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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인의 내면에 깃든 여성성의 발견

관객 300만 돌파, 〈아가씨〉 박찬욱 감독

박찬욱 감독은 만나자마자 자리에도 앉지 않고 양해부터 구했다.
“혹시 제가 좀 걸으면서 인터뷰를 해도 될까요?” “괜찮다”고 하자 그는 탁자 옆을 왔다갔다 걸어 다녔다. 짧은 거리를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 다니자 마치 시계추를 보는 것 같았다.
“〈아가씨〉 스태프와 아내와 내기를 했다, 하루에 만 보(萬步)를 걷기로. 꼭 만 보라는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고, 내가 운동을 따로 하지도 않고 언제나 앉아 있으니까”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사진제공 : 박찬욱, CJ엔터테인먼트
“재미있게 꼬인 에로틱 스릴러”

6월 14일 현재 〈아가씨〉는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극장가에서 한국 영화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지난 5월 열린 칸 국제영화제 공식경쟁 부문에 올랐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할리우드 리포터는 “박찬욱의 정교한 영화 〈아가씨〉는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켰다. 재미있게 꼬인 에로틱 스릴러와 기분 좋은 놀라움으로 가득 찬 러브 스토리로 2시간 30분이 금세 지나간다”고 평했다. 160여 개국에서 이 작품을 샀다.

영국 작가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가 원작이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원작은 박 감독 손을 거치면서 1930년대 식민지 조선과 일본으로 옮겨갔다. 보영당이라는 전당포를 운영하는 유명한 여성 장물아비 복순의 손에 자란 숙희(김태리). 일찍이 “진짜 돈과 가짜 돈을 구분할 줄 알고, 자물쇠 따는 법과 소매치기 기술을 두루 익힌” 숙희는 복순을 도와 “낳자마자 버려지는 핏덩이를 일본에 팔아넘기는” 일을 한다. 어느 날, 백작(하정우)의 제안을 받고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의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될 히데코는 이모부이자 후견인인 고우즈키(조진웅)의 엄격한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런 히데코를 속여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 조력자 숙희와 나누겠다는 게 백작의 야심 찬 계획이다. 숙희는 히데코가 백작을 사랑하게 만들려고 거짓말을 하지만 어미 없이 유모(김해숙)의 손에 자란 까닭에 외로운 히데코는 숙희에게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영화 〈아가씨〉
영화는 원작 《핑거스미스》를 초반 3분의 1만 충실히 따라가고, 나머지는 새롭게 각색했다. 줄거리는 원작보다 밝고 간결해서 관객들이 두 시간 반에 가까운 영화를 힘들이지 않고 따라갈 수 있다. 박 감독은 “한 사건을 다른 눈으로 봤을 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데 매력을 느꼈다”며 “진실을 알고 봤을 때와 모르고 봤을 때 같은 사람도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사가 제일 많은 영화라는 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는데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큰 차이입니다. 그간 과묵한 편이었는데 재치 있는 대사를 하고 싶었어요. 일상 말투에서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현대 배경 영화에서 할 수밖에 없는 표현에서 벗어나고 싶었죠.”

“이쁘다고 미리 말해줬어야지. 당황스럽잖아.”

숙희가 히데코를 처음 봤을 때 속으로 하는 말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딱 저렇다. 특히 〈아가씨〉에서는 서재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박찬욱 감독은 “서재는 낭독회가 이뤄지는 공연장이기도 하고 고우즈키의 콜렉션이 보관되는 도서관의 성격도 있다. 지하에는 또 고문실이 있고. 즉, 고우즈키의 주활동이 다 이뤄지는 곳인데 히데코 또한 그곳에서 자라났다. 그런 복합적 느낌을 주기 위해서 서양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이질적 디자인을 꾀했다”고 했다.

