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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흔적’을 지우는 배우

‘잘생긴 정우성’은 없다

1990년대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정우성(43)은 박제된 아이콘이나 다름없었다. 현실의 그는 이미 불혹(不惑)의 나이를 넘겼지만 대중은 그를 여전히 청춘이자 스타로 소비해 왔다. 정우성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은 아직도 〈비트〉(1997)의 ‘민이’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민이가 쓰러진 다리 밑에서 정우성은 몸을 훌훌 털고 일어나 한참을 걸어왔다. 동네 백수(〈똥개〉)서부터 출장비를 부풀리는 회사원(〈호우시절〉)까지 연기하면서 그는 온몸으로 발산하던 청춘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개봉한 〈아수라〉에서 삶에 찌든 중년의 악역으로 나타났다.

사진제공 : CJ엔터테인먼트
생존을 위해 더 악랄해지는 중년 연기

정우성이 맡은 한도경은 추악한 주변 상황과 더불어 악인이 되는 인물로, 생존을 위해 점점 악랄해지는 캐릭터다. 그는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악덕 시장 박성배(황정민 분)의 뒷일을 처리해주면서 돈을 버는데, 더럽고 치욕적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정우성은 한도경이란 캐릭터를 파고들수록 “스트레스가 왜 이리 많을까”란 느낌에 지배당했다. 답은 가상 도시 안남의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뻔뻔하게 폭력과 악행이 저질러지는 공간에서 도경은 살아남기 위해 더 악해질 수밖에 없고, 더 악해질 준비를 하는 인물이었다. 일상에서의 책임이 그를 극한의 스트레스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는 “영화 하는 사람으로서 업계 동료에게 ‘부럽다’는 얘기 듣는 게 가장 최고의 찬사다. 이 영화 시사회가 끝난 후 그 얘길 많이 들었다. 강한 인상을 줬다는 것이다. 기쁘다”라고 했다.

“사회 시스템이 개인을 어떻게 악하게 혹은 희생자로 만드느냐를 드러내고 싶었어요. 도경의 스트레스 안에 있었기에 현장에서 늘 찌든 채 있었어요. 누구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하는데 오죽했으면 술 먹고 감독님께 ‘형, 힘들어 죽겠어요’라고 하소연했을까요.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그게 한도경에 대한 감독님의 디렉션이었나 봐요. 이를 갈면서 잘 만큼 역대 작업 중 가장 고됐죠.”

‘잘생긴 정우성’ ‘멋진 정우성’을 생각하고 이 영화를 본 관객에게 대사의 절반을 욕으로 채운 정우성이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욕을 안 해본 남자가 ‘욕 연기’를 하는 것 같다”는 반응도 있었다.


기존 이미지를 깨기 위한 몸부림


그는 “저의 기존 이미지 때문인데 그걸 깨야 하는 게 〈아수라〉에서 배우 정우성의 숙명과 같은 숙제였다. 영화 들어가기 전 김성수 감독의 명령이기도 했다. 정우성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한도경을 만들라고 하셨다. 정우성의 기존 이미지만 규정 짓고 오시면 영화관을 막 나설 때 낯설 수도 있다. 친한 감독들도 초반엔 얼떨떨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한도경이구나’ 싶을 거다”라고 했다.

“카메라 앞에서 내가 얼마만큼 치열하게 캐릭터를 완성해나가는지 보여주겠다는 결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힘들어서 그런 성취마저도 느끼고 싶지 않았지만(웃음). 그런데 감독님과 동료 배우들이 좋다고 얘기해주는 걸 보며 ‘잘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얻은 큰 에너지로 계속해서 한도경으로 빠져들 수 있었어요.”

영화 〈아수라〉
〈아수라〉의 시나리오가 나오기도 전 정우성은 ‘김성수’란 감독의 이름 석 자만 보고 덥석 참여했다. 1997년 〈비트〉로 청춘스타 정우성을 만들어준 은인이고 〈태양은 없다〉 〈무사〉로 인연을 이어왔던 감독의 명성을 지켜줄 작업이란 사명감 때문이었다. 15년 만에 만난 김성수 감독의 에너지는 파워가 예전 그대로였다. “징하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비타협적으로 계속 배우들에게 질문하고, 배우가 낼 수 있는 소리와 반응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역할을 능란하게 하는 것도 여전했다. 그는 “이번 영화에선 신기하게 특정 장면이 인상적이기보다 감독님의 세계관이 큰 인상적 신으로 남는다. 현실에서 행해지는 구조적 폭력이 얼마나 아프고 처참한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의 연속이 아닐까”라고 했다.

