많았죠.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어요. 내 얼굴과 표정을 보여주고 싶은데, 옛날 감성을 가지고 있는 감독님께서 사람이 울고 아픔을 표현하는데 정면으로 촬영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어요. 반면 저는 뒷모습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죠. 관객들이 몰라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거든요. 막상 연기를 해보니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장면들이 좋은 것 같아요.”

매번 작품을 촬영하면서 자신의 성장을 느낀다는 김남길은 “작품과 인물을 이해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경험도 끄집어내고 돌아본다”고 했다. 그는 “〈어느날〉을 찍을 땐 내가 관계를 어떻게 맺어왔는지를 돌아봤어요. 〈판도라〉 때는 정치·사회·경제 이슈를 고민했고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연기하면서 제 자신도 발전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한 가지 사안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습관도 생겼고요.

“그런 과정을 통해 생각이 바뀔 때도 있어요.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하게 되고요. 어느 순간부터 질문에 확답을 내리지 않게 됐어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란 말을 실감하고 있어요. 신념이란 게 달라질 수 있더라고요. 한때는 이거 아니면 죽을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를 느껴요. 예를 들면, 옛날에는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처럼 살았던 적도 있고 어느 순간 순정파로 바뀐 적도 있어요. 사람이 상대적인 거잖아요. 어떤 사람을 만날 때는 나쁜 남자도 되고, 어떤 사람을 만날 때는 순정파도 되고. 둘 다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김남길은 2003년 MBC 3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어떤 캐릭터든지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는 게 연기자로서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한다. 지난 십여 년간 거친 질감의 형사, 거지 차림을 한 파락호, 재벌 2세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그리고 〈선덕여왕〉으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김남길은 그간의 연기 생활 중 갑자기 유명해진 그때에 대해 “데뷔 초에 주목을 받았다가 잊힌 일이 있어서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고 고백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준비를 많이 했어요. 〈선덕여왕〉 때 잠깐 인기를 누려본 뒤로 쭉 내려올 준비를 했던 것 같아요. 막상 경험해 보니 잘 내려오고 말고가 없이 추락하는 건 한순간이긴 했지만요. 제가 만년 충무로 블루칩이잖아요. 잘되는 것보다 별일 없이 지내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10년 뒤에도 철들지 않은 배우로 남아 있고 싶어요. 너무 생각이 많아지면 내가 ‘나로서 살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남길만의 고유함, 그건 지키고 싶어요.”

“내가 나로서 산다는 게 뭐냐”고 물었다. 김남길은 “예전에는 연기하는 것 자체가 좋았는데 언제부턴가 무섭고 두려웠다. (대중에게) 보여지는 직업이다 보니 때로는 빈껍데기인 채로 사는 듯한 느낌도 들더라”며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지고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해지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한때 과호흡 증세로 보름간 병원에 입원했고, 어지러움을 자주 느끼는 메니에르 증후군도 생겼다. 다행스럽게도 컨디션 회복은 빠른 편이란다. 브레이크 없이 계속 달려와서 지친 것 아니냐고 물어봤다. 김남길은 “그런 것 같다. 사람에 대해 지치고 건강도 안 좋아지니 몸도 지쳤다. 촬영장 가는 게 즐겁기만 했는데, 지금은 두려운 생각도 든다”고 했다.

“요즘은 쉽지가 않네요. 제가 겁쟁이처럼 느껴져요.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맞닥뜨려야 하는데, 핑계를 대면서 피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제가 긍정적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될 것 같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에게 억만금이 있어도 배우를 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몸이 안 좋아지다 보니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내가 나를 위해 산다는 생각이 안 들 때가 있거든요. 등 떠밀리듯이 사는 것 같아요. 스트레스 없이 여행을 다니며 편하게 지내고 싶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게 해주고 싶고, 저를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스스로를 좀 더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 2017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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