“보여주고 싶은 장면은 이런 겁니다. 히데코가 다다미가 깔린 무대에 올라 책을 읽으며 독회를 준비하는데 뒤에서는 하인들이 일본식 정원을 꾸미고 있고, 고우즈키는 그 완성도를 만족하면서 내려다보는 거예요. 지배자로서의 만족감을 잔뜩 드러내는 것인데 식민지 근성이 뿌리 깊은 자의 내면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그걸 파괴하는 것이 두 여성의 결정적 행위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촬영한 〈아가씨〉의 주연배우들.
박찬욱 감독은 칸 영화제와 유독 인연이 많다. 〈올드보이〉는 2004년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박쥐〉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이번에는 수상에 실패했지만, 영화제에서 만난 외신 기자들은 박 감독의 작품에 대해 여전히 궁금해하고, 지지를 보냈다. 올해 개봉한 영화 〈대배우〉에서 박 감독을 닮은 ‘깐느 박’(이경영)이란 캐릭터가 등장한다. 칸 영화제와 인연이 깊은 박 감독을 약간 희화화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는 “내가 영화 연출부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이경영 형이 조연으로 출연했었다. 그때부터 이미지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때 인연이 돼 같이 영화도 작업하고 그랬다. 그 정도 흉내내는 건 괜찮다. 재밌지 않나?”라고 했다.

“영화제가 화려하니까 이목이 집중되잖아요. 언론과 대중의 관심도 크고. 무엇보다 마케팅 차원에서 확실한 이벤트가 되니까 상을 받으면 호재죠. 그런 면에서 중요해요. 창작자의 입장에선 소리나 화면이 최고죠. 극장이 일단 좋으니까.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를 꼭 입어야 입장할 수 있기 때문에 ‘참 재수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 창작자로 영화제에 참여할 때는 존중을 받는 마음을 느껴요. 확실히 ‘뿌듯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죠.”

박 감독은 “이번 영화에 상업적 요소가 강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을 줄 몰랐다. 그런데 상영 직후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이 ‘이게 상업적이라고요?’ 하며 놀라더라”고 말했다.


감독에게 상업영화란


“〈아가씨〉는 모호하지 않은 영화죠. 원래 그러한 기준을 갖고 있던 건 아니에요. 그전 영화들도 늘 상업영화라고 생각하면서 했고, 다르게 접근했던 적이 없었어요. 어떤 영화는 흥행되고 안 되고 그 차이가 뭔지 잘 몰랐어요. 예를 들면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을 다루고 있어서 상업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잘됐죠. 또 흥행이 잘된 게 〈친절한 금자씨〉인데 외견상 상업적인 흥행이 어려워 보였어요. 같은 마음으로 만들었던 〈박쥐〉는 잘 안 됐어요.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칸 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해 〈아가씨〉를 어느 섹션에 넣을까 고민하게 됐죠. 경쟁 부문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모호한 구석이 없이 모든 게 분명히 해결되는 이야기라서 말이죠. 그래서 스스로 생각해보니 상업영화의 기준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후반부 폭력적인 장면에서 당황하는 관객도 있지만, 박 감독의 전작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는 농담 수준이다. 폭력을 덜어낸 자리에는 관능을 더했다. 지난 작품 〈스토커〉와 마찬가지로 막 소녀 티를 벗은 여성의 성(性)을 다루고 있다. 하녀 숙희 역을 맡을 배우 모집 공고에서 ‘노출 수위: 최고 수위, 노출에 대한 협의 불가능합니다’라는 조건을 단 게 납득이 갈 정도로 두 여주인공의 정사 장면은 수위가 높다. 박 감독은 “정사 장면은 언제나 어렵다. 배우들이 예민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매우 힘들다. 빨리 찍어서 해치우는 것이 최선이다. 알려진 대로 최소한의 스태프만 현장에 들여보내고 원격카메라로 찍었다. 들어간 스태프도 모두 여성이었다. 그 장면을 위해 여성 동시녹음 기사를 따로 고용했다”고 했다.