“감독님이 공백이 길었기에 어떤 시나리오든 잘하고 싶었죠.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고선 정말 당황했어요(웃음). 왜 정형화되거나 관습적인 스토리가 아닐까, 왜 이리 비뚤어졌을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궁금했죠.”

영화 〈아수라〉
영화의 완성도나 재미에 대해서는 평론가와 관객들의 평가가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황정민, 주지훈, 곽도원, 정만식 등 활화산 같은 배우들이 뿜어내는 지옥도 같은 연기 향연에 모두가 환호를 보낸다. 실제 경험한 배우의 입장에서도 그 감동은 꽤나 묵직해 보인다. TV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 함께 출연한 얘기를 꺼내자 정우성은 “즐겼는데 재밌게 봐 주셔서 감사하다. 〈아수라〉 팀은 무슨 일을 해도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영화 촬영 내내 연기에 있어서는 어떤 배려도 하지 말고 치열하게 하자는 마음이었다. 다들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서 하모니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짜릿했어요. 서로 보고 느끼면서 연기했고, 저도 자극이 되며 배웠죠. 모두가 그런 대상들이었어요. 정민이 형은 뮤지컬 〈오케피〉 스케줄과 겹치는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자기에게 할당된 시간 안에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박성배를 만들어 가더라고요. 사랑할 수밖에 없는 형이에요. 저희들의 곁에 오래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도원이는 얼굴 표정이 컴퓨터 모핑된 듯한 흐름이 있어요. 그런 기이한 형태에서 분출하는 에너지가 상대 배우에게 영향을 미치고요.”

영화 〈아수라〉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남자 배우로 꼽히지만 흥행 성적에서 두각을 드러낸 적은 없다. 〈아수라〉는 10월 10일 현재 누적 관객 수 300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란 점을 감안하면 선전한 편이지만, 기대에는 못 미치는 수치다. 〈아수라〉 개봉 전에도 그는 “흥행을 예측할 순 없지만 분명히 동료나 후배 배우들에게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구나’라는 힘을 줄 수 있는 영화라는 것만큼은 자부한다”고 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지 않나요. 1년에 한두 편씩 1000만 영화가 나오니까 나도 한 번은 해야 할 것 같고, 그렇지만 사실 1000만이라는 게 정말 엄청난 숫자잖아요. 흥행보다는 내가 지치지 않고 열심히 영화를 찍는 것이 중요해요. 저는 이미 많은 분들에게 분에 넘치는 찬사를 받은 배우입니다. 1000만이라는 흥행이 주어지면 좋은 선물이지만 그것 자체에 욕심을 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저는 1000만 영화를 알아보는 선구안도 없어요.”

정우성이란 이름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의 외모다. TV 예능 프로그램이나 영화 제작보고회에서는 언제나 그가 얼마나 잘생겼는지를 이야기하고, SNS에서도 정우성을 실제로 본 이들의 증언이 줄을 잇는다. 데뷔 이후 외모에 찬사를 줄곧 들어온 그는 “잘생긴 건 짜릿하다” “내가 제일 잘생겼다”와 같은 농담을 할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그는 “현재 나에 대한 그 수식어는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 한 ‘세뇌’ 정도가 아닌가 싶다. 요즘 잘생긴 배우들이 얼마나 많나. 그냥 오래 버텼더니 그 수식어에 있어선 이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라고 말했다.

“캐릭터에 충실했을 때 멋있어 보이지 않나요. 외모에 대해선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작품 속 캐릭터에 충실하려고 해요. 이번 작품에서도 그랬고요. 사실 청춘의 아이콘으로 불릴 당시 전혀 실감하지 못했어요. 도취되지 못한 거죠.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뒤 ‘좀 즐길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던데요(웃음). 〈비트〉와 〈태양은 없다〉 당시엔 영화가 그렇게 파급력이 큰 매체라는 게 마냥 즐겁고 신기했어요. 오히려 현장에서는 많이 즐겼죠. 원래 대외적 이미지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잘 놀고 잘 즐기는 편이에요.”


영화감독이란 꿈은 현재 진행형


정우성은 영화 작업을 너무 즐기다 보니 다른 관심사에 대해선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분야에도 해박해지고 싶다. 요즘 뭘 배울까가 가장 큰 관심사다. 관련 기사를 접한 뒤 “금속공예의 세계는 어떨까 궁금해졌다”고 했다. 그의 또 다른 관심사는 영화 연출이다. 2014년 단편영화 〈킬러 앞에 노인〉으로 감독 데뷔했고, 올해 초 멜로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의 기획·제작을 맡았다. 오랜 열망이었던 감독에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장편영화를 언제 할까 고민한다. 단편은 했는데, 내가 여러 번 꿈이라고 밝힌 장편영화 입봉은 아직 못 했다”고 했다.

“어떤 이야기로 첫 번째 장편영화 연출을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영화가 산업화되면서 촬영 조건은 좋아졌으나 흥행이 절대적 목표가 된 상황에서는 영화적 본질이나 세계관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존재해요. 본질에 대한 갈구가 기본적으로 있어요. 그간 배우로서 눈치 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며 완성도를 높여 왔듯이 용기를 가지고 감독으로서도 그래봐야겠죠.”

감독 데뷔 준비 외에도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최근 이정재와 함께 매니지먼트사 아티스트 컴퍼니를 설립했다. 두 사람은 1999년 영화 〈태양은 없다〉에 함께 출연한 이후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오고 있다. 서래마을에 살던 정우성은 이정재가 살고 있는 삼성동 빌라로 이사했다. 그만큼 가깝다.

“어떻게 하면 상처를 줄이면서 건강하게 배우생활을 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왔어요. 이제 나이가 들었고, 여유가 생겼기에 후배들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조언해주는 선배가 되고 싶은 거죠. 이번에 정재가 〈아수라〉를 보고는 너무 부럽다고 하더라고요. 세월이 흘러도 업계, 팬들에게 회자될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아 질투 난다네요. 하하.”


정우성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세상에 제대로 각인시켜준 〈비트〉(1997)부터 〈태양은 없다〉(1998), 〈무사〉(2001),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호우시절〉(2009), 〈감시자들〉(2013), 〈마담 뺑덕〉(2014), 〈신의 한 수〉(2014)까지 그는 청춘물부터 멜로, 무협, 스릴러, 액션 사극, 치정 멜로까지 늘 새로운 장르와 신선한 캐릭터에 도전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유로워졌으나 욕심이 많아 배우로서는 아직 배가 고프다. 뭔가를 더 배워보고 싶고, 관심사를 밀도 있게 접근할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결과에 따라 좋은 소리, 안 좋은 소리도 듣겠지만, 영화인으로서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값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제가 만약 남들의 시선을 계속 의식했다면 흥행할 만한 작품, 안전한 작품에만 집중했을 겁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계속 하고 싶어요. 그게 작업에 임하는 제 가치관을 보여주는 방식이라 믿어요. 또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 저를 자극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이 관객에게는 친절하지 않은 소통일 수도 있는데 길게 보자면 재미있는 필모를 가지는 비결이자 나이 먹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요.”

방황하던 청춘은 어느새 삶에 찌든 중년을 연기하게 됐다. ‘나이를 먹지 않는 방법’이란 말을 꺼낸 정우성도 세월과 나이를 느끼고 있을까.

“음. (지금의 저는) 선셋(sunset)인 것 같아요. 해질 무렵. 지기 시작하면 빨리 어두워지잖아요? 그만큼 체력도 빨리 소진돼요(웃음). 일 욕심보다는 어떻게 하면 일을 즐길 줄 아는지 그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 같아요. 지금부터는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20대 때는 영화배우가 됐고, 일을 잘해야지란 마음이 컸어요. 30대 초반에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30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는 돌아보니 그게 관습적인 태도였던 것 같아요. 〈아수라〉를 하면서 한도경이 매우 고단하기도 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한도경을 한 건, 외적인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20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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