“욕망과 충동으로 달려가는 거칠고 과격한 섹스보다는 친밀하고 부드러우며 대화에 가까운 섹스를 그리려고 했어요. 실제로도 영화에 등장하는 정사 장면 치고는 대화가 많습니다. 둘이 서로 속이면서 안 그런 척, 순진한 척하면서 관계를 시작하나 결국에는 자기들 감정에 충실한 단계로 넘어가거든요. 특히 서로 손을 맞잡는 장면은 서로를 위해주고 서로 하나가 되는 기분까지 만들어 주는 모습입니다.”

〈아가씨〉에선 여성이 남성을 모든 면에서 압도한다. 두 여성의 관계는 따뜻하고 격정적이며 아름답지만, 남성의 성은 차갑고 뒤틀렸으며 폭력적이다. 이들은 여성과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한다. 히데코가 가학·피학적 관계를 다룬 성애 소설을 남자들 앞에서 낭독하는 장면이 이런 대비를 재기발랄하고 우아하게 표현한다. 박 감독이 말했다. “모든 위대한 사람에게서 여성적 섬세함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고 딸을 키우면서 내 안의 여성적 면모를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된다. 남자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여성성의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해외 영화제는 꼭 아내와 함께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만들지 않을 때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낸다.
박 감독을 영화제에서 두 번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그의 곁에는 아내와 딸이 있었다. 그는 농담으로 “영화제마다 꼭 챙겨 가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아내다”라고 했을 정도다.

“남편이 영화 만든다고 밤에 늦게 오고, 지방 촬영하고, 며칠씩 집에 못 들어가잖아요. 영화제 가서 ‘내가 이걸 만들어서 바빴던 거야. 이해해줘. 용서해주라’ 이런 의미가 있죠. 아내가 영화 쪽 일은 하지 않는데 안목이 높고 취향이 좋아요. 기획 단계부터 각본, 편집과 음악까지 영화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 상의하고 조언을 받아요. 〈아가씨〉를 추천해 준 것도 아내예요. 〈스토커〉 이후 서부극을 하려고 하다가 무산이 돼서 막막한 상황이었어요. 대안도 생각해보지 않았거든요. 그때 아내가 《핑거스미스》(〈아가씨〉의 원작 소설)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했죠. 밤에 집에서 맥주나 와인을 마시면서 아내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정리하는 게 낙이에요.”

“그럼 딸과는 사이가 어떠냐?”고 묻자 그는 “딸이 인터뷰에서 자기 얘기 하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외동딸이다 보니 친하다.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데 대한 얘기를 해주는 것도 딸이고, 내가 말실수하면 혼내는 것도 딸이다”라고 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딸은 이번 영화에서 미술팀 막내로 일했다.

“딸이 사실 여행을 가고 싶었나 봐요.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우리가 용돈을 거의 주지 않으니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 같더라고요. 미대를 다니고 있으니까 (영화미술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아내가 권한 거죠. 영화 일이 카페보다는 고되겠지만 벌이는 조금 낫고, 또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나 봐요. 그런데 정말 힘들었는지 이번 일 끝나고 영화계 진출할 마음은 접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박찬욱 감독은 영화 촬영 전 배우들에게 자신이 고른 곡을 넣은 CD 서너 장을 선물했다. 그가 보여준 선곡표에는 다 클래식만 있었다. 음악 이야기를 이어가자 그는 작은 가죽 가방에서 포터블 하이파이 오디오를 꺼내서 보여줬다.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라고 했다. 어느새 영화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음악과 사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가씨〉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으로 《아가씨 가까이》란 사진집도 냈다. 그는 “하정우가 그림을 그리고 화가가 되는 것처럼, 나도 나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찍지 않는다면 사진작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제가 찍은 사진을 보정하고 보는 것, 영화를 찍지 않을 때 제가 하는 일은 그게 다예요.”

이 얘기를 할 때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아가씨〉 같은 영화를 연출한 그가 앞으로 찍을 사진이 궁금해졌다.
  • 2016